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단편소설 >
어머니 의 초상화
석 도 익
가파른 언덕에 널판지와 종이상자로 벽을 두르고, 양철조각과 루핑으로 지붕을 씌운 판자집들이 들어앉은 골목길은 판자집 틈새로 간신히 뚫고 나가는 수채구멍 같다.
집집에서 버린 구정물이 얼어붙은 빙판위에,연탄재가 멋대로 뒹굴고, 국적불명의 쓰레기들이 굴러다니는 구역질나는 빈민촌 골목이다.
아침 햇살이 늘어지게 판자집의 얼룩진 그림자를 만들고, 까실한 바람이, 널려진 쓰레기며 연탄재의 먼지를 날린다.
아이는 커다란 물통을 물지게 양쪽에 매달아 지고 골목길을 오른다. 까만 제목의 반들반들한 곳은 때가 묻은 곳이고, 헐렁하게 보이는 옷차림으로 보아 속옷을 제대로 입지 않은 것이 분명했다.
울퉁불퉁한 땅에 물통이 부딪는가 하면 판자집 벽에 부딪쳐 지틀거리고, 그때마다 물은 길바닥에 쏟아진다. 물지게의 양쪽 끈을 꼭잡은 양손은 빨갛게 얼어있다.
학생복 바지의 짧은 가랭이와 짝이 맞지않은 한쪽 빨간 양말은 목이 길어서 정강이를 감싸고 있지만, 까만 양말은 짧아서 정강이가 하얗게 드러나고, 찢어진 운동화는 너무 커서 끌려다니고 걸음을 옮길 적마다 무릎의 찢어진 구멍으로 속살이 비친다. 물통의 물은 계속 출렁대고, 그때마다 넘치는 물이 아이의 발을 적신다.
숨이 턱에 찬 이이는 사과상자로 만든 어느 집 쪽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물토의 요란한 소리와 함께 넘어져 좁은 마당에 나동그라진다.물통이 쪽대문 문지방에 걸린 것이다.
아이가 넘어진 곳은 물바다가 되고, 아이는 울상이 되어 젖은 옷을 추스리며 일어나려고 애를 쓴다. 이때 부엌문이 쿠당탕 열리며 뚝배기 깨지는 요란한 소리가 튀어나온다.
아이구, 저 육실할 새끼 좀 봐. 저 병신같은 게, 에이, 나가 뒈져라.
그녀는 고래고래 욕을 퍼부으면서 일어나려는 아이를 주먹으로 쥐어 박으며 나뒹그러진 물통부터 살핀다.
아이구, 이 일을 어째. 엊그제 새로 산 물통이 이게 뭐야? 에이
, 이 병신 같은 것아. 아에 사람 노릇 못할 양이면 나가 뒈져. 속썩이지 말고! 생밥만 축내지 말고!
후들후들 떨고 있는 아이를 이제는 물토으로 찌어대며, 살기 힘든 푸념을 하고 있다.
씨끄러운 소리에 방문이 열리며 아이보다 두어 살 위인듯한 남자아이가 뛰어나온다.
아이 참, 엄마두. 그까짓 물통이 그렇게도 중요해요? 상화 옷젖은 것은 생각지도 않고. 너무하잖아요.
어머니를 나무라며, 멍청히 서있는 상화를 끌어간다.
아니, 저것도 제 씨알머리라고 역성드는 것좀 봐. 그래 잘 한다. 잘해. 육실헐 종자.
그녀는 얼굴에 덕지덕지 붙은 심술을 푸념으로 떨어내며 찌그러진 물통을 아이들 앞에 팽개치고 부엌으로 들어가면서도 계속 욕설이다.
엄만, 너무해. 상화가 얼마나 착하다구. 자, 상화야, 어디 다친 덴 없니? 옷이 모두 젖었구나. 춥겠다. 어서 들어가자.
형이란 소년은 좁고 침침한 방으로 데리고 들어가서 자기 옷을 내어 준다.
상화야, 이 옷 입어. 감기 들겠다.
