소설집(단편)

못 다한 이야기

돌 박사 2007. 8. 26. 14:03

  <단편소설>

                      못 다한 이야기

                                                           석 도 익

 이슬비로 씻겨진 해맑은 하늘에 제비가 날렵하게 날아다니고 능수버들의 꽃눈이 눈송이처럼 날리고 있었다.

 이렇게 기분이 좋은날이면 뭔가 좋은 시상(詩想)이 떠오를 것 같아 현석은 벅찬 마음속에 초초해 하는 버릇이 있다.

 황토색이 파란 녹색으로 채색되어가고 핏기 없이 엷던 햇볕이 이제는 제법 두텁게 내려덮는 나른한 오후 오늘 같은 날 무언가 변화가 있음직하다. 현석이 자신에게 어떠한 사건이라도 있을 것만 같은 예감에 사로잡히고 있었다.

 꽃향기가 묻어 있는 바람이 나지막한 덕고개에서 내려와 현석의 머리칼을 스치고 지나간다.

 그는 갑자기 무엇이 생각난 듯이 방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쓰다버린 원고지를 밀어 넣고 새 원고지 한권을 꺼내 무엇인가를 열심히 써 나간다.

 동구 밖에서 꼬불꼬불한 논둑길로 빨간 자전거를 타고 오는 우체부를 제일먼저 보고 현석이네 곰순이가 달려 나가며 컹컹 짖어댄다.

 그 빨간 자전거는 꼬불꼬불한 논둑길로 곧장 현석이네 사립문 앞에 와서 멎었다.

ꡒ계십니까?ꡓ

 우체부는 안을 기웃거리며 걸쭉한 목소리로 부른다.

현석은 지금 정말 뜻밖에 좋은 생각이 떠올라서 원고지에 옮기느라 정신이 없다. 있을 수 있는 엄청난 글을 착안하기까지  무진 애를 태우다 이제야 실마리를 잡고 이 기회를 놓칠세라 대충 줄거리를 원고지에 옮기는 중인데 곰순이가 짖는 소리와 주인을 부르는 소리가 귀찮은 듯 얼굴을 찡그리면서 만년필을 들은 채 나온다.

ꡒ어이구 난 또 어떤 분이신가 했더니 반가운 아저씨군요ꡓ

ꡒ하하 뭘 그렇게 열중이 십니까? 또 재미있는 글 쓰오?ꡓ

우체부는 당나귀 같은 코를 벌름거리고 웃으며 붉는 가죽가방을 열고 뒤적거린다.

ꡒ네 뭐 심심해서요.

현석은 게면 적은 웃음으로 얼버무리며 가방을 기웃한다.

ꡒ이 동네 총각 선생님 빼고는 편지가 별로 없다니까 그러네. 오늘은 아주 멎진 사연인가 봅니다. 두툼하던데 어디 있더라. 옳지 이거지ꡓ

구레나룻이 검실검실한 우체부는 싱글거리면서 두툼한 편지 한통을 꺼냈다.

ꡒ참 도장이 있어야 하겠소. 사랑하는 임에게 꼭 쥐어주라고 등기로 보내셨습니다요. 허허허…….ꡓ

ꡒ원 아저씨도…….ꡓ

현석은 두툼한 편지한통을 받아들었다.

ꡒ먼 곳에서 희…….ꡓ발신인의 주소는 없고 깨알 같은 글씨로 귀퉁이에 이와 같이 써있었다.

ꡒ총각선생을 먼 곳에서 굉장히 보고 싶어 밤새도록 써 보낸 사연이겠지 난 이런 보람에 아무리 먼 길이라도 힘 드는 줄 모르지 자 난 가오. 답장이나 부지런히 써놓으시오 허허허ꡓ

ꡒ예 감사합니다. 안녕히 가세요.

현석이 인사를 할 때에는 우체부 권씨 아저씨는 그 특유의 막걸리 냄새나는 듯한 너털웃음을 날려 보내며 벌써 자전거에 올라서 페달을 몇 번 밟아 좁은 논둑길을 잘도 달리고 있었고 그 뒤를 곰순이 년이 그사이 눈 이 맞았는지 꼬리를 흔들며 따라가고 있었다.

 현석은 마루에 걸터앉아 그 두툼한 편지를 아직 뜯지 않고 이리 저리 보고만 있다.

 분명 자기에게 온 것은 틀림이 없다. 그러나 ꡒ먼 곳에서 희ꡓ라고 만 했으니 생각이 날듯 하면서도 누구인지 갸웃둥 해진다. 누구인지는 뜯어보면 알겠지만 선뜻 뜯고 싶지 않은  감정을 억제하며 천천히 겉봉투를 뜯었다.

양면지 열장은 됨직한데 깨알 같은 글씨가 낯익어 보인다.

ꡒ나의 영원한 현석께ꡓ

ꡒ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못 다한 우리들의 이야기를 담아 그렇게 그리워했던 너에게 보낸다. 우리는 사랑했으면 서도 사랑이 뭔지 모르고 그저…….ꡓ

 여기까지 보았다. 그다음은 성큼 한눈에 쏘아보았고 어떤 강한 충격을 받은 유리창이 왕창 깨지는 것 같다 했더니 이제는 온몸이 점점 땅속으로 빠져 들어가고 있었다.

 현석은 온 세상을 지우려고 허우적거린다. 그는 신문의 어지러운 사회면에 기사를 먹으로 까맣게 칠하고 있었다.  현석이 칠한 먹물로 인해 까맣게 된 그 다음부터는 모른다. 어두움으로 모든 것이 지워지고 말았으면 하는 생각을 했을 뿐이다.


 방안이다. 두런두런 이야기 소리가 들린다. 누가 무슨 걱정을 하는가. 같다. 허나 그렇게 알고 싶지는 않다. 누구의 일이건 아니 현석이 자신이 이불속에 오줌을 싸서 미합중국에 아프리카 까지 지도를 그리고 척척하게 떠있다 하더라도 움직이기 싫다.

 벽이 온통 까맣다. 현석이의 방은 일부러 신문지로 온통 도배를 했다. 그리고는 현석이 심심하면 누워서 뒹굴면서 훑어본다.

ꡒ이건 정말 요지경이요 역사며 진리고 인생이다.ꡓ라고 웃어대기도 했던 생각이 난다. 

 윤리 도덕 부정부패의 나열된 사회면을 이를 악물고서 모조리 까맣게 칠했다.

 이제는 없겠지…….윤리 도덕 따위 말이다. 그런데 저건 또 뭐냔 말이냐? 먹물로 까맣게 칠한 종이 아니 신문지가 귀퉁이도 아닌 한 가운데를 눈에도 보이지 않는 벌레가 서걱서걱 소리가 날만치 갉아먹어 들어가고 있지 않은가. 아니 저거는 있을 수 없는 모순이다. 모순이 아니라면 있을  수 없다던 그 현실들이 가짜란 말인가?

