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집(단편)

목탁 소리

돌 박사 2007. 7. 28. 23:37

 < 단편 소설 >                                       

                                목 탁  소 리                                                     

                                                                                              석 도 익 

 울창한 잡목 사이를 헤치고 올라오느라 나뭇가지에 갈 갈가리 찢겨진 바람은 힘겨워 지쳤는지 저마다 흩어져서 할 일없이 장난질을 친다.

 바위틈에 틀어박힌 암자 구석을 휘돌아 어슬렁거리며 볼품없는 토방의 문풍지도 잡아당겨 보고 법당 처마 밑 에 대롱대롱 매달린 풍경도 건드리는가 하면 쓸데없이 낙엽을 굴려다 댓돌 밑에 쌓아 놓기도 한다.

 초겨울의 엷은 햇빛이 세월에 절어 누렇게 찌든 창호지의 창문에서 잠시 서성이는가 싶었는데 곧 이어 거미줄이 설렁설렁 쳐진 천장에서 부 터 어둠이 서서히 기어 내려오고 있었다.

 메주가 서너 개 주렁주렁 매달린 그 아래에서 현민은 구겨진 화장지 처 럼 누워 있었다. 서걱 서걱 겨울이 오는 소리는 현민의 몽롱한 의식 속에 찰싹 붙어서 환청으로 들린다 싶더니 이제는 지난 일들 까지 바퀴벌레 처 럼 기어오고 있었다.

 "아휴!. 쪄요 쪄!.󰡓���

 1 교시를 마치고 들어오는 이정숙 선생이 한 손으로는 땀을 닦아내고 다른 한 손으로는 손바람까지 일으키며 잘 익은 국광 같은 얼굴로 호들갑을 떠는 바람에 모두 와르르 웃었다.

󰡒���전 한 시간동안 크렘린 궁 에서 피서를 했는데 어떡하죠. 이 선생님! 나는 추워서 벌벌 떨었는데 땀에 흠뻑 젖은 이 선생님을 보니 왠지 이 제사 제 가슴도 뜨거워지는군요. 하 하하. 아이고, 뜨거워󰡓���

 언제나 유들유들 부들부들 하다 해서 총각인데도 유부 남 칭호를 받고 있는 노총각 김 선생의 익살에 또다시 웃음이 합창한다. 크렘린이란, 읍사무소 양수기 창고 한 쪽을 비우고 칸을 막은 천장이 높고 음침한 2학년 교실이다.

 이 선생이 방금 수업을 끝낸 1학년 교실은 소위 제 1내무반이라고 부르는 군용천막이다. 천막 특유의 석유냄새와 60여명의 학생들이 내뿜는 축축한 열기로 해서 남선생들도 수업을 하노라면 스물 스물 온몸에 땀이 기어 다니는 것 같은데 아직 솜털이 뽀송뽀송한 이선생 얼굴이 빨갛게 익어 버리는 것은 당연하였다. 더구나 조국근대화를 부르짖던 60년대의 여름은 무척이나 더웠다. 해가 지고 어스름할 때라곤 하지만 한낮의 더운 열기는 쉽사리 식으려 들지 않아서 꼭 유전지역의 사막 같았다. 그래 서인가 아이들도 쉬는 시간이 되기가 무섭게 뛰쳐나왔다.

 땅 꼬마 같은 아이부터 부황기가 역력한 얼굴의 아이들 속에는 나이로 따져도 선생님과 친구가 될 만한 청년들도 더러 있었다. 손바닥만한 읍사무소 뒷마당에서 제각기 뭉쳐 웅성대는 것이 꼭 시골 장터같이 활기차 있어서 팔을 걷어 부친 젊은 선생들에겐 더없이 흐뭇하고 뿌듯한 광경이었다. 장작불을 때서 점심밥 짓는 열기같이 후덥지근한 어둠마저 얼마나 기껍고 살가웠던가.

󰡐���탁 탁탁 타다 닥󰡑���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법당 쪽에서 목탁소리가 들렸다. 마지막 예불이 시작된 모양이다. 이 절에는 스님이 없다. 보살님이라고 불리 우는 개기름이 퉁퉁한 얼굴에 번지는 저 염불하고 있는 여인 과 얼굴이 말상이고 허리가 불쌍하도록 ㄱ자로 휘어진 공양주 보살이 있을 뿐이다.

 현민이 거처하는 별채에는 공부 한다는 학생들이 서너 명 있는 아주 작은 암자 같은 절이다. 고작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로 일관하는 염불도 잠시 뿐 목탁소리만 조금 더 들리다가 그나마 법당 불이 꺼지면 적막한 산사에는 다시금 바람소리, 풍경소리, 계곡에 흐르는 물소리만이 깊은 밤으로 빠져 드는데 가까운 곳에서 부엉이의 울음소리가 한 움큼씩 어둠을 잡아 뽑고 있는 듯 하다.

 현민이 처음 그 곳에 갔을 때는 대학 4학년 여름이었다.

하계봉사활동이 끝 나갈 즈음엔 장차 자기가 무엇을 해야 될 것인지 깨닫게 되었다. 그래서 대학을 졸업하는 즉시 가방 하나 달랑 메고 이 곳 지촌을 다시 찾아왔다. 서울에서 내로라하는 점포를 소유하고 계시는 어머니에게는 󰡒���시골 공기 좋은 곳에 가서 공부를 계속해야 하겠다.󰡓���고 두둑 히 타낸 용돈으로 농촌운동의 첫발을 디딘 것이다.   

 처음에는 시골사람 특유의 도회지 사람을 경계하는 마음들이 있어서 가까이 하려고 하지 않아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는 이미 각오가 되어 있음으로 이에 개의치 않고 우선 많은 청소년들이 중학교에 진학치 못한 어려운 실정을 감안하여 마을 회관에 재건학교를 개설하고 직업 청소년과 농촌 청소년을 대상으로 중학과정 야간학교를 시작했다. 학생들이 모이고 수업을 하기 시작하고 부 터는 마을 젊은이들 중 면사무소에 다니는 공무원, 대학에 다니는 여학생 등 서너 명이 수업을 맡아 같이 일하겠다고 자원해 오는 고마운 분들이 있고 배움에 굶주렸던 청소년들이 모여 들었다. 가난과 굶주림으로 마음마저 메마르고 얼어있던 이 곳에도 봄기운이 비치듯 생동감이 일고 있었다.