상화는 옷을 갈아입으면서 형에게 감사하는 생각보다는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큰어머니에게 맞은 것은 하나도 슬프지 않다. 다만 지금 슬픈 것은 상화도 형처럼 엄마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이 없다는 것이다. 엄마가 자꾸 그리워진다. 어렴풋이 떠오르는 엄마 얼굴. 그러나 곧 지워지고 마는, 돌아가셨다는 엄마…….
덜커덩거리며 마당 귀퉁이에 리어카를 놓아두고 큰아버지가 들어오셨다.
아버지 오늘은 늦었어요.
응, 너희들이 공일이니까 늦게 와도 괜찮을 것 같아 한번 더 배달하고 왔다.
손에 묻은 연탄가루를 걸레에 닦으며 말한다.
큰아버지는 탄광의 막장일을 그만두고 연탄 배달을 시작했다. 상화보다 더 일찍 일어나셔서 리어카를 끌고 나가서 새벽 배달을 하고 와서 아침을 드시고 또 학교 가는 아이들과 함께 나가신다.
큰어머니의 불어터진 눈치를 봐가면서 큰아버지 옆에서 아침밥을 먹고 난 상화는 큰어머니가 설거지를 하러 나간 틈을 타서 조용히 입을 연다.
큰아버지, 나 오늘 리어카 밀러 따라갈래요.
아니다. 추운데 집에서 형하고 공부나 해라.
괜찮아요. 난 큰아버지 연탄 리어카 밀어드리는 게 더 좋아요. 네?
상화는 큰아버지를 졸라댔다.
큰아버지는 움푹 패인 힘없는 눈빛으로 묵묵히 어린 조카를 바라보다가
또 큰어멈이 뭐라고 했나 보구나…….
혼자말 처럼 중얼거린다.
좁은 언덕길, 리어카에 연탄을 가득 싣고 어른은 끌고, 아이는 뒤어서 안간힘을 쓰며 밀고 있다. 언덕위에 낮게 드리운 잿빛 하늘에서는 휜눈이 점점이 내려 까만 연탄위에 꽃이 핀다.
큰아버지, 정말 우리엄마는 돌아가셨나요?
상화는 벌써부터 하고 싶었던 이야기를 망설이던 끝에 하고 말았다.
날씨는 제법 추운데도 이마에는 땀방울이 송글송글 배어나온다.
그럼, 정말이지. 네가 네살 때 란다.
거짓말 같아요. 그렇죠? 그러면 제사를 지내 드려야 하잖아요. 아버지처럼요.
네가 크면 그래야지.
아버지 제사는 지내면서 왜 엄마 제사는 안 지내요? 엄마는 살아계신거죠? 네? 큰아버지.
큰아버지의 확실치 못한 대답으로 보나, 큰어머니의 푸념에서 가끔터져 나오는 어머니에 대한 욕설에서 보나 돌아가신 것이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날이 갈수록 굳어진다.
휴, 이제 다 왔구나. 그놈의 언덕을 툭 털어버렸으면 좋으련만……. 좀 쉬었다 갈까?
큰아버지는 허리를 두드리면서 리어카 손잡이 위에 걸터 앉는다.상화도 앞으로 가서 큰아버지 곁에 선다.
큰아버지, 우리 엄마 얘기 해 주세요. 네? 우리엄만 돌아가신 게 아니라고 큰어머니가 그러시던데요. 그렇죠?
기회는 이때라는 듯 상화는 끈을 놓지 않고 졸라댄다.
원, 녀석두…….
큰아버지는 대견하다는 듯 웃음띈 얼굴로 상화를 바라보다 주머니를 뒤져 담배꽁초에 불을 붙인다.
상화도 이젠 컸구나. 세상 빠르기도 하지. 상화가 벌써 이 설을 쇠면 열살이 되는구나.
상화야, 너 엄마가 그렇게 보구싶니?
네.
그러나 엄마 얼굴도 잘 모를텐데.
어렸을 때 나를 붙들고 우시던 생각은 나는데, 뚜렷하게 떠오르지는 않아요.
그럴게다. 네가 네살 때였으니까.
어디로 갔어요. 네?