 언젠가 아버지가 종이뭉치를 뒤적거리고 계시는 것을 보았다. 아주 오래된 것 같은 아니 몇 백 년 되었을 것으로 생각되는 누렇게 찌들어 역사가 있어 보이는 한지인데 군데군데 듬성듬성 종이를 갉아먹어 매미껍질처럼 되어있고 낙엽줄기 같은 글씨만 남아있었다.

 한지에 붓으로 쓴 순 한문의 글이었다. 한 가운데 또는 우측 하단에는 몇 사람이 들어서 찍었음직한 굉장히 커다란 도장이 찍힌 그런 귀신같은 것들이 한 뭉치나 되었다.

 아버지는 어린 현석에게 이것들을 들춰 보이면서

 ꡒ이것이 모두 우리 조상들께서 임금님께 받은 상장 혹은 임명장 같은 것들이다ꡓ라고 하시며 설명하시었다.

 이럴 때마다 현석이 알고 싶은 것은 어째서 종이는 없는데 글씨만 남아있느냐고 말하고 싶었지만 그만두었는데 언젠가 아버지는 그 비밀을 이야기 하셨다.

ꡒ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으면 이름을 남긴다더니 몇 백 년이 지나도 이렇게 조상의 얼과 자취가 담긴 글이 남았으니……. 허! 종이는 좀이 먹어도 글씨만은 범하지 못했구나.”

 하시면서 소중하게 싸서 도루 상자 속에 넣고 뚜껑을 닫으실 때 현석이 기회라는 듯

ꡒ아버지 왜 글씨는 그대로 남아있지요? 무슨 약이라도 발랐나요.

ꡒ아니다 먹 글씨는 좀이나 벌레도 못 해치는 거란다ꡓ

아버지는 그때 분명하게 그렇게 말씀하셨다. 그리고 분명하게 두 눈으로 똑똑하게 글씨만 남은 그것을 여러 번 보았다. 그런데 그게 아니다 지금 눈에도 보이지 않는 벌레들이 신문을 뭉청 뭉청 먹고 있지 않은가 벌써 구멍이 커져 햇빛이 들어온다.

ꡒ아니 저 녀석이 이건 이율배반이다! 네가 뭔데 옛날부터 좀 따위가 먹지 못한 먹칠을 마구 먹어 치우다니 저런…….ꡓ

이제는 구멍이 제법커서 엄지손가락이 빠져나갈 만 하다. 그런데 그 구멍 속으로 저쪽이 보인다. 그런데 거기에는 현석이의 학창시절의 한때가 영화처럼 비춰지고 거기에는 기억 속에서 빛 바래져가던 선희의 모습이 보였다.

그렇다면 이 구멍은 아니 이 구멍 밖은 과거란 말인가?


 단발머리와 스포츠머리에 이미 많은 녀석들이 얼굴에 보석상을 차리고 있는 남녀공학의 고등학교 학생들이다.

 이런 소도시에 그래도 남녀공학일망정 야간 고등학교가 있었다는 게 다행한 일이고 몇 명 되지 않은 학생들은 순진하고 때 묻지 않은 아름다운 마음과 정이 있었다.

 현석이 이 학교로 오게 된 것은 지난해 그래도 문명의 길목이라는 ㅍ읍에서 이사를 왔기 때문이다.

 까까중 녀석들만 구더기처럼 우굴 거리던 먼저 학교와 막상 이곳의 남녀공학인 학교에 들어와 보니 한편으로는 학교기분이 나지 않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살벌하지 않은 따듯한 그 무엇인가 포근하게 감싸짐을 느끼게 했다.

 전교생 합쳐도 백 명이 안 되지만 현석이 학년인 3학년은 학생이라야 남자가 10명 여자가 8명이라 부르기도 어색한 18명이었으니 처음에는 을씨년스럽기도 했지만 점차 가족 같은 감이 들어 좋았다.

 그들은 나름대로 이상을 이야기하고 문학을 논하고 사랑을 싹틔우는 데 오히려 남녀공학이라 탁 터놓은 벽이 없는 이 성간에 순수한 감정에서 서로의 두터운 우정으로 깊어갔다.

 현석이도 이 분위기에 쉽게 적응되었고 각별하게 접근하고 있는 예쁜 성옥 이에게 처음으로 느끼는 야릇한 감정에 젖어들 때 현석이 바로옆자리에 늘 복스럽게 잘 웃는 선희가 있었는데 내성적인 그녀에게 그리 가까이하지 않은 것은 사실이나 그렇다고 호의를 갖지 않은 것은 아니다.

 이즈음 사춘기를 보내는 학생들인지라 로맨틱한 연정과 우정들이 공책 장에 옮겨져 날라 다니다 호랑이 선생님께 들키는 적도 많았다.

그리고 기회가 있으면 가까운 사이끼리는 야외를 거닌다던가. 극장엘 간다던가. 호젓한 달빛을 즐기며 이야기를 나눈다던가. 심지어는 친구 집에 떼로 몰려다니며 밤을 지새우던 때도 많았다.

 이와 같이 학창시절에 순수한 연분홍 분위기는 이들에게 한없는 젊음으로 꽃피어 졌다.

현석을 각별하게 좋아하던 성옥이가 아무런 굴곡 없이 다른 학생에게로 기울어져 멀어지는 듯하던 무렵 새삼 선희가 가까이 다가왔다.

 그녀는 너설 너설한 김 선생님이 ꡒ부잣집 맏며느리ꡓ라고 지어준 별명처럼 토실토실한 몸매에 함박꽃처럼 웃을 때는 구수한 숭늉 같은 정감이 풍겼고 능금 같은 볼에는 보조개가  쉽게 미워할 수 없는 귀여운 인상이었다.

 그때는 가난하던 시절이라 살집이 통통한 사람이 아름다웠고 여윈 사람은 가난하고 퉁퉁한 사람은 부자이거나 부자가 될 징후라고 생각하던 때다.

 현석이 선희와는 가까운 친구로 지내게 되었고 재미있는 학창시절도 졸업으로 끝이 났다.

 현석은 졸업하자 공무원 시험을 보아서 읍내로 출근하게 되니 가끔은 동창들을 만나게 되었으나 선희는 소식을 몰라 자연히 아련한 추억으로 접혀갈 즈음 흰눈이 내리고 거리에는 크리스마스카드가 구멍가게 앞줄에 매달려 소녀들의 눈을 끌어당기는 연말 사춘기 층의 들떠있는 마음이 거리로 쏟아져 나온다.

현석은 친구들에게서 온 많은 카드 속에 생각지도 못했던 선희가 보내온 카드를 받고 마음이 들떠 있었다.

카드에 끼워진 편지에는 놀러오라는 내용과 주소와 약도까지 그려져 있었다.