 그러나 막상 일을 벌이고 보니 무엇보다도 돈이 문제였다. 하는 수 없이 주말이면 서울에 가서 손을 벌렸다. 처음에는 선선히 도와주시던 어머니, 형님들도 횟수가 잦아짐에 따라 걱정과 꾸지람으로 변했지만 달리 어쩔 도리가 없었다.

 이즈음 군사 혁명정부가 민정으로 탄생되면서 재건국민운동은 민간기구로 전환되었다. 그러나 국가재건을 위해서는 무엇보다 농촌계몽이 중요하므로 행정기관에서는 봉사와 희생만이 최대의 미덕인 양 온갖 사회적 선전 선동을 아끼지 않았다. 그 덕분인가 지방 언론에서도 조금씩 현민에게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거기다 현민이 정부 요직에 있는 아무개의 동생이라는 것을 알고 부 터는 앞을 다투어 도와주겠다고 나섰다.

󰡒���군수 아무개 입니다. 정말 훌륭하고 어려운 일을 해 주십니다. 뭐 어려운 일이 있으시면 말씀해 주십시오. 최대한도와 드리겠습니다.󰡓���

󰡒���나는 OO입니다.󰡓���

 “힘드신 일 이 있으면 연락 주시요.“

 모두들 입에 발린 칭찬을 앞세우며 학용품 따위를 보내왔고, 학교 장소를 제공해주는 고마움이 있는가 하면 정치에 꿈을 두고 있는 이는 금일봉을 놓고 가기도 한다. 언론도 앞 다투어 그럴듯하게 미화시켜 앞 다투어 띄워주니 감사장 표창장이 줄을 이었다. 처음에는 거부반응마저 있었으나 그것도 자주 있으니  쑥스러웠고 면역이 되니 조금씩 당연해져 갔다. 나중에는 조금 우쭐한 마음마저 생기게 되었다.

 우여곡절과 시련 속에서 삼 년이 지났다.

 이제는 150여명의 학생들의 교장선생이며 재건국민운동 군 사무국장으로 농촌 청년지도자로서 부각되었다. 각 면 단위까지 조직된 재건국민운동 청년회원들은 모두 그를 존경했고, 장래를 지켜줄 희망적인 인물이라고 추켜세웠다..                                                                                               󰡐���제 4회 상록수상 수상󰡑��� 문화공보부에서 농촌운동에 공헌한 사람에게 주어지는 최고의 영예인 심훈의 상록수상이  그에게 수여되었다.

 바야흐로 현민의 꿈이 파란 하늘에 끝없이 펼쳐지는 듯싶었다.

 그러나 한편으론 홍살문을 제수 받은 이팔 청상과부 같이 이제는 어쩔 수 없이 짊어지게 된 멍에 일 수 도 있었다.

 식구가 많아질수록 지출은 많아진다. 150여명의 학생들을 가르치기 위한 사무용품과 아무리 무보수로 나와 주는 선생님들 이라고 해도 그냥 있을 수 없고…….  여기저기서 도와준다고 해도 매월 지출되는 경비는 상당한 것 이여서 막내인 그의 앞으로 되어 있는 재산을 처분한 것도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매번 손 벌릴 때마다 미우나 고우나 막내가 하는 일이라 󰡐���이번이 마지막이다󰡑���라는 말씀을 몇 번씩이나 얹어서 융통해 주시던 어머니도 지치신지 오래다.

 그러나 언제까지 이런 식으로 끌고 갈 수 있을지, 모래밭에 물 붓 기임을 현민 자신이 더 잘 알고 있었다.

 무슨 뚜렷한 대책이 있어야 했다. 그러나 가난 때문에 찾아 든 학생들이다. 그들에게 수업료를 받을 수 도 없었다. 그렇다고 이런 식으로 언제까지 계속할 수 도 없었다.

 하지만 자기만을 바라보고 있는 배움에 굶주린 눈동자들을 어떻게 저버릴 것인가?. 현민으로 하여금 더 많은 희생과 봉사를 요구해 오는 현실이 도저히 혼자 내려올 수 없는 높은 곳에 올라가서 애태우는 사람처럼 안타깝기도 하고 두렵기도 해서 남 몰래 한 숨쉴 때가 많아 졌다.

 풍경 소리도 멎고 낙엽도 잠들어 사위가 조용한 가운데 창백한 조각달만 밤 속으로 깊어만 가는 밤하늘을 흘러가고 있다.

󰡒���선상님 저녁은 왜 또 안 드셨어 유? 더 아프세유?󰡓���

 이제야 일을 마쳤는지 공양주 보살이 토방 문밖에서 가래가 뒤엉켜 끓는 잔기침을 몇 번하더니 주춤주춤 들어와서는 불쌍하도록 굽은 허리를 뒤로 젖히며 -아마도 오늘 하루 중 처음으로 펴는 허리일 게다.― 두 손을 허우적거려 천장에 매달린 백열등을 켜면서 흐릿한 눈빛으로 걱정스레 하는 말이었다.

󰡒���예, 생각이 별로 없어 서요.󰡓���

현민은 눈이 부셔서 잔뜩 찡그리며 중 얼 꺼렸으나 혓바늘이 잔뜩 돋아 바짝 탄 입 속에서는 말이 제대로 되어 나오지 않았다.

󰡒���쯧쯧……. 곡기가 사람 생명인데 이렇게 아무 것도 안 드시고 서야 어디……. 이렇게 살아 있다는 것이 이상 허네. 유.󰡓���

󰡒���......󰡓���

 무슨 말인지 몇 마디 더 중얼거리면서 공양주 보살이 밥상을 들고 나가 버리자 현민은 또 다시 얼음위에 버러진 팽이처럼 나동그라져 있었다.