상화는 엄마가 돌아가신 것이 아니고 살아계시리라 믿고 큰아버지께 떼를 쓴다.
큰아버지는 난처한 기색으로 한참이나 머뭇거리더니 조용히 말문을 연다.
상화야, 난 너에게 여지껏 숨겨 왔다만,네가 먼저 알아차린 것 같구나. 사실은 살아 있단다.
상화는 막연히 생각은 했지만, 큰아버지의 말에 반가움과 놀라움이 엇갈린다.
……풍문에는 서울 어딘가에 살고 있다더라만, 어디에 있든지 널 보고싶어 하겠지.
굵어지는 눈발이 점점이 날리고 있다. 그 하늘을 멍하니 쳐다보면서 큰아버지는 흘러간 십년 전의 이야기를 꺼냈다.
유혈이 산천을 뒤덮던 6․25가 지나고 휴전설이 나돌던 지리하 전쟁, 한 치의 땅이라도 더 쟁취하기 위해 피아간의 혈전이 끊이지 않던 그 전쟁터에서 상화 아버지는 한 줌 재가 되어 돌아왔다. 시집 온지 1년이 채 안되는 열여덟의 새댁에게.
청천 하늘에 날벼락이었다. 그녀는 만삭의 몸으로 울다 실신하고 깨어나 또 울었다. 그 와중에 유복자로 상화는 태어났다.
방글방글 웃고 있는 핏덩이를 보면서 그녀는 살아갈 길이 막연했다. 그러나 울고만 있을수는 없었다. 숱한 재혼의 권유와 유혹을 뿌리치고 자활의 기틀을 마련하기에 여념이 없었다.어린 상화를 업고 보따리 장사를 하는 틈틈이 농사일, 삯바느질 등 닥치는 대로 하여 두식구 궁색하지 않게 살아갈수 있게 되었다.
냉혹하던 추위가 가시고, 따스한 봄기운이 푹신한 어느 봄날 울타리의 개나리꽃이 별처럼 피어나고 있었다. 상화에게 아장아장 걸음마를 시키며 그녀는 마당을 거닐고 있었다.
상화네와 울타리를 사이하고 있는 구장댁 건너방에서 창문을 열고 상화 모자의 모습을 하염없이 바라보는 청년이 있었다. 그는 모든 학생들이 흠모하는 읍내 유일한 여자고등학교 미술선생이었다. 황인기, 그는 미남 총각에다가 유머가 있고, 장래가 촉망되는 화가이다. 그는 그림을 그리기 위해 조용하고 넓은 방을 찾아 구장네 집 건넌방으로 이사를 오게 된 것이다.
황선생은 짐을 정리해 놓고 밖의 정경을 살피려고, 창문을 열고 화가답게 봄이 찾아오는 오후의 한적한 들판을 바라보다가 남치마자락을 끌며 하염없이 거닐고 있는 우수에 찬 여인에게 시선이 얼어붙은 것이다.
황인기의 기슴은 뛰기 시작했다. 오래전부터 안개속을 헤매며 찾던대상을 찾은 순간처럼……. 그는 한 여인의 초상화를 그리고 싶었다. 가냘프면서도 의지가 있는, 몸 전체에서 박꽃처럼 순결함이 풍기는 여인, 조용하면서도 해맑은 빛이 은은한 우수를 지닌 여인
, 앞을 스쳐도 바람 한점 일으키지 않는, 자상함이 향기로 풍겨나는 그런 여인상을 꼭 그리고 싶었다. 그런데 지금 눈앞에 들어온 여인이 그런 이미지를 빈틈없이 갖추고 있는 것이 아닌가!
언제 기회를 보아 모델을 요청하리라 마음먹으며 그는 소년처럼 마음이 하늘을 나르고 있었다.
어린 상화만을 잘 기르기 위해 젊은 미망인으로서 값진 고생을 하고 있는 그녀를 황인기는 아름답게 가슴에 새겨갔고, 언제나 말이 적고 눈길이 마주치면 수줍게 웃으면서 목례를 보내는 점잖은 미술선생을 상화 엄마 경희도 존경하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늘 하던대로 상화를 옆집 아주머니에게 맡기고 보따리장사를 나갔다가 돌아와 보니 상화가 없었다. 아주머니 말이, 재워놓고 잠시 빨래를 하고 와 보니 아이가 없어서 엄마가 데려갔으려니 했다는 것이다.