 현석은 지금 선희네 집을 찾아가고 있다. 처음 느끼는 차분하지 않은 마음으로……. 그의 손에는 예쁜 일기장을 선물로 싸들고 그 속에는 또 현석이 그녀를 위해 시 한편을 쓴 카드를 넣었는데……. 선희가 뭐라고 할까? 지금 선희는 어떻게 달라져있을까? 하는 마음이 자못 얼굴을 화끈거리게 한다.

 이윽고 그녀가 그려준 약도의 집 앞이다. 대문 앞에서 한참을 서성거리다 용기를 내서 초인종을 눌렀다. 조용한 집안에서 문 여는 소리가 나더니 신발 끄는 소리가 가까워지면서 대문 틈새로 보이는 그녀의 모습은 가슴을 더욱 크게 두근거리게 한다.

ꡒ어머 현석이 아니야? 굉장히 오랜만인데…….ꡓ

그녀는 지난날처럼 수줍음이 별로 없이 반가움에 범벅 진 얼굴로 환하게 웃는다. 정말 아름다운 아가씨가 되어있었다.

ꡒ잘 있었어. 한 이년만이지 아마 들어가도 되나?ꡓ

ꡒ어서 오십시오. 현석씨- 호호 아무도 없어 빨리들 어와ꡓ

그녀의 호들갑에 문간방의 방문 유리로 내다보는 시선을 의식하며 현석이 머뭇거리자

ꡒ아니야 괜찮아 우리 집 방들은 모두 세주었어. 내방만 하나 두고서ꡓ

그녀가 안내한 방은 집을 한바퀴 돌아서 한쪽 귀퉁이에 차양을 달고 꾸민 조그만 방이었다. 천정이 현석이 키에 달랑 말락 하고 한쪽에 가구를 놓아 두 사람이 겨우 앉고 누울만한 아랫목에는 폭신한 이불이 깔려있고 잡지가 펼쳐져 있었으며 화장대에는 여러 가지 화장품이 놓여있어 향긋한 냄새가 방안에 가득했다.

 현석과 선희는 나란히 앉아 이불속에 발을 넣고 서로 마주보며 쑥스러운 웃음을 웃었다.

 그녀는 이집에 혼자 있다고 했다. 부모님과 동생들은 사업과 학교 때문에 모두 서울에 가서 있다고 한다. 가끔 아버지가 읍내에 볼일 때문에 내려오시곤 하면 선물을 많이 가져오신다고……. 집을 지키는 일이 고작이라 심심해서 돼지 한 마리를 기르고 있다고 하면서 돼지우리까지 구경시키는 것이다.

검고 흰줄이 있는 조그만 돼지가 토실하니 귀엽게 생겨서

ꡒ꼭 너같이 통통하구나.

ꡒ어머! 애는ꡓ

선의는 현석의 옆구리를 살짝 꼬집으며 웃었다.

그 해의 크리스마스와 새해는 즐겁고 아름다운 시간들을 보내게 되었다. 현석은 매일같이 그녀의 집 초인종을 눌렀고 그때마다 선희는 함지박처럼 웃음을 담고 기다렸으며 그 좁은 방에서 학창시절 이야기와 별 줄거리도 없는 이야기라도 그녀가 하는 이야기는 하나같이 재미있었다.

 선희는 언제나 현석의 밥까지 지에서 조그마한 소반에 반듯이 차려 들여오면 둘이 마주앉아 오붓한 식사를 한다.

 따듯한 햇살에 이끌려 뒷산에 손잡고 오르기도 하고 극장에 나란히 기대서 영화를 볼 때 화면에 사랑의 몸짓이 가득할 때 둘의 시선은 잠시 합쳤다가 선희의 수줍은 웃음을 마무리로  끝나곤 하지만…….

 현석과 선희가 가깝게 지낸다는 것은 친구들이 모두 알고 있는 터라 간혹 질투와 놀림의 대상이 되기까지 하지만 그들은 개의치 않고 더욱 가까워졌고 벽이 없었다.

 현석이 늦게까지 그녀의 집에 있을 땐 통행금지 예비 사이렌 소리가 나면 선희는 가라고 재촉했고 현석이도 지체하지 않고 일어나서 그녀가 내미는 도톰한 손을 꼭 잡아주고는 대문을 나서면 그녀는 따라 나와서

ꡒ내일도 와!ꡓ

하며 잠시의 헤어짐을 아쉬워하기도 했다.

 근 십리가 넘는 밤길에 자전거를 달려 집으로 오면서 현석은 내일도 선희의 아버지가 오지 않길 바라라는 마음뿐이다. 현석이 언제나 대문 틈새로 들여다보고 멀리 떨어져있는 선의의 방문 앞에 남자 구두가 놓여있을 때는 선희 아버지가 와 있었고 그때마다 부르지도 못하고 발걸음을 돌려야했으며 그런 날은 하루 종일 즐겁지 않았다.

 언젠가는 대문이 열려있어 불쑥 들어가다가 당황하는 선희 뒤에 불독 같은 그의 아버지가 쏘아보는 시선에 겁에 질려 뒤돌아 온 일이 있고부터는 늘 조심하는 터다. 그러나 선희는 그날 아버지한테 되게 꾸중을 들었다면 서도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웃었다.

 따듯한 햇볕이 겹겹이 쌓인 눈을 녹이고 강가에는 얼음을 지치던 아이들이 얼음이 녹아가자 얼음 배를 타고 노를 저어가며 놀고 남산자락에서 아지랑이가 일어 산으로 들로 번지고 있었다.

 현석은 오늘도 퇴근하는 길로 그녀네 집 초인종을 누른다. 두 번이나 눌러서 대문을 열어준 것은 선희의 옆방에 사는  아주머니다.

ꡒ이 총각이 왜 이집 처녀를 매일 찾아오는지 모르겠네.”

ꡒ뭐 놀러오는 건데요 뭘…….ꡓ

ꡒ사랑하는 게 같은데요.”

ꡒ하하 그렇게 생각해주시니 변명이 필요 없겠네요.”

이런 이야기로 얼버무리며 햇살이 드리운 쪽마루에 걸치고 앉아있었다. 선희가 분명 어디 간 것 같은데 아주머니께 단도직입으로 물어보기도 그렇고 해서 엉뚱한 이야기만 하고 있는데 아주머니가 이젠 그만 골려도 되겠다 싶었는지

ꡒ참! 처녀는 아버지가 오셔서 같이 극장에 갔을 거야 우리 방에 가서 놀아요. 우리애가 총각을 굉장히 좋아한다니까ꡓ

 아주머니는 나이보다 아름답고 교양이 있어 보이고 마음이 넉넉한 분이어서 선희와 단둘이 있기가 좀 그러면 이 아주머니 방에 가서 화투를 친다던가. 그 집 아들인 용이를 귀여워 해주기 때문에 이제 세 살배기 용이는 그사이에 정이든 모양이다.