 아직 흔들리고 있는 30촉 전구만이 파리들이 덕지덕지 배설한 무수한 검 은점들이 응고된 속에서 힘겨운 빛이 주검의 꽃같이 비치고 있었다.

 󰡐���좀 벌레가 갉아 먹어가고 있는 내 육체다.󰡑��� 금방이라도 통증이 시작될 것 같아 현민은 이를 악물었다. 허기진 배에서 부 터 쓰디 쓴 냄새가 올라왔다. 문득 자장면 생각이 났다. 지난날 동료들과 어느 날은 요기로 어느 날은 안주 삼아 얼마나 지겹게 먹던 자장면인가?  음식 생각을 하자 또 속이 울렁거리고 곧 이어 죽음 같은 고통이 시작되었다. 지금은 아무 생각도 필요 없었다. 오로지 고통 그 하나만 존재할 뿐, 얼마나 지났을까. 하염없이 건너갔다가 되돌아오는 의식 속에서 함부로 뽑아내는 책처럼 여러 가지가 묻어왔다.

 흥청대고 술렁이던 국회의원 선거유세, 펄럭이던 현수막, 빛나는 금 배지, 수갑이 채워진 자신의 팔목, 제자들 속에서 뒤엉켜 즐거웠던 한때. 보기 흉한 과거와 나둥그러진 현재와 이미 체념한 미래가 춤추며 다가서다가는 물러서고 또 다가 왔다가는 귀신처럼 소리도 없이 사라졌다.  

 다시 희망 없는 아침이 왔음을 무질서하게 두들기는 목탁소리를 듣고 알고 있을 뿐이다.


 현민의 부친은 젊어서 타계 하셨지만 중앙 정부의 요직에 계셨었고, 지금 둘째 형님은 재무부 차관으로 있으며 큰형님은 자그마한 무역회사를 경영하고 있었다. 소위 말하는 문벌 재력이 있는 집안이었다. 집안 쪽으로나 그가 하고 있는 사회사업 쪽으로 많은 사람들이 그의 주위에 모였다. 그중 특히 그의 이런 점을 잘 알고 있는 사람 몇 명이 그를 부추기기 시작했다.

 󰡒���김 선생이야말로 이 지역을 대표해야 할 국회의원에 나가야 합니다. 입후보만 한다면 수많은 청년동지들이 내 일처럼 밀것이며 틀림없이 당선될 것입니다.󰡓���라고…….

 처음에는 농담처럼 여겨 웃고 말았으나 이 사람 저 사람에게서 비슷한 얘기를 몇 번 듣는 동안에 현민의 생각도 조금씩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렇잖아도 정치세력 없이는 무슨 일이든 해내기 힘든 세상이었다. 더군다나 학교운영 비 때문에 어려움이 많은 그로서는 권력이나 금력 그 자체보다는 그가 하고 싶은 일을 맘껏 펼칠 수 있다는 가능성이 마음을 설레게 했다. 최소한 현민 자신은 그렇다고 믿었다. 더군다나 그 무렵 여당의 모 국회의원의 딸인 미숙이와 교재 중에 있었던 것도 이유야 어쨌든 정치 지망의 꿈은 자꾸 부풀었고, 차차 둥둥 뜨게 되었다.

 그러나 미숙은 현민이 하고 있는 농촌운동을 젊은 날의 보람과 낭만정도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녀는 자라온 환경에 걸맞게 화려하고 도회지적인 미숙이 조금은 못마땅해 했으나 차차 설득할 수 있으리라 생각되었고 무엇보다 그녀의 배경이 현민에게 도움이 되리라 여겨졌다.

󰡐���나는 내가 바라는 이상형 농촌을 이룩하고 조국 근대화에 이바지하기 위하여 권력이 필요하다󰡑��� 이런 애국자적인 생각과 함께 젊은 기백이 용솟음쳤고 곧 이어 겁 없는 악동이 장마 진 냇물에 뛰어들 듯이 도전을 단행했다.

 우선 현민의 터전인 야간학교를 확충 교사를 신축하고 많은 청년동지들을 규합 단계적 조직육성에 들어갔다. 이 모든 것이 겉으로는 농촌운동의 일환이었으나 실은 장차를 위해 겉으로 돌출되지 않는 선거운동의 포석이기도 했으므로 많은 자금이 요구되었다.   

 과감히 돈이 될 수 있는 것은 일찌감치 처분하고 또 얻어낼   수 있는 데서는 염치 불구하고 얻어냈다.

 그러다 보니 나중에 남는 것이라고는 회갑을 넘긴 노모가 갖고 있는 것으로 그나마 이미 은행에 저당하고 다 빼내 쓴 껍데기에 불과한 호텔 하나가 달랑 남았다.

󰡒���이제 그만큼 했으면 됐다. 모든 것을 정리하고 올라오너라. 마땅한 곳에 취직이나 시켜줄 테니󰡓���

형들도 드디어 강경하게 현민을 회유하기에 나섰다.

󰡒���현민아, 제발 빌자. 시골서 그 고생하지 말고 에미와 같이 가게나 꾸려 나가든지 유학이나 다녀오렴.󰡓���

 어머니가 울면서 말렸다. 그러나 현민은 깊은 꿈에서 깨어날 수 없었다. 이왕 여기까지 온 것. 오직 금배지 그 것만이 길이었고 힘이었다. 무엇보다 열화와 같은 주위의 소망을 저버릴 수 는 없었다.

 오히려 현민은 동지들 활동용으로 두메 골짜기까지 다닐 수 있는 짚 차를 구입했고, 자신은 흰 색 세단을 무리하게 구입해서 재건의 깃발을 펄럭이며 농촌 구석구석 누비고 다녔다. 농촌계몽운동은 물론 당시 정책계몽까지 함으로써 관의 지지와 호위까지 받으며 그의 이름은 더 멀리 퍼져갔다.