온 동네를 뒤졌으나 간 곳이 없었다.
경희는 황망한 중에도 상화가 황선생을 잘 따르던 것을 생각해내고, 그의 방문을 두드렸다. 마침 일요일이라 황선생은 방에서 화폭에 그림을 옮기고 있었다.
아이구, 아주머니. 어서 오십시오. 그렇지 않아도 이걸 챙겨놓고서 상화를 데리고 가려던 참이었습니다.
황인기는 황망스레 아랫목에 곤히 잠든 상화를 깨우려 한다.
어머, 얘가 여기서 자고 있었군요. 얘두 참! 일하시는데 방해가 되었겠어요.
경희는 그의 고마움에 어쩔 줄 몰라하며 상화를 받아 안았다.
아니요. 별 말씀을 다하십니다. 방이 어둡길래 방문을 열어놓고 일을 하다보니 글쎄 상화가 방문앞에서 들여다보고 있지 않겠어요?
그래서 들어오라고 했더니 들어와서는 그림 그리는 것을 지켜보더니 내 옆에 슬그머니 누워 잠들었습니다. 참 귀여운 아이예요..
상화가 그림 그리시는 것이 재미있었던 모양이지요? 얘, 상화야 집에 가자, 엄마다. 응?
경희가 상화를 추스려 안으며 돌아서려 하자
상화 어머니, 상화가 이 그림을 보고서 엄마! 그랬어요.
어머, 그래요? 정말 저 닮은 얼굴을 그리고 계시네요.
경희는 놀랐다. 시작한지 얼마 안된 것 같았으나 대강 연필로 데상한 여인의 초상화는 자기의 모습을 너무 닮았기 때문이다.
실은 저…… 오래 전부터 그리고 싶었던 그림입니다만, 아직 윤곽이 확실치 않아 미루어 오다가 오늘에야 시작해 본 겁니다. 저, 상화 어머니께 어려운 부탁 하나 드릴려고 하는데 들어 주실런지…….
무슨…….
저, 기회가 있으면 꼭 부탁을 드릴려고 했던 것이데, 이건 저의 소원이었습니다.
그의 얼굴은 자못 진지하고, 애원조였다.
상화 어머니를 모델로 우리 나라의 여인상을 그리고 싶습니다. 가냘프면서도 강인하고, 청초한 들국화처럼 온갖 시련을 견디며 피어나는 꽃같이 지순한 순결과 강한 모성애가 흐르는 여인을 그려서 국전에 출품해 보고 싶었습니다.
황인기의 말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상화 어머니, 너무 주제넘은 청인줄 알면서도 부탁드리는 것입니다. 조금만 시간을 내어 그림을 그리게 해 주신다면 고맙겠습니다.
저 같은 게 뭐 자격이 있나요? 오히려…….
아닙니다. 꼭 부탁 드립니다. 그렇게 해 주실 수 있으십니까?
그러시다면 저야 뭐 어려울 것도 아닌데요.
감사합니다. 이제 저의 꿈은 이루어지나 봅니다.
황선생의 간곡한 부탁에 경희는 승낙하고 다음날부터 시간 나는 대로 황선생 앞에 어색한 표정으로 모델이 되어 주었다.
초상화가 경희의 얼굴을 조금씩 닮아가고 있을 무렵 마을에는 이상한 소문이 민들레꽃씨마냥 퍼져 가고 있었다.
청상과부 경희와 여학교 미술선생이 눈이 맞아 놀아난다는 소문이 좁은 마을을 횝쓸고 다녔다. 경희는 억울하고 분하였다. 더구나 참을 수 없는 것은 시댁으로부터의 날카로운 시선이었다.
초상화는 미완성인 채 심한 태풍을 겪어야 했다. 날이 갈수록 소문은 꼬리를 달아 경희가 황선생의 아이를 뱄을 거라는 등 동네 여자들은 노골적으로 경희 앞에서 수군대며 경별하기가 일쑤였다.