 현석이 아주머니 방에 들어서니 용이는 자고 있었다. 아주머니는 앉기를 권하고 또 화투를 꺼내놓으며 심심한데 육백이나 치자는 것이다. 실은 현석인 화투 같은 건 어떻게 하는 건지도 몰랐는데 이 아주머니께 배우는 중이라 배우면서 하는  실력이라 그리 흥미 있지는 않았지마는 같이 치는 것이다.

ꡒ저 이런 말 물어보는 것이 아니지만……. 난 총각이 우리 동생같이 생각돼서 말하는 것인데……. 이집 처녀를 정말 좋아하는 거. 아니야?ꡓ

아주머니는 정색 을하며 걱정된다는 표정에 농담을 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생각하니 현석은 당황했다.

ꡒ원 아주머니도 뭐 벌써 사랑이니 뭐니 할 것 같습니까? 그저 친구로 지내는 거지요 정말입니다. 아직까지는……. 앞으로도 그 외에는 아무런 생각도 해보지 않았으니까요ꡓ

 현석은 이렇게 대답하면서 조금도 거짓이 아니라고 자신에게 물어보는 것이기도 하다.

ꡒ그렇지만 남녀관계란 묘해서 자주만나면 정이들이고 정이 들면 더욱 떼어질 수 없는 사이가 되는 것이 아니야?ꡓ

ꡒ글쎄요 그럴 수 도 있겠지만 우리 같은 우정은 연정으로 바꾸어지긴 어렵지 않을까요?ꡓ                                                ꡒ그러면 다행이지만……. 이런 말 하는 건. 안되었지만 난 총각을 위해서 하는 말인데 꼭 들어두어야 좋을 것 같아서…….ꡓ

아주머니는 난처한 듯 머뭇거린다.

현석은 이상하게 생각되면서도 대수로운 것 아니겠지 하였다.

ꡒ뭐가 그렇게 심각합니까? 뭐 선희와 사랑하게 되면 큰일 나는 일이라도 벌어지나요?ꡓ

ꡒ그게 아니고 저 남녀관계란 힘든 겁니다. 분별없이 뛰어들었다가 눈물 흘리는 후회를 하게 되니까 이집 처녀도 총각을 사랑하나 보던데 저 내가 이런 말 한다고 불쾌하게 생각하진 말아요. 다 총각을 위해서 하는 소리니까……. 앞으로 더 이상 처녀와 가까이 지진 말아요. 아는지는 모르겠지만 가정이 별로 좋지 않아서…….ꡓ

말끝을 흐리면서 아주머니는 어색하게 웃었다.

ꡒ원 별것을 다 걱정해 주시는군요. 하긴 결혼하기 위해서 궁합을 본다. 가문을 따지고 한다니까요. 하하하 ꡓ

 현석은 소리 크게 웃었다. 여기서 더 파고들기가 싫었다. 더 말을 한다는 것은 정말 선희를 사랑한다는 증거를 보이는 것이고 감추어둔 부끄러운 부분을 들키는 것 같은 쑥스러움이 있기 때문이다.

ꡒ다 총각을 생각해서 하는 소리니까 잘 생각해요ꡓ

ꡒ네~ 알았습니다.ꡓ

 선희에 대한 이야기는 여기서 끝났지만 왠지 찹찹한 기분은 어쩔 수 없었다.

 용이가 잠에서 깨어나 현석에게 매달리면서 겨우 되는 말로 ꡒ아씨ꡓ하며 쌩긋 웃는다. 현석은 용이를 덥석 안고 뽀뽀하자고 하니 녀석이 입을 삐죽이 내미는데 현석이도 아주머니도 웃고 말았다.

 별이 내려앉은 것 같이 피어나던 개나리도 어릴 때 허기지도록 따먹던 수줍은 진달래도 꽃잎이 떨어지고 어느새 울창한 숲에 노란 꾀꼬리가 고운 목소리로 노래를 부르며 사랑할 즈음 현석 이는 한 달간이나 교육받으러 가게 되었다.

 서울로 떠나야 할 날이 내일 모레다. 교육받으러 갈 준비보다도 선희를 한 번 더 만나고 싶어 읍내로 달려갔다. 요사이 바쁜 일이 있어서 며칠 못 만나 보았는데 그녀는 여인의 성숙한 냄새가 짙게 풍기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ꡒ어머 한달씩이나?ꡓ

현석이 교육받으러 간다는 이야기를 하자 그녀는 놀랐다.

ꡒ나같이 이렇게 편한생활에 월급주자니 교육이라도 보내서 골탕을 주자는 것이겠지ꡓ

ꡒ그래도 한달은 너무했다. 무슨 교육인데?ꡓ

ꡒ사람 되라고 정신교육이라지 아마ꡓ

ꡒ그럼 언제 떠나?ꡓ

ꡒ내일 모레ꡓ

ꡒ그렇게 빨리?ꡓ

ꡒ빨리 갔다 오는 게 낳지 여름에 동해안으로 해수욕 가기로 했잖아 아~ 그때가 기다려진다. 너의 아름다운 몸매…….ꡓ

ꡒ웃기지 마세요. 서울 가면 예쁘고 아름다운 아가씨가 많을 텐데 아마 오기가 싫을걸!ꡓ

ꡒ그렇지 않을 거야 참! 시간 내서 면회 와주면 어때 정말 와줄 수 있겠어? 동료들이 질투하게끔ꡓ

ꡒ그러다 애인이냐 고 하면 어쩌려고?ꡓ

ꡒ뭐 그렇다고 하지 까짓것 애인이 따로 있나ꡓ

ꡒ어머! 어머! 얘는ꡓ

선희는 현석에게 눈을 흘기면서도 미소가 흐르는 볼우물 얼굴에 수줍고 행복한 홍조가 짙어진다.

ꡒ참 나말이야 그때쯤이면 서울에 갈는지도 모른다. 엄마가 이곳을 정리하고 서울로 올라오라 셔  그러나 난 안 간다고 했어 이곳에서 혼자 있으면서 돼지나 키운다고 했더니 글쎄 참!ꡓ

그녀는 입을 가리고 키득키득 웃는다.

ꡒ그래서 뭐라고 그래?ꡓ

아버지가 글쎄 그때 왔던 그 녀석 때문에 가기 싫어하는 것. 아니냐고 하지 뭐야ꡓ

ꡒ아 영광스런 순간이여~ꡓ

ꡒ피~ 누가 자기 때문에 내가 그러는 줄 알아?ꡓ

ꡒ요! 깍쟁이ꡓ

 현석도 선희도 한바탕 웃었으나 두 사람의 가슴이 뛰고 있음을 서로는 모른다.

 그날 밤 선희는 송별파티를 한다고 푸짐한 음식을 장만해서 나란히 마주앉아 먹고 극장에 갔다.

 영화 <만추>는 두 사람의 마음을 먼 이야기 속으로 밀어 넣어 언제였는지 그녀의 따듯한 손이 현석의 손과 마주 잡혀 열이 마음으로 전해지고 있었다.