 그러나 하루아침에 도로 아미타불이 될 줄이야, 여당 국회의원 공천에서 동민은 탈락하고 말았다. 각 정보기관과 정치요로에선 분명 자신을 장담했었다. 그들 중에 더러는 힘써 준다고 갖은 명분으로 요령 있게 자금을 뜯어가기도 했던 것이다. 또한 자기를 후원하는 많은 동지들이 있었기에 그는 자신이 공천에서 탈락 하리라곤 꿈에도 예상치 못했다. 그 사실을 전해 듣는 순간 갑자기 멍해졌다. 잠시 얼떨떨해 있다가 조금씩 의식이 돌아오면서 부들부들 사지가 떨려 왔다. 땅이 꺼진 다는 느낌이 이런 것일까?

󰡒���역시 나이어린 젊은 정치인을 배타하는 정치관습 때문인 것 같다.󰡓���고 장인어른은 애써 변명을 했다. 그가 충격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두문불출하는 동안 그를 따르던 많은 사람들 중 특히 여러 번 선거운동을 했던 프로선수들이 재빠르게 하나 둘 공천 받은 후보에게로 옮겨 갔다. 그러나 정치를 모르는 순수한 농촌 청년들은 이 와중을 계기로 더욱 더 결속되었다.

󰡒���선생님, 꼭 여당 공천을 받아야 됩니까?󰡓���

󰡒���그래요, 차라리 이 기회에 할말 다하는 야당으로 뛰는 게 어때요?󰡓���

󰡒���우리 동지들이 청치 정당으로 뭉친 것이 아닌 바엔 여당 야당이 무슨 필요 있겠습니까?󰡓���

󰡒���야당이 오히려 우리에겐 유리합니다. 모두 우리 편입니다. 자신 있지 않습니까?󰡓���

 동지들이 오히려 강경하게 분노를 터뜨렸으며 확신했다. 현민은 다시 생각했다. 가는 곳마다 심어 놓은 많은 사람들. 그가 가르친 많은 제자들. 그들은 그를 지지할 것이다.

󰡒���그래, 해 보는 거다. 차라리 이런 정치마당에서는 야당으로 뛰는 것이 훨씬 나을는지 모른다.󰡓���

 현민은 야당입당을 선언하고 지역 국회의원후보로 출마의사를 밝혔다. 조그만 군내가 일시에 술렁였고 곧 파문은 중앙으로 번졌다. 갑자기 기관장들의 태도가 바뀌었음은 물론 며칠 뒤엔 어머니가 처음으로 만삭인 아내를 앞세우고 둘째 형님과 같이 내려 오셨다.

󰡒���현민아, 너 집안 망하는 꼴 기어이 보고 싶어서 이러니?󰡓���

  카랑카랑 하시던 어머니의 목소리가 오늘은 젖어있다.

󰡒���어머니, 괜찮을 거예요. 제가 뭐 큰 잘못이라도 저지르고 있나요?󰡓���

 현민은 말끝을 흐리며 아내 보기가 민망해서 고개를 떨어뜨렸다.

󰡒���네가 정말 몰라서 하는 소리냐?󰡓���

 어머니는 기가 막힌다는 듯 현민을 한참 바라보다가 한숨을 길게 내쉬며 말을 이었다.

󰡒���너의 형이 누구냐, 형을 생각 한다면 네가 이럴 수 는 없다. 또 너의 처가를 생각 하더라도 이럴 수 는 없는 게야, 네가 우리 집안 망치고 너의 처가 망치려고 아주 작정했느냐? 그만큼 했으면 됐지 더 이상 어쩌려고.......󰡓���

 목이 메어서 어머니는 더 이상 말씀을 못 하셨다. 젊어서 혼자되신 어머니다. 막연한 서러움까지 보태져서 어머니의 눈물은 봇물처럼 흘러 내렸다. 연세에 비해 깨끗하신 모습이 오늘따라 훨씬 늙어 보여 현민은 얼른 고개를 돌렸다.

󰡒���현민아. 너의 뜻은 이 형도 잘 안다. 너도 잘 되어야 하겠지만 꼭 이렇게 해야만 잘 될 수 있는 것은 아니지 않느냐? 내가 공직에서 물러나거든 그 때도 늦지 않다고 생각된다. 이런 얘긴 하지 않으려고 했다만 아마 난 며칠 내로 외국으로 나가게 될 것 같다. 허나 너를 탓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네가 조금 더 신중하게 처신해 주길 바랄 뿐이야.󰡓���

󰡒���형님의 말씀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압니다. 그러나 그럴 수 록 제 마음은 더욱 바꿀 수 없습니다.󰡓���

 가슴에서 부 터 끓어오르는 분노를 느끼며 형님에 게라도 한 마디 하지 않고는 견딜 수없어서 그만 언성을 높이고 말았다.                              

󰡒���현민아. 젊은 혈기는 자칫 일을 그르칠 수 가 있단다. 우리는 그렇다 치고 너의 처갓집도 생각해야지, 사돈 의원님이 말이 아니지 않느냐?󰡓��� 󰡒���자살 행위나 마찬가지다. 네가 마음만 바꾼다면 거듭 말하지만 정부 요직에서 일할 수 있도록 내가 주선해 주마󰡓���

 침울한 눈빛으로 가끔 현민을 바라보는 미숙도 초췌하게 보였다. 얼마나 화사하고 명랑한 아내였던가. 끝내 아무 말도 않고 잘 참아 주고 있는 아내에게서 현민은 보다 깊은 연민을 느꼈다.