안간힘을 쓰며 상화만을 의지해 살아가던 경희의 의지는 삭정이처럼 하나하나 떨어져 나가고 마침내 집을 나가라는 시어머니의 불호령이 떨어지고 말았다. 경희는 한마디 변명도 못한 채 상화를 큰집에 맡기고 떠나야 했다.
한편 소문을 수습할 여지도 없이 황인기는 학부형과 교직원들의 면책으로 사표를 내고, 시내에 미술 교습소를 열고 몇몇 학생들을 지도하는 것으로 소일하고 있었다. 그러나 자기 때문에 어린 자식과 생이별을 하고 떠난 상화 어머니에 대한 죄책감으로 아무런 일도 손에 잡히지 않았다. 밤낮없이 허전한 공허감에 시달리고 있었다.인기의 머리속에는 경희의 우수에 젖은 환상만이 어른거린다.
어두운 거리를 무작정 걸었다. 그러나 가슴은 여전히 허전하고 답답하다.
술집 작부가 눈웃음 치는대로 술을 마셨다. 거의 술에 마비되어 하숙집으로 돌아왔다. 오늘도 취해야 했고, 내일도 술을 마셔야 괴로움을 잊을 수 있을것이다. 오히려 깨어나는 제 정신이 저주스럽다. 방안을 둘러본다. 술이 됨직한 물건은 이제 없다. 때묻은 이불과 빈 소주병들……. 빈병을 들어 입에 대고 거꾸로 흔든다. 한 방울 떨어지는 액체, 이것저것마구 집어 입안에 쏟아 본다. 그러나 이미 비어있는 술병은 기갈을 면하기엔 어림도 없다.
게슴츠레한 시선으로 고개를 든다. 벽의 도배지도 이젠 초라하게 얼룩져 있다. 한곳에 시선이 멎는다. 인기의 초췌한 얼굴에 잠깐 미소가 머물다 사라진다. 그곳에는 미소 띈 경희의 초상화가 반듯이 걸려 있다.
이것만은 안된다.고개를 가로 젓는다.아니다. 내게 필요한 것은 술이다.
인기의 충혈된 눈이 초점을 잃은 듯 했고 그는 비틀거리며 일어선다.
부인 미안하오. 난 지금 당신을 이렇게 내 곁에 놓아 둘만한 자격도 없는 놈인가 보오.
중얼거리며 액자를 내려든다. 눈물이 흘러 초상화 위에 점점이 떨어진다. 그는 미친듯한 동작으로 그림을 보자기에 싸가지고 밖으로 나선다. 거리의 모든것이 도깨비의 탈을 쓰고 엉머구리 끊듯한다. 어지럽다. 그속에 인기 자신도 한몫 끼어 마구 지꺼리며 골목을 헤맨다. 몇 백환에 그의 꿈이며 그의 전부였던 국전 출품작품인 초상화가 넘어갔고, 그 댓가로 흠뻑 취했고, 아직 소주 한 병과 열개의 긴 발이 달린 오징어 한 마리, 그리고 약방에서 거짓말까지 해가며 사넣은 약봉지가 있을 뿐이다.
미친 사람처럼 울다가 웃다가 소리를 지르며 몸을 가누지 못하는 그를 먼 발치에서 따라오는 여자가 있었다. 박영옥, 그녀는 황선생의 담임반 학생이었다. 이제 대학생이 된 그녀는, 황선생을 무척 따랐고 항상 그의 가까이에 그림자처럼 있었다.
어머! 선생님, 몹시 취하셨어요. 절 잡으세요.
어? 영옥…이 어쩐 일이야? 난 괜찮아.
그녀는 비틀거리는 황선생을 부축한다.
이제 됐으니 영옥인 어서 가봐.
선생님 너무 취하셨어요. 제가 잠드시는 걸 보고 가겠어요.
영옥이 부축해 엉망이 된 양복을 벗겨 벽에 건다.
어서 가라구!