 영화관을 나오니 비가 내리고 있어 자그마한 비닐우산은 둘이서 몸을 감추기에 조금은 적어 더욱 마음과 몸이 밀착 되어진다.

 현석이 포도주 한 병과 초코파이 세 개를 사서들고 골목길을 걸으면서 아직 영화의 스크린에서 깨어나지 못한 듯한 선희는 이 영화는 여자를 너무 기다리게 한다. 고. 남자가 여자를 박력 있게 포옹하는 장면이 너무 멋있었다. 고 하고 현석은 더 멋지게 만들려면 작중 어느 한사람을 죽게 했으면 좋았을 것이라고 하니 그건 너무하다며 현석의 가슴을 두드린다.

 비는 계속 줄기차게 내려 작은 우산 속에 두 사람은 중요한 부분 외에는 거의 젖었다.

선희는 현석의 웃옷을 받아 걸고서 자기가 옷을 갈아입어야 하니 돌아앉으라고 하여 현석이 벽을 바라보고 앉아 옷 갈아입는 소리를 들으며 속으로 웃음이 난다. 웃옷 하나 갈아입는데 그렇게 부끄러워하는 처녀들이 시집가서 아이하나 낳으면 아무데서나 유방을 꺼내놓고 아기에게 젖을 먹이는데 는 얼굴하나 붉히지 않으니 말이다.

ꡒ다 됐니?ꡓ

ꡒ응ꡓ

그녀의 핑크빛 엷은 옷은 요염한 분위기를 방안가득 흐르게 하고 있었다.  

 밖에는 비가 제법 소리치며 오고 있다. 눅진한 여름 냄새를 동반한 비는 머리위의 함석지붕을 요란하게 두드린다.

 현석은 초코파이에 성냥개비를 일곱 개 꽃아 불을 켜고 그녀는 아름다운 유리잔에 포도주 두잔 가득 채우고 촛불을 켜고 형광등을 꼈다.

 촛불과 타들에 가는 초코파이 위에 성냥개비 불빛이 유리잔에 부딪치며 아름다운 색깔에 다시 붉은 포도주가 혼합되어 두 사람의 눈동자 가득히 반사된다.

 영화 속의 주인공은 서로의 술잔을 살며시 접촉시킨 뒤 긴장된 입술을 촉촉하게 적시며 가슴깊이 흘려 넣는다.

 빗소리에 젖은 번데기 장수의 볼멘소리가ꡒ뻐~언 데~기ꡓ하며 창문으로 새어 들어올 때 그들은 두 잔씩이나 마시고 있었다.

ꡒ나 얼굴 빨갛지 그치?ꡓ

ꡒ아니 안 그런 것 같은데... 나는 어때?ꡓ

ꡒ치 자기는 남자가 이까짓 포도주 가지고... 아니야, 눈언저리가 빨갛다 호호호ꡓ

ꡒ그건 촛불이라 그런 거고 정말 취하는 것 같다ꡓ

ꡒ자기 시시하다 겨우 두잔 가지고ꡓ

ꡒ술은 거짓이 없다고 그대는 사나이보다 강하구려. 하하하ꡓ

ꡒ호호호ꡓ

 아름다운 밤 시간은 더 빨리 돌아가는지 벌써 통금을 알리는 예비 사이렌 소리가 젖은 밤하늘로 울려 퍼진다.

ꡒ어머 벌써 열두시다 어떻게 가니 비가 이렇게 와서?ꡓ

그녀는 걱정스러워 현석을 바라보는 눈빛이 강하게 끌어당기는 듯 하다고 느끼며

ꡒ못가면 자고가지 뭐 걱정되니?ꡓ

현석이 능청을 떨면서도 기실 걱정이 된다. 이 비 내리는 밤길을 십리길 을 걸어서 간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비만 아니라면 자전거로 가면 되겠지만 그렇다고 여기서 잔다는 것도 용기 없다. 선희는 어떻게 될 것인가? 아무리 우리가 깨끗하게 밤을 지냈다고 하더라도 선희를 위해서는 안 될 일이라 생각이든 다.

ꡒ어머 그럼 여기서 자고갈래?ꡓ

ꡒ설마 이렇게 비가 억수로 오는 밤중에 가라고 내쫓지는 않겠지…ꡓ

ꡒ아까 진작가지 아이 난 몰라ꡓ

그녀는 아무래도 거짓 앙탈을 부리는 것 같다.

ꡒ나도 몰라ꡓ

현석이 벌렁 누워버린다.

머리위에서 빗방울이 무질서한 소음으로 함석 지붕위에 떨어진다.

ꡒ그럼 오늘은 여기서 자고가 비가 이렇게 오는데 보냈다가 감기라도 들려서 교육도 못가면 나를 원망하는 건 싫어 자 일어나 이불 깔아 줄께ꡓ

ꡒ난 하숙비도 없는데 아줌마ꡓ

ꡒ안받아도 됩니다. 아저씨ꡓ

ꡒ내일 아침에 옆방 사람들 모르게 일찍 가야 돼!ꡓ

ꡒ알았어. 첫닭도 울 기전 새벽에 갈께ꡓ

현석을 아랫목에 누우라고 하고 그녀는 윗목에 옷 입는 그대로 눕는다. 어색한 침묵이 잠시 흐르고 빗소리는 가느다란 신음소리로 눅진한 어둠을 깊은 골짜기로 몰아가는 듯 하다.

ꡒ희야!ꡓ

ꡒ응…….ꡓ

ꡒ불 끄자ꡓ

ꡒ아이 부끄럽사와요. 얘는 그러려면 가!ꡓ

좁은 방이라 둘 사이가 신경을 쓰지 않으면 서로 닿을 듯 하다.

ꡒ나는 촌놈이라 불을 끄지 않으면 잠을 못 잔단 말이야 이럴 때 정전이라도 되면 무지하게 좋을 텐데…….ꡓ

ꡒ어머! 능구렁이ꡓ

ꡒ나 이야기나 할까?ꡓ

ꡒ무슨 이야긴데?ꡓ

ꡒ응 내가 지금 쓰고 있는 소설ꡓ

ꡒ참! 자기 글 잘 쓰지 요즈음 많이 써?ꡓ

ꡒ응 이건 아주 모든 것을 초월한 이상적인 소재라고ꡓ

ꡒ하긴 학교 다닐 때도 모두 알아주던 실력이었지 내가 얼마나 좋아했는데 신춘에 떨어지는 게 이상하지만ꡓ

ꡒ얕잡아 보지 말라고 서글퍼지니까 참 문학하는 양반들 문학이란 그 자체의 뿌리를 어디에 두고 하는지 모르겠어. 당선된 작품을 보면 신통한 것도 아닌 통속적인 것들이 던데ꡓ

그럼 자긴 어떤 건데?ꡓ

ꡒ내 깐에는 그래도 숭고한 이상과 투철한 사명 확고한 신념 건전한 사상을 근거하여 가장 인간적인 순수 문학을 하고 싶단 말이지 진짜 사람냄새가 물씬 나는 그런 작품을 쓸 거야ꡓ

ꡒ어머 자기멋쟁이! 다시 봐줘야겠는데ꡓ

현석이 금년까지 두 번이나 신춘문예에 도전했으나 실패하고 다시 도전하기위해 쓰고 있는 중이여서 평소에 가지고 있던 불만을 터트리며 흥분한다.