 어머니의 눈물어린 회유와 형님의 끈덕진 설득은 계속됐고 시간이 흐름에 따라 현민은 가슴 밑바닥에서 부 터 무언가 조금씩 허물어지는 것을 느꼈다. 마치 설렘처럼 속이 울렁거렸다. 정말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기도 했다. 가까운 몇몇 동지들을 불렀다. 소주 한 잔씩을 나누면서 서두를 꺼냈을 때,

󰡒���김선상님, 차라리 잘 되었습니다.󰡓���

󰡒���가정을 떠나서 사회와 국가를 생각하십시오.󰡓���

󰡒���우리는 의로운 일을 함께 하고자 뭉쳤습니다. 이제 와서 포기한다는 것은 말도 안 됩니다.󰡓���

 할 말이 없었다. 이 곳에 홀홀 단신으로 찾아 왔을 때 부터 많은 도움과 힘이 되어 주었던 김동지, 이동지, 박동지, 정선생, 최선생 모두 형제 같은 사람들이었다. 어찌해야 하나? 차에 오르시면 서도 몇 번씩이나 당부하던 어머니, 형님과 또 그들의 그늘에 가려 제대로 말도 나누지 못한, 힘들어 보이는 아내의 얼굴도 어른거렸다. 여태껏 모두들 무던히도 도와주었다. 그러나 역시 여기서 중단한다는 것은 너무 이기적이라는 생각마저 들었던 것이다. 용기가 없어 서라 기 보다는 이미 자신은 자기만의 󰡐���김현민󰡑���이 아니었다. 이제는 그들의 의사가 현민의 생각보다 더 중요했다.

 현민의 처지를 십분 이해하는 동지들은 더욱 신들린 사람처럼 뛰었다.

 정의의 실현이 오직 이 길 뿐이라는 듯 자기 일이라 해도 그렇게 열성 일 수 없었다. 자금이 궁해지자 가장 가까운 동지들이 소를 팔아 오고 전답을 잡히고 돈을 모아 오기 시작했다. 그들이 현민은 눈물나도록 고마웠고 현민으로 하여금 금배지의 필요성을 더욱 더 절감케 했으며 그들 역시 얼마 안 있으면 몇 배의 보답으로 되돌아 올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았기 때문에 이젠 돈을 빌리고 돈을 갚고 하는 데도 모든 동지들이 동원되었다. 두드리면 열린다던가. 대세가 현민 쪽으로 확실히 기우는 것 같았다. 농촌운동의 선구자, 상록수 수상자가 여당이 아닌 야당으로 나섰다는 게 뜻있는, 특히 젊은 층을 중심으로 더욱 적극적인 호응을 불러 일으켰다. 현민 역시 중도에서 포기하지 않기를 잘했다고 생각할 즈음이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그물이 서서히 조여 들어서 불법집회로 현민의 오른팔 역할을 하던 김민석이 구속되고, 유언비어를 유포했다고 박진오 이정길 동지가 아무도 모르게 불려가서 혼이 났고, 학교에도 이런저런 행정처분이 통고되는가 하면 평소 가깝게 지내던 형사들도 가까이 하려하지 않고 주위를 맴돌고 있어 분위기가 점점 심각해져 갔다.

 그럴 수 록 동지들은 더욱 결속되었으나 또한 의분을 참지 못해서 일을 더욱 그르치는 일도 왕왕 있었다. 점점 분위기가 험악해지면서 순진한 농민들은 조금씩 거리를 두기 시작했다. 가까이 하려 들지 않더니 조금씩 멀어지는 느낌이었다.

 그 날도 가장 혈기가 왕성한 박동지와 상대 쪽 운동원들과 말썽도 있었다.  밤늦게 서울에서 민 기사가 내려 왔다.

󰡒���서울집과 가게는 대출금 연체로 경매에 붙여졌대 유, 그리고 세검정 큰댁 형님도 은행부채 상환명령에다가 어음도 부도가 나서 공장과 집이 압류되었구먼요. 참!, 중앙청 작은댁 형님네는 관련도 되지 않은 사건에 기소되어서 면직될 거라고 하던데 아직 확실한 것은 잘 모르겠고 국회의원 영감님은 이번 공천이 취소 됐대요. 모두 선생님 때문이라고 울고불고 난리들입디다.󰡓���

 민 기사가 단숨에 전하는 이 모든 것들이 사실이 아니기를, 어머니와 형님이 자신을 저지하기 위해 일부러 꾸민 일이기를 빌었다. 아니 그렇게 믿고 싶었다. 그러나 이렇게 거짓말을 진실처럼 전할 수 있는 민 기사가 아니었다. 󰡐��� 아아! 내가 바로 죄인이로구나.󰡑��� 맥이 탁 풀렸다.   지난번에 둘째 형님에게 들은 얘기도 있고 해서 내심 불안하기도 했지만 이렇게까지 온 집안을 풍비박산 내리라곤 감히 상상도 하지 못했다. 이 곳 자기 주변에서 부딪치는 일만도 벅차서, 서울 집안일은 별로 마음을 쓰지 못했다. 마음을 썼더라도 자신이 그만 두지 않는 한 달라질 것은 아무 것도 없었지만 이 모든 것이 자기에서 비롯됐다는 것이 무섭기도 했고 이런 식으로 압력을 가하는 현 정권에 대한 적개심으로 불타오르기도 했으나, 당장 서울로 올라갈 수 도 없었다. 그렇다고 이제 와서 되돌아 갈 수 도 없는 일. 정말 이제는 아무 결정권도 없는, 날아가고 있는 화살일 뿐이었다. 그러나 정작 큰일은 현민에게 있었다.   동지들이 이 곳 저 곳에서 끌어들인 사채는 갚을 길이 막연해 갔고 이 집에서 급전을 빌어 저 집에 이자주는 식의 릴레이가 계속되면서 그 액수는 눈 덩이처럼 불어난 것이다. 심적으로나 자금문제로나 현민은 더 이상 지탱할 수 없는 절망감에 나날이 초조해 갔다. 더군다나 언론마저 그에게 등을 돌린 지 오래고 심지어는 중상모략까지 일삼았다. 그러자 돈을 빌려준 채권자들이 몰려와 난리를 치기 시작했다. 드디어 끝이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공중회전에 영웅도 지치면 아득한 저 아래가 맨땅일지라도 그만 손을 놔버리고 싶었다.