황선생은 중얼거리며 소주병 마개를 이빨로 따서 꿀꺽꿀꺽 마신다.
으하하하. 이것이 마지막 남은 나의 재산이란 말이야.
그는 미친 사람처럼 술을 마신다. 영옥이 놀라 잽싸개 술병을 빼앗으며
선생님은 바보예요. 그렇게 큰 꿈을 가지고 계신분이 아무것도 아닌 일로 이렇게 나약해지시다니……. 선생님 제발 소원이예요. 전의 선생님 모습으로 돌아가 주세요. 네?
영옥이 몸부림치며 황선생의 가누지 못하는 몸에 매달린다.
영옥이는 아직 내 마음을 몰라.
제가 왜 몰라요. 저도 이제 어린애가 아니란 말이예요. 흑흑……. 전 선생님을 너무 좋아했어요. 선생님은 저의 꿈이었어요. 전 언제나 선생님 곁에서 선생님 일을 도와드리고 싶었어요.
선생님, 전 모든 것을 다 바쳐서라도 선생님의 꿈을 이루게하고 싶어요.네? 선생님!
영옥은 황선생의 품에 매달려 흐느낀다.
황선생은 몽롱한 취중이지만 술기운이 확 깨어난다. 언제 이렇게 자라서 어른스러운 말을 할까, 사랑스런 그녀앞에 자신이 너무 추해 보인다.
영옥인 아직몰라, 세상을. 그리고 난 잘못 그려진 그림이야. 잘못 그린 그림은 미련 두지 말고 빨리 찢어버려야 돼. 영옥이 마음 써 주는 건 고맙지만 그건 고마운 것에 그치는 것이지 다른 뜻은 있을 수 없는 거야. 어서 집으로 가라구. 부모님이 기다리실텐데.
그는 영옥의 도툼한 어깨를 어루만지며 달랬다. 취중에도 여인의 살내음이 물씬 후각을 자극한다.
싫어요. 전 안 갈래요 미술학도는 버려지는 폐품도 아름다움으로재상시킬 수 있는 능력을 가지는 눈이 있어야 한다고 선생님께서는 늘 말씀하셨잖아요.
너, 영옥이 정말 안 가겠어?
그는 가슴으로 파고드는 영옥을 강하게 밀치며 소리쳤다.
안 가겠어요.
영옥은 결심한 듯 당돌하게 또박또박 대꾸한다.
선생님을 이 시련속에서 구하고 말겠어요.
영옥이가 그럴 능력이 있다고 생각해?
저의 모든것을 바쳐서라도…….
영옥의 모든 것? 흥 그래 난 지금 여자 문제로 이 꼴이 되었지. 나에게 더 뭐가 있겠어? 여자? 하하. 여자……. 그렇지 영옥이도 여자지. 여자는 나를 괴로움에서 건져낼수 있다는 말인 것 같은데, 어디 해보라구. 너의 모든것을 다 내게 바친다. 흐흐흐…….
황선생은 허탈하게 웃으며 영옥이를 광기어린 눈으로 쏘아본다.
선생님은 지금 자학하고 계시는 거예요. 위로가 팔요한 것을 부인하고 계세요. 전 선생님을 누구보다 사랑하고 있어요. 선생님의 괴로운 마음을 씻어드릴수만 있다면 무엇이든지 하겠어요.
흥! 그래? 좋아, 그러면 옷을 벗어!
황선생은 미친 사람처럼 버럭 소리를 지른다. 영옥의 얼굴이 창백해지며 초조와 불안으로 얼룩진 얼굴로 한동안 천정을 응시하다 결심한 듯 황선생을 조용히바라보며 천천히 옷을 벗기 시작한다. 이윽고 영옥의 몸은 엷은 분홍색 슈미즈 하나만 남아 불빛에 요염하게 반사되고, 여인의 싱그런 체취가 온 방안을 적신다.
그나ㅕ는 한 걸음 한 걸음 황선생에게 다가선다.
선생님 마음대로 하세요. 저는 이제 선생님을 사랑하는 마음 하나뿐이예요.