ꡒ가령 말이야 애정물이라면 모가지를 잘라 사랑을 위해 혈서라도 쓸 수 있는 애정백서를 쓸 거야 시시하게 사랑한다. 어쩌고저쩌고 하다가 에여지며 눈물정도나 흘리는 멜로물은 누구나 다하는 거 아니야?ꡓ

ꡒ피~ 자신이 그런 과감한 사랑을 하고 있는 것 같은데 누구지 그 상대가?ꡓ

ꡒ있지 여기ꡓ

ꡒ뭐?ꡓ어어ꡓ

 선희가 장난기가 발동하다 놀란 것은 정전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곳은 개가 전봇대에 실례만 해도 정전이 된다고 하던 때라 비가 이렇게 오고 있는 오늘밤에 정전이 여태껏 안 된 것이 이상한 것이다.

ꡒ아이 어쩌지 정전인가 봐?ꡓ

ꡒ잘됐네. 내가 얼마나 기다렸는데 바로 이거야 밤은 어두워야 좋은 거고 기도는 낮에 눈감고 하는 거니까ꡓ

ꡒ현석인 엉큼해 난 몰라!ꡓ

그녀는 응석을 섞어 현석의 가슴을 콩콩 친다. 현석의 가슴이 리듬을 잃고 뒤죽박죽 뛰고 숨소리가 높아지고 있음을 느끼며 내심 놀라 숨을 죽이며 있자니 잠재되어 있던 강한 남성이 뻐근하게 차오른다. 정말 사랑스럽다 더 가까이고 싶은 충동이 치민다.

ꡒ희야ꡓ

ꡒ…….응ꡓ

그녀는 나지막이 대답했으나 떨리는 음성이다.

ꡒ내가 만일 응 이건 만일이야 저...선희 안고 싶어ꡓ

ꡒ어머! 얜 싫어!ꡓ

ꡒ강제로라도 그런다면?ꡓ

ꡒ아니야 현석인 그렇지 않아 난 믿어 그러니까 이렇게 같이 누워있을 수 있지 만일 나를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사귀지도 않았고 오늘 저녁에도 가라고 했게?ꡓ

 그녀의 조용한 이야기를 들으며 현석의 남성은 점차 평온한 감정으로 되돌아가고 있었다.

ꡒ선희야 사실 나도 분명한 남자다 남자로서 여자와 같이 밤을 지낸다는 것은 누가 생각해도 이상한 쪽으로 생각하겠지만 난 이것을 부정하고 싶어 남자와 여자이기 이전에 인간이었다는 것을 물론 남녀간에는 육체적 교감이 창조되어 있으니 그것에 끌려서 불장난에 빠지지만 정신은 육체를 지배할 수 있다고 생각하거든 인간이 편집해 놓은 도덕관념과 윤리를 더럽힌 성적욕구에 불과할 땐 후회가 따르게 마련이겠지……. 이건 일시적인 육체적 욕망 때문에 영원한 정신적 윤리를 배반하게 되는 것이겠지……. 하지만 진정 사랑한다면 말이야…….ꡓ

“.....”

그녀가 무슨 말을 하려고 하다가 다시 숨을 고르게 하려고 애쓰고 있음을 현석은 느끼며

ꡒ나는 가끔씩 이 순간에도 선희를 포옹하고 싶은 순간을 많이 참았어. 그건 내가 너무 좋아해서 못한 것이야 그냥 때 묻지 않게 아끼고 싶은 거라고 ꡓ

 이런 말을 그녀의 귓가에 배설하면서 현석은 그녀가 배가 불쑥 튀어나와서 뒤뚱거리는 모습이 떠오르는 것을 흔들어 지우고 있었다.

ꡒ정말이야 자기 말이 맞아 난 석이의 그런 면이 좋더라. 참! 석인 언제쯤 결혼할 거야?ꡓ

그녀는 무의식적으로 밀착시키며 말한다.

ꡒ너는 언제 하는데? 아마 같을걸.

ꡒ왜? 같아 나와?

ꡒ한날한시에 한곳에서 같이하면 되잖아ꡓ

ꡒ어머! 말도 안돼ꡓ

도토리 주먹이 현석의 가슴을 살짝 칠 때 그녀의 손을 잡았다.

ꡒ아이 이거 놔!ꡓ

ꡒ좀 만지면 안 되니?ꡓ

ꡒ아이참! 얘는 호호호…….ꡓ

 현석이 그녀의 손을 꼭 잡고 만지작거린다. 따듯하다. 보드라운 감촉이 마음속까지 포근해진다. 현석이 손에 힘을 더 가하자 그녀도 꼭 감싸 쥔다.

 그녀의 숨소리가 불규칙 할 때마다 탐스럽게 익은 황도 복숭아 같은 젖무덤의 부드럽고 숨 막히는 감촉이 가슴에 닿고 밖에는 빗소리가 점점 거세어 지면서도 안개에 칭칭 묶여서 포근한 어둠 속으로 가라앉고 있었다.

통금해제를 알리는 사이렌 소리가 싱그러운 새벽 정적을 깨고 울린다. 그들은 장대같이 두드리던 비가 언제 그쳤는지도 모르고 있다가 사이렌 소리에 비가 그쳤음을 알았다.

ꡒ아~ 번뇌의 밤이여 안녕!ꡓ

현석이 기지개를 켜다 선희를 끌어안으며 하는 소리에

ꡒ애는 소리가 커! 왜? 그런 밤이야?ꡓ

ꡒ한잠도 못자고 남녀가 괴로워했잖아ꡓ

ꡒ난……. 아니야, 정말 잊지 못할 밤이었어. 아주 포근한 난 비 오는 밤은 싫었었는데 이제는 아니야 호호호…….ꡓ

 “내일 또 올게”

 “내일은 아버지가 내려오신대”

 “그럼 갈 때 올게”

 “알았어. 잘 가”

 누가 들을세라 둘은 나직이 속삭이며 아쉬운 작별을 하고 새벽에 도둑고양이 걸음으로 집을 빠져 나오면서 미안한 마음이 떨어지지 않는 것은 혹시 아무 일도 없는 우리들을 주위 사람들의 오해로 선희에게 피해가 돌아가지나 않을까 걱정이 되면서도 아름다운 추억이 되리라 생각하며 웃음을 삼켰다.

 한 달간이나 만날 수 없을 선희 더군다나 서울로 간다면 어쩌나 생각하며 짐을 챙긴 현석은 가기 전에 만나보고 싶어서 짐을 버스 대합실에 두고서 선희네 집으로 달려갔다.