󰡒���선생님, 도저히 더 이상 지탱할 수 없습니다. 내일까지 보류시킨 당좌와 어음이 열 세장에 삼천 육백만원입니다󰡓���

 그의 곁에서 오년을 하루같이 일해 왔던 김군의 말이었다.  워낙 모든 일에 차분한 성격이라 언제나 어려운 일을 잘 꾸려 나왔던 김군의 심중을 헤아리면서 현민은 코끝이 찡하도록 가슴이 아팠다. 현민 자신이 언뜻 줄잡아 보아도 총 부채가 팔천 만원에 육박하였다.

󰡒���김군, 우리 동지들이 어떻게 안 되겠나? 형우가 서울로 갔는데 은행대출이 될 것도 같다던 데…….󰡓���

󰡒���김 동지에게서 아침에 전화가 왔는데 선을 대 봤지만 안 될 것 같다고 믿지 말라고 했습니다.󰡓���

󰡒���무슨 방법이 없을까? 서울 친구들에게도 부탁은 해 놨지만 돈에 대해선 워낙 인색한 친구들이라……. 큰일이군.

󰡒���내일이면 부도 처리될 것이고 내일은 변통해서 막는다고 해도 다음 대책이 없고 보면 결국 언젠가는 터지고 맙니다. 차라리 부도를 내고 후일에 갚는 것이 나을 것 같은 데요.󰡓���

김 군은 이미 작심한 것 같았다. 어쩌면 현민의 최종 결단만을 바라고 있는 눈치였다.

󰡒���어음은 그렇다 치고, 당좌는 당장 구속될 터인데 몇 장이나 나가 있나?󰡓���

󰡒���모두 세 장입니다.󰡓���

비로소 현민은 김 군의 말을 전부 이해할 수 있었다. 그리고 또한 김 군이 바라는 최종 결단을 내릴 때가 바로 오늘뿐이라는 것도 알 수 있었다. 몇몇 동지들을 불렀다. 그들은 가족과 같은 사람들이라서 돌아가는 사정을 잘 알고 있는 터라 심상치 않은 얼굴로 모였다.

 현민은 그 동안의 노고를 우선 치하하고 나서 문제의 심각성에 대해서 얘기하고 마지막으로는 자신이 모든 책임을 지겠노라고 했다. 그러자 동지들은 자신들에게 학교와 또 돈에 대한 뒷일을 맡기고 우선 당분간만 피하라고 했다. 당분간 피한다고 해결될 일이 절대 아님을 현민 자신이 더 잘 알고 있었지만 어찌는 수 가 없었다. 언젠가는 꼭 자신이 무슨 짓을 해서라도 여러분의 은혜를 갚겠노라고 약속할 때는 염치없는 눈물이 앞을 가리고 목이 메었다.

 그 날 저녁 현민은 지난날 그가 처음 이 곳에 왔을 때처럼 가방 하나 달랑 들고 길을 나섰다. 어쩌면 이룰 수 도 있었을 꿈도, 눈물겨운 동지들의 사랑도, 또 그의 젊음도, 도저히 다 갚을 수 없는 그의 빚까지 놓고 떠났다. 이 곳에 올 때에는 당당한 걸음마다 부풀었던 농촌 건설의 꿈이 있었다. 그러나 되돌아가는 그는 이미 농촌운동의 선구자, 상록수 수상자, 로 가는 곳마다 환호를 받던 김현민이 이미 아니었다. 남의 눈에 띌세라 황망히 도피하고 있는 자신이 한없이 추하고 죄스러운 마음뿐이었다.

 늦은 저녁 차창 밖의 코스모스는 왜 그리 환하게 피어 있어 애처로워 보였던지…….

 󰡐���까 악 까 악 깍깍󰡑��� 상수리나무 윗가지에서 까치가 요란하게 울었다. 엎드린 채 배를 밀고 나아가 방문을 열었다. 싸~아 하고 상큼한 찬 아침공기가 확 달려들어 잠시 어지러웠다. 가까스로 문가에 기대고 앉아 거의 잎사귀를 떨어뜨린 상수리나무와 늘 새 빛 새 세상에 앉아있는 듯한 까치를 바라보았다. 까치의 까맣고 하얀색의 분명함은 누구의 흑백논리인가? 뚝뚝 떨어지는 이슬방울에 생명력이 맑디맑은 영혼처럼 빛났다. 󰡐���상수리나무야, 너도 살기위하여 떨쳐낼 줄 아는 지혜를 지녔구나, 떨쳐내야지. 겨울이 깊기 전에, 더욱 빈곤해지기전 한 잎도 남기지 말고 떨쳐버리렴…….󰡑���자신의 기억을 생각만으로 떨치려고 할뿐 공연히 눈은 산 아래로 갔다. 현민을 찾아올 사람은 없었다. 그를 찾아오는 사람이라야 일주일에 한 번 정도 비밀리에 다녀가는 아내  뿐이다. 삼 일전 아내는 밑반찬과 약을 가지고 와서는 세파에 시달린 고름을 짜듯이 눈물을 흘렸다.

 그사이 아내도 많이 변했다. 결코 그럴 나이가 아님에도 눈가엔 벌써 어쩔 수 없는 잔주름에 수심이 잔잔히 흐르고 허름한 차림에도 마음 아팠지만 이젠 그 누구도 위로할 수 도 위로 받을 수 도 없다는 걸 서로 잘 알고 있는 터였다. 아내가 눈이 퉁퉁 부어서 돌아갔다. 곁에서 보살피게 해 달라는 것을 현민은 이번에도 냉정하게 쫓아내듯이 보내고 돌아누웠었다. 그런데도 현민은 오늘따라 자꾸만 누구인가 올 것 같아 마음이 설레었다.