황선생은 황망히 한 걸음 물러서다 와락 격렬하게 포옹한다. 그의 손이 떨리며 그녀의 하체로 어루만져 내려가는가 하더니 갑자기 신들린 사람처럼 몸을 떨며 영옥을 힘껏 밀쳐버린다. 그녀는 맥없이 방바닥에 쓰러진다.
더럽다. 왜 네가 이 더러운 놈을 위해 창녀같이 왜야 한단 말이냐? 난 네가 이러지 않길 바랬는데…….
선생님.
어서 가! 나가란 말이야. 여자라는 이름을 더럽히지 말고. 썩 나가란 말이야.
미친 사람이 되어 쓰러진 영옥을 일으켜 밖으로 내몰고, 벗어놓은 옷들을 밖으로 던져버린다.
그녀는 속옷바람으로 엉겹결에 당한 무안과 복받치는 감정에 마구 울부짖으며 캄캄한 골목길을 뛰쳐 나간다.
멀리서 통금을 알리는 싸이렌 소리가 밤의 적막을 가른다.
다음 날 아침 그 골목 안에서 영구차 한대가 빠져나가고 있었다.
주인없는 빈방에는 여인의 옷과 먹다남은 소주가 쏟아져 오징어 다리가 퉁퉁 불어 있고, 빈 약봉지가 뒹글고 있었다.
눈발은 굵어져 온 하늘을 뒤덮고 있다. 큰아버지의 희끗희끗한 머리 위에도 수북히 얹혀 있다.
큰아버지 그러면 엄마는 서울에 계시겠네요.
글쎄다. 풍문대로라면 그렇겠지……. 착한 사람이었는데.
허! 웬놈의 눈이 이렇게 쏟아진담.
모든것이 깊이 잠든밤, 멀리서 부엉이 소리만 눈바람 소리에 섞여 간간이 들려온다. 서쪽 뾰죽봉에 걸린 새파란 새벽달이 창문에 비추어 문살의 그림자를 드러내는 걸 보면 날이 밝아오고 있는게 분명하다. 옆에누운 형과 순이는 코를 킹킹거리며 세상 모르고 자고 있건만 상화는 눈이 초롱초롱한 채 한 잠도 못이루고 있었다. 새벽기차를 놓칠까 걱정도 되고, 엄마를 만나야 한다는 생각에 마음은 설레이기만 한다.
역쪽에서 기적소리가 울리다.
상화는 조심조심 소리 죽여 옷을 입고 밖으로 나왔다. 밤새 내린 눈이 천지를 덮었고, 찬바람이 귓볼을 스친다. 숨을 죽이며 골목길을 빠져나오다 다시 한번 뒤돌아 보고는 달리기 시작했다. 역전에서 덜커덩거리는 소리가 나는 걸로 보아 떠날 시간이 다 된것 같다.
상화는 맨앞에서 끌고 갈 기관차에서 허연 김을 내뿜고 있는 열차밑으로 살금살금 기어가서 화차칸 위로 기어올라 갔다. 네모진 화차에 다행히 연탄은 담겨 있지 않고, 화물 같은짐이 천막에 씌워져 있어 한 구석공간에 눈을 털고 앉을 수 있었다.
한참후에 기차는 가쁜 숨을 몰아 쉬며 육중한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기차가 속력을 내자 칼바람이 상화의 목덜미로 기어들어왔다.그러나 상화의 머릿속에는 따뜻한 어머니 모습으로 가득차 더워지고 있었다.
그 추운 화차의 한 구석에서도 잠이 들었던 모양이다. 눈을 떠보니해는 충천에 떠있고 굉장히도 높은 집들이 눈앞을 가리고 있었다.기차도 이미 멎어 있었다.
상화는 직감적으로 여기가 서울역이라 생각하자 재빠르게 뛰어내려 역 출구쪽으로 빠져나갔다. 손님들이 열을 지어 나가고 있었다. 상화도 사람들 틈에 끼어 출구로 나가려 하자 역원이 붙잡는다.
얘, 차표 주고 가야지.