 그녀의 집골목으로 접어들면서도 성급한 마음에 오늘은 웬일인지 서운한 생각이 자꾸 든다.

 대문 앞에서 습관적으로 문틈을 통해 방을 바라보았다. 그의 방문 앞에는 선희 신발만 놓여있어 안심하고 벨을 눌렸다.

 실은 어제도 그제 밤에 미안했다고 변명이나 하려고 아니 정말은 보고 싶어 또 왔다가 대문 틈으로 들여다 만 보고 그냥 간 것은 그녀의 아버지 구두가 놓여있었기 때문이었다.

 벨을 누르기만 하면 달려 나오던 그리운 얼굴이 아직 나오지 않는다. 또다시 신경질 적으로 눌렸다.

방문이 열린다. 그제야 대문 틈 사이로 그녀의 모습이 보인다. 그런데 머리가 헝클어지고 눈두덩이 좀 부은 것 같다.

ꡒ자식 너 여태껏 늦잠 잤구나! 지금 몇 신데 …….ꡓ

ꡒ…….ꡓ

선희는 대문 앞에 멈추어 무슨 말을 하려다 말고 멍청히 서있다.

그녀는 늦게 일어나 아침 겸 점심을 먹는다고 했기 때문에 오늘도 늦잠이려니 했던 것이다.

ꡒ빨리 문 열어ꡓ

현석이 대문 틈으로 바라보며 문 열기를 재촉했으나 선희는 그저 우둑 허니 서서 멍하니 바라보는 눈에 이슬이 서리는 것을 현석은 보지 못했다.

ꡒ나 오늘 지금 가는 길에 잠깐 들린 거야ꡓ

현석이 다급하게 떠들면서 대문 앞에 놓았던 가방을 들고 다가서자 그녀는 갑자기 휙 돌아서더니 뛰어서 자기 방으로 들어가 버리는 것이다.

ꡒ어~ 너 왜 그래 문 안 열고 응ꡓ

방으로 들어간 선희는 아무런 응답이 없다.

ꡒ웃기네. 너 삐졌니? 갑자기 무슨 일이야ꡓ

정말 이상한 일이다 장난 하는 것. 같지도 않고 내가 잘못한 것도 없는데 하는 생각까지 하였으나 모를 일이다. 이러는 사이에 이웃집에서 내다보는 시선이 부끄러워지며 심한 모욕감을 느꼈다.

ꡒ헹 자식! 지가 기분이 나쁘면 나한테까지 그럴게 뭐야 누가 못 보면 죽나ꡓ

 현석은 투덜거리며 아쉽고 분한 미련을 뒤에 남기고 돌아와 우울한 마음으로 반쪽을 또 자른 차표 한 장에 몸을 싣고 떠났다

 교육 중에 늘 선희의 생각으로 가득했다. 편지를 몇 번이나 했으나 무응답이더니 마지막에는 꼬리표를 달고 되돌아 왔다.

 교육을 마치고 집에도 오기 전에 그녀의 집에 들렀으나 집에는 온통 낯모르는 사람들이다. 한 달 만에 많이도 변해 있었다.

선희네 집 이웃에 사는 순희를 만난에게 다행이었다.

ꡒ섭섭하겠구나. 선희 서울로 갔어. 울면서 가더라. 그런데 너한테는 주소도 가르쳐 주지 말라고 하더라. 너네 싸웠니?ꡓ

이야기를 들으며 현석은 가슴이 젖었지만 주소를 알려 고한다면 자존심이 굽혀지지 않아서

ꡒ야 누가 섭섭해? 뭐 지가 애인이라도 되니 그리고 그러면 누가 까무러치기라도 한데ꡓ

 이렇게 허세를 부리면서도 현석은 선희를 원망했다. 아련한 그리움과 숙제를 풀지 못 한 채로…….


<중략>

ꡒ석이 난 그 비 오던 날 밤을 잊을 수 가 없어 내가 태어난 건 아마 그날을 위해서 살았던 것 같아 결국 그날 때문에 난 이런 비련에 주인공이 되긴 했지만 후회하지 않아 사랑! 그건 정말 석이 말대로 숭고하고 아름다운 것이라는 것을 난 죽어가는 지금에도 중얼거리고 있어 우리는 그렇게 가까이 모든 것을 안다고 했으면서도 서로 사랑이란 말을 하지 못했을까? 나는 그 말을 무척이나 하고 싶었고 듣고 싶어서 심한 갈증까지 느끼고 있었어. 그러나 사랑이란 말을 석이에게서도 듣지 못했고 석이에게 하지도 못하고 사전 속에만 그대로 있었지 석이의 그 아름답다는 숭고한 사랑 때문에 난 꿈속에 무지개다리를 헤매다 발을 헛딛었고 어느 멍청한 학생이 아무렇게 답을 써낸 방정식을 선생님은 졸다가 그냥 동그라미를 친 거야 그날 밤 난석을 사랑한다고 말할 기회를 잃었어. 석이의 사랑이란 논설 때문에 거기에 비하면 나의 사랑한단 말은 너무 초라한 것 같아서…….ꡓ 중략

ꡒ다음날 아버지가 오셨어 난 아버지가 두려웠어. 석이와 지새운 밤 아버지가 아시면 어쩌나 하는 것도 있지만 그것보다도 언제나 아버지께 늘 느끼는 막연한 불안감을 가지고 있었거든 그러나 다행히 아버지는 오시자마자 일이 있다며 나가셔서 밤늦게도 안돌아 오시기에 간밤을 지새운 나는 깊은 잠에 빠져들고 말았지ꡓ


 아름다운 밤이다 별들을 한꺼번에 쏟아 부은 은하수 바로 밑에 둘은 마주 누워있었다. 파란 잔디 위는 부드러운 감촉과 꿀 같은 냄새마저 두 사람을 감싸고 있고 밤인데도 서편 하늘 언덕위에는 무지개가 반원을 그리고 있었다.

 그는 그녀의 기다란 머리칼을 쓸며 들추어진 귓가에다 조용하게 속삭였다. ꡒ사랑한다. 고 아~ 얼마나 듣고 싶었던 말인가 그녀는 황홀한 음악에 도취된 듯 기력을 잃은 채 포근한 행복감에 자꾸 빠져 들었다.

지독한 술 냄새를 풍기며 그의 숨소리가 점점 가까이 접근한다. 그녀는 아까 같이 마신 포도주 냄새일거라 생각한다. 콩콩 두 방망이치는 가슴위에 그의 커다란 손이 스멀스멀 기어 다니기 시작하는데 그녀는 이미 기다리고 있었던 것. 같이 짜릿한 흥분이 온몸에 전율을 일으킨다.

 부드럽고 조심스럽게 어루만지던 손은 거친 숨소리와 함께 그 누구도 근접하지 않았던 도원의 숲을 헤집고 들어와 탐스럽게 익은 복숭아를 탐닉하더니 거칠게 아래로 하강하여 천년밀림 계곡의 옹달샘에서 갈증으로 목 타는 듯 몸부림친다.