 아침에 공양주 보살이 작은 소반에 미음을 쑤어 가지고 왔었다. 몇 모금 잘 마셨으나  모두 토해 버렸고 곧 이어 뒤틀리는 고통으로 이미 탈진된 상태였다. 며칠 전부터 부쩍 음식이 받지를 않았다. 이미 틀렸다는 생각을 새삼 하고 있는 요즘이었다. 언젠가는 누구나 다 굴복해야 하는 죽음. 만인에게 평등한 것이 죽음이라 하던가?. 허나 죽음 그 자체가 두려운 것이 아니었다. 하루에도 몇 번씩 검은 자락을 펄럭이며 달려드는 고통이 더욱 견디기 힘들었다. 차라리 죽는 게 나을 것 같다. 그것도 가급적 빨리. 진통이 시작될 때마다 이것이 마지막 고통이기를 빌었다.

 현민이 몸에 이상을 느끼게 된 것은 먼 친척 아저씨 집에 피신해 있을 때였다. 며칠에 한 번 정도 미미하게 고통을 느꼈으나 상황이 상황인지라 대수롭지 않게 생각해 버렸다.  몸도 마음도 편치 않은 데서 오는 몸살이려니 여기다가 뒤늦게 심상치 않은 걸 느낀 아내가 끌고 가다시피 해서 종합병원에 가게 되었다. 의사가 처음 간 환자에게 그것도 가명의 환자에게 한 말은 아주 간단했다.

 󰡒���별 거 아닙니다.󰡓���

 마치 󰡐���이것은 사과입니다.󰡑���하고 설명하는 것 같았다.

 󰡒���어디 조용한 곳에 가셔서 맘 편히 지내시면 괜찮아 질것입니다.󰡓���

 현민에게는 그렇게 말하고 아내와 이야기 하는 것 같았다. 잠시 후에 나온 아내는 곧바로 화장실로 가더니 오래 있다 나오는 것을 보니 눈물을 흘린 것 같았다. 현민은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내겐 가장 적합한 처방일 거라는. 어차피 피신해 있는 몸이었다. 그래서 찾아 든 곳이 이 암자였다.

 산 아래 시야가 닿는 곳은 길 양쪽으로 포플러가 길게 늘어져있는 마을 어귀였다. 문득 낯선 것이 하얗게 펄럭였다. 현수막이었다. 바람에 잔뜩 부풀은 커다란 백 광목 자락이 배를 불룩 히 내밀고 이쪽을 향하고 있었다. 양쪽 가로수 사이에 매달린 것을 보자 순간 가슴이 뜨끔했다. 결코 낯선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저놈의 현수막이 또 어느 인생을 망치려는가. 너무 멀어서 어떤 구호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바람을 막고 서서 바르르 용을 쓰고 있는 모습이 선연했다.

 가슴이 답답해 올라와 눈을 감았다. 할 수 만 있다면 저놈의 현수막에 구멍을 뻥뻥 사정없이 뚫어서 바람이 휭휭 빠져 나가도록 하고 싶었다. 아니 할 수 만 있다면 사정없이 지지 밟아 버리고 싶었다. 아니 찢어져 깃발처럼 나 붓기든 배배 꼬여서 짜고 있는 빨래 감 같이 흔들리든 나하고는 이미 아무 상관도 없는 물건이었다.

󰡒���얘, 군인 아저씨가 올라온다. 얘.󰡓���

대학시험 재수 한다는 옆방 여학생 둘이서 은행나무 잎을 줍고 있다가 소리쳤다. 그들도 막연한 기대감으로 오솔길을 바라보고 있었던지 길 아래쪽에서 올라오는 사람을 발견하고는 호들갑을 떤다.

󰡒���순옥아, 니 애인 아니니?󰡓���

󰡒���얘는, 내 애인이 아니라 니 애인인 것 같은데.󰡓���

󰡒���어머, 그러면 영철이 아닐까?󰡓���

󰡒���너는 좋겠다. 기 집 애󰡓���

 떨어지는 노란 은행 잎 같은 상상도 잠시 후.

󰡒���저 이 곳에 김현민 선생님이 계신다고 해서 찾아 왔는데 혹시 어디 계신지 알고 계십니까?󰡓���

󰡒���아, 네. 혹시 저 어기 방문 열고 이쪽을 보고 계신 분이 아닌가요?󰡓���

󰡒���어, 맞습니다.󰡓���

󰡒���선생님, 저예요, 제가 왔습니다.󰡓���

 아아- 정철이구나. 정철이가 찾아 오다니. 꿈에도 생각지 못했던 현민 이었다. 그래서 아침부터 왠지 맘이 설�구나. 반갑다 못해 목이 멨다. 덥석 이 군은 현민의 여윈 손을 움켜잡았다.

󰡒���선생니임󰡓���

 현민의 음 푹한 눈에서 주책없이 눈물이 주르르 흘렀다. 이 얼마나 튼실하고 따뜻한 손인가. 이군도 눈시울이 젖어 들었다.

󰡒���편찮으시다는 말씀은 들었지만 이렇게까지…….󰡓���

잠시 말을 못 하더니

󰡒���선생님, 첫 휴가 때는 선생님을 찾아 다녔지만 어디 계신지를 몰라서 그냥 귀대하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군에 가서도 늘 선생님 걱정이었고요󰡓���

 하면서 울먹였다. 이군은 현민이 특별히 사랑했던 제자이자 같이 일을 하던 동지로서 이군도 현민을 위해선 결코 몸을 아끼지 않았었다.

󰡒���미안하네. 자네 보기에는 면목이 없어. 이런 나를 잊지 않고 찾아와주니 고맙네.󰡓���

 흥분한 탓인가 뜻밖에도 목소리가 크게 떨려 나왔다.

󰡒���선생님 이쪽으로 좀 누우세요.󰡓���

󰡒���괜찮네.