상화는 아찔했다. 차표가 있을 리 없다. 상화는 울상이 되어 잡힌손을 뿌리쳤다. 그리고 자신도 모르게 엄마하고 외쳤다. 그 때 앞에 가던 한 여자가 돌아보며 손짓을 해 주었다.
응, 어머니와 함께 왔구나. 어서 가거라.
실은 상화와 관계 없이 여인은 뒤에 따르는 일행에게 소짓한 것이었다.
사람의 물결, 차들의 물결, 상화는 이상한 나라에 온 것만 같았다.
상화는 지친몸으로 대합실 긴 나무 의자에 걸터앉았다. 옆자리엔 젊은 신사가 앉아 있고, 그의 발밑에는 상화 또래의 사내아이가 구두통에 올려놓은 신사의 구두를 닦고 있었다. 먼지가 묻고 더럽던 구두가 아이의 잽싼 손놀림에 잠깐 사이 반짝반짝 광이나는 새 구두가 되었다. 소년이 가볍게 구두통을 두들기자 졸고 있던 신사는 구겨지지않은 백환짜리 지폐 한 장을 건네주는 것이었다.
상화의 얼굴에 생기가 돈다. 나도 구두를 닦는거야. 엄마를 찾을 때까지…….상화는 주머니를 뒤졌다.언젠가 큰어머니 몰래 큰아버지가 주신 오백환을 꺼내들고 가게로 달려가 구두약, 구두솔 등속을 샀다.
구두 닦으세요~. 구두닦으세요~.
아무리 외치고 다녀도, 힐끔힐끔 쳐다만 볼 뿐 누구하나 구두를 닦겠다는 사람은 없었다.
어디 한번 닦아 볼래?
인자하게 생긴 신사 한 사람이 싱긋 웃으며 구두를 내밀었다. 상화는 맨땅에 쭈그리고 앉아 땀을 흘려가며 약을 바르고, 솔로문대고, 헝겊으로 닦아보았으나 광은 나지 않았다.
이런일 처음인가 보구나. 구두통도 없이……. 기차시간 다됐구나. 그만 닦아둬라.
신사는 오백환 짜리 한 장을 상화의 무릎 위에 놓고는 출구를 향해 사라졌다. 어리둥절하녀 일어서는 순간 상화의 손에 들려있던 지폐를 낚아채는 손이 있었다.
야! 이 새끼야! 너는 누구냐? 어디서 굴러온 거러진데 남의 구역에서 멋대로 영업을 해? 죽고 싶어!
깡패 같은 아이가 버티고 서있고, 주위에는 같은 패인듯 구두통을 멘 아이들 셋이 둘러싸고 있었다.
왜 그래. 내 돈 이리 줘!
상화는 울상이 되어 그녀석의 손에서 돈을 뺏으려 한다.
햐, 이새끼 깡통이로군! 너 뽄때를 봐야 되겠구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상화의 눈엔 별똥이 튀었다. 비틀거리다 쓰러진 상화의 손에 들려있던 물건들은 사방으로 나뒹구러진다.
이 새끼 여기가 어딘 줄 알고 까불어.촌놈, 맛좀 봐라.
꼭 거지 봇짐 같구나.
야, 이 거러지야.
그들은 땅바닥에 널부러진 아이를 한번 씩 걷어차고는 재미있다는 듯 떠들며 가버린다.
대합실에는 어른들도 많았으나 누구하나 말리는 사람은 없고, 구경만 하는것이 상화는 슬펐다.
일어나기조차 싫어 코피를 닦으며 엎드린 채 흐느껴 울었다.
이때 옆에서 안타까운 듯 지켜보고 있던, 상화보다 좀 커보이는 소년이 상화에게 다가와 어깨를 어루만진다.
얘, 울지말고 일어나. 여긴 이런 곳이란다. 너 시골서 온 모양이구나.
상화의 눈에 비친 그 소년의 따뜻한 눈빛은 마치 구세주 같아 보였다.
그는 상화를 일으켜 옷의 흙을 털어 준다. 어깨에 찹쌀떡 목판을 걸머멘 그는 역앞의 광목천으로 포장한 호떡집으로 상화를 데리고 갔다.
배 고프지? 이 호떡 먹어.
꿀