 아~ 그녀는 길게 탄성을 삼키고 경직되려는 몸을 눙치며 공중으로 날려는 마음을 진정해야 된다고 생각했다,

 “사랑해! 너에게 모든 것을 주고 싶었어. 너를 갖고 싶었고 천천히 제발 부드럽게 난폭하니까 무서워 지려해…….”

그녀는 사랑하는 사람의 모든 것을 이미 받을 준비가 되어있었다. 그녀는 신음과 함께 두 팔이 그를 끌어안는다.

 순간 거칠던 그의 행동이 잠깐 멈추는 듯 하더니 목마른 돼지는 깊고 맑은 옹달샘 물로 뛰어 들었다.

 묵직하게 실려 오는 그의 무게에서 오는 미더움! 갈증으로 불타오르는 대지는 폭풍우 일지라도 순종하며 포옹하지 않고는 못 견디게 된 기다던 이 순간 사랑하는 그를 그녀는 더 힘껏 안았다. 아~ 몸을 뚫고 들어오는 그의 남성은 개선장군으로 그녀의 몸을 점령 한다. 짜릿한 통증으로 꿈 많은 처녀의 막을 내리는 순간  그녀는 아름다운 꿈에서 치옥의 현실로 교차된다.

 비몽사몽간에 현석에게 허락한 몸은 우람한 늙은 돼지가 갈기갈기 짓이기고 있는데 자신은 그를 끌어않고 더 깊게 갈구하며 몸부림 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자 어떤 것이 꿈이고 어디까지가 현실인지 분간 없지만 이미 자신을 점령하고 미친 듯이 신음하며 내뿜는 숨소리에 술 썩는 냄새와 함께 그녀의 몸속 깊은 곳에다 정액을 배설하고 있는 짐승 같은 이는 그렇게 사랑하던 현석이 아니라 그녀의 아버지였다.

ꡒ우리 아버지는 의부였어. 내가 네 살 때 아버지는 전쟁에서 전사하시고 어머닌 지금의 아버지께 출가해 가시고 나는 외할머니 그늘에서 자란거야 그러다 외할머니가 5년 전에 돌아가시자 어머니는 나를 이곳으로 오게 한거지 사실은 그곳에 혼자 있었던 것도 한집에 살기 싫었던 이유에서고 그러나 가끔씩 볼일이 있어 내려오는 아버지라 어쩔 수 없었고 그리되리라곤 생각할 수 도 없잖아? 술 취해 들어온 아버진 좁은 방에서 나를 하나의 여자로 착각 하였을 것이고, 나는 꿈속에서 석이로 알고 받아들이고……. 그때 조금이라도 반항 했다면 그렇게 되지는 않았겠지.”

 일이 있고서 나는 어찌해야 되겠어? 의부는 ꡒ정말 내가 미쳤었다ꡓ 는 말을 남기고 그 밤으로 서울로 가버리고 난 계속 울기만 한거야 나중에는 눈물도 안나오고 눈이 아파왔어 그날아침에 석이가 온 거야 대문밖에 서있는 석이를 그냥 돌려보내며 나는 통곡했어. 그 후로도…….

 가슴에 우물을 파는 괴로움의 시간들이 짓궂게 지나가고 교육 중에 써 보낸 석의편지를 여러 번 받았지만 당장이라도 달려가서 매달려 끝없이 울고 싶었어. 한없이 보고 싶었어. 그러나 산산이 조각난 거울의 몸부림에 불과하지 어찌하겠어?

 누구도 모르는 이 기막힌 불륜을 혼자 떠안고 울기만 했는데 엎친데 겹친다고 몸에 이상까지 생기는 거야 죽기도 힘들어 나를 철저하게 타락시키기로 했어 아버지라는 사람보다 어머니를 볼 수 가 없는 거야 그래서 짐을 서울로 보내고 나는 발길 닿는 대로 흘러갔지 세상 참 요지경이더군. 그러나 나를 타락시키려고 작정했지만 그것도 안 되고 다만 얻은 것이 있다면 뱃속의 불륜의 증인을 잃은 것 밖에 자학하면 할수록 점점 나 자신을 내가 들여다보는 아이러니지. 마지막으로 정말 마지막으로 석을 보고 싶었지만 차마 그런 용기가 나지 않았어. 석이 난 이 세상에 있을 수 없는 사람이야 그래서 이일을 택한 거야  사랑했어. 나의 모든 것을 다 바쳐서 사랑이 이런 아픔이라면 사랑을 저주하겠지만 우리의 사랑만은 짧으나마 영원한 것이라고 믿으며 난 행복했었다고 생각해 난 석이만을 사랑하다 사랑 찾는 꿈속의 여인이 되여 영원한 마음으로 석에게 가기로 한거야 석 누구도 원망하지 말아줘 나도 누구하나 저주하지 않아 이 편지를 누구에게 부탁해 부쳐야 하는데 꼭 당신께 전해졌으면 해 그리고 인연이 이어진다면 저세상에서 라도 만났으면…….이제 힘이 없어져요.

당신의 웃음을 간직하고 가는 당신의 희야 가 당신의 행복을 빌면서 안녕히…….ꡓ


 눈이 퀑한 모습으로 현석은 일어났다. 그의 손에는 선희의 편지가 쥐여있다. 부엌으로 나온 그는 편지에 불을 붙인다.

파란 연기를 내면서 손안으로 타들어가도 그는 꼼짝 않는다.

ꡒ희야 왜 나 같은걸 사랑했어. 이렇게 바보 같은 나를 얼마나 원망했어. 바보! 희야 는 나 때문에 널 내가 죽도록 한거야 난 왜 그렇게 바보 같았을까? 순수고 숭고고 지껄이면서 사랑을 회피했는지 희야를 사랑한다면 사랑은 육체도 함께하는 것이란 느낌을 느끼게 해야 했어 희야 난 어쩌란 말이야!ꡓ

유서의 마지막 귀퉁이가 타들어 간다.

멍청히 바라보던 현석은 미친 듯이 불을 끄고 한 조각 을 주워들고 방으로 들어간다.

ꡒ나 때문에 세상을 먼저 떠나며 마지막 모든 것을 전하고 가는 그 사연마저 없어졌다. 내 마음속에서 감당 못할 너의 이야기들이 새겨져 있을 뿐이다. 난 너를 위해 무언가 라도 해야 한다.ꡓ

현석의 만년필이 원고지 위를 달리고 있다.

 나를 사랑하다 간 너에게 이 글을 쓰는 것으로 조금이나마 서러운 넋이 위로가 되었으면 하는 간절한 바람이며 이 글속에서도 우리는 사랑한다 말하고, 다시는 이 세상에서 이런 일이 소설 속에서라도 없길 바라는 마음으로 시작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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