󰡒���…….󰡓���

󰡒���내가 이 꼴로 이러고 있으니 죄스럽고 궁금한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네. 짐작 못하는 바는 아니나 학교랑 동지들은 어떤가?󰡓���

󰡒���뭐라고 말씀을 드려야 할지…….󰡓���

󰡒���괜찮네. 난 어차피 이제 틀린 몸, 죽음으로 속죄할 수밖에 없는 것 같네 만, 그래도 알고 싶네. 다 말해 주게.󰡓���

󰡒���선생님, 왜 그런 약하신 말씀을 하십니까?󰡓���

󰡒���아니야. 죽을 때 죽더라도 알건 알아야 속죄라도 하고 눈을 감을 게 아닌가?󰡓���

󰡒���사실 이런 말씀드리려고 온 건 아니지만 그렇게 원하시니 그럼 말씀 드리겠습니다. 어쩌면 선생님 말씀대로 아시는 게 오히려 더 편하실 런지도 모르겠구먼요.󰡓���

 이군은 눈마저 기력이 없어 간신히 뜨고 있는 현민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학교는 선생님이 떠나시고 얼마 안 돼서 바로 문을 닫았습니다. 그리고 얼마 전에 채권단에 의해 경매처분 됐다는군요. 정우 형은 부도수표로 해서 입건되었고, 각 면의 지도자들은  저마다 보증서고 얻어 온 빚 때문에 선생님을 아직도 원망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자자하던 선생님 칭찬은 오간 데 없고, 심지어는 자선사업을 위장한 사기꾼이 라 느니 하는 소리까지 들리는 판입니다. 정말이지 휴가를 왜 나왔던가. 후회까지 했어요. 이런 얘기까지 드려서 죄송합니다. 선생님."

󰡒���아니야, 잘 말해 주었네. 언젠가 자네가 나를 찾아 와서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네. 농촌운동이란 보람을 얻는 것으로써 만족해야 하는 것 아니냐고 그때 자네는 좀 취해 있었지만 백번 옳은 말이었지. 그리고 또 내게 한 말이 있네, 선생님은 말씀과 행동을 일치되게 해 달라고 교육 할 때는 새 마을 담배를 피우라고 하시고는 어째서 본인은 양담배를 피우시냐고, 농촌운동을 하면서 고급세단이 과연 어울리는 것이냐고 해서 나를 퍽 당황하게도 만들었지 자네의 신랄한 비판이 그 당시의 내게도 충격적이었어. 그러나 그만한 일쯤 은 대단치 않다고 생각했지. 지금 생각해보면 농촌 계몽만을 위해서였는지 내 명예욕이었는지 알 수 없네. 다만 처음에는 우리 모두가 순수했다는 것. 아무도 아무런 자각증세도 느낄 수 없었지. 서서히 변하는 걸 깨달은 자네 같은 사람도 시작이 순수 했으므로 콩이 메주가 되기 위해선 띄워야 하는 과정이 필요하다는 식으로 생각했었지. 그만큼 나나 동지들 모두 순수했다는 증거이기도 하네. 더군다나 너무 고생을 모르고 자란 탓인가 나는 현실을 너무 무시한 채 무모하게 일을 벌였지 언젠가 터지고 말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애써 잊으려 했네. 둥실둥실 제 멋에 겨워서 떠오르는 풍선처럼 말이야.󰡓���

 놀랍도록 단숨에 말이 술술 나왔다. 이럴 힘이 아직 내게 남아 있었던가 생각한 현민은 갑자기 힘이 빠진다.

󰡒���아마도 여러 사람에게 못할 짓을 시킨 죄 값인가 이…….󰡓���

󰡒���선생님. 이제 무슨 말씀을 드려야 선생님이 기쁘시겠습니까? 이제부터라도 선생님이 건강을 회복하여 다시 처음부터 시작하는 겁니다. 이제 잘 살 수 있다는 분위기도 점점 확산되고 있고 하루하루가 다르게 눈에 띄게 변하고 있습니다. 그게 다 선생님 같으신 분이 뿌린 씨앗이 이 제사 열매를 맺고 있는 겁니다.󰡓���

󰡒���…….󰡓���

세워 놓은 마른 장작 쓰러지듯 고통으로 일그러진 대답이 현민과 함께 쓰러진다.

󰡒���선생님!󰡓���

얼른 이군이 받쳐 안았다.

󰡒���이군 정말 고맙네. 자네는 나처럼 살지 말고 뜻있게 살게나…….󰡓���

원래의 김현민은 부유하게 자란 탓인가 기골이 장대한 귀공자 타입이었다. 해박한 지식과 구수한 달변으로 군중을 사로잡던 인간 상록수 김현민. 자신이 알고 있는 김현민은 어디 가고 이제 정철의 젊은 가슴에 어린아이 같이 안기어 숨을 헐떡이고 있는 그는 기력이 쇠잔해 알곡을 털어버린 짚단 같다.

󰡒���선생님!󰡓���

정철은 눈물이 앞을 가렸다. 정철의 이런 마음과는 달리 현민은 조용히 눈을 감고 있었다. 힘차게 뛰고 있는 심장소리에만 귀 기울이려는 듯 젊은 정철의 가슴 뛰는 소리가 차츰 군중의 박수소리, 환호소리로 바뀌어 갔다. 배를 불룩 히 하고 이쪽을 노려보던 현수막이 하얗게 빛나며 달려오고, 기호 2번 김현민! 누구인가가 외쳤다. 연이어 김현민! 김현민! 합창하듯 연호하며 외쳐대는 귀에 익은 동지들의 목소리가 한꺼번에 들렸다. 수많은 군중들이 뿌연 흙먼지를 일으키며 이리 몰려가고 저리 몰려가고 있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푸른 바다가 나타났다. 군데군데 구름 같은 섬들이 포근히 떠 있고 살짝살짝 묻어나는 하얀 포말이 고요하기 그지없는데 문득 다시 보니 모두 갈기갈기 찢기 워 진 현수막 조각이었다.

 자신의 이름을 건져 올리려는 듯 잠시 현민의 손가락이 바르르 떨렸다. 바로 그때 공교롭게도 목탁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정철이 자기 가슴에 몸을 실은 마른 집단 같은 은사에게서 엷은 체온을 느끼며 잠시 생각에 잠겨있을 때 따뜻한 품에서 한 영혼이 일어나 평온한 눈빛으로 제자를 잠시 바라보다가 목탁소리 여운과 함께 사라진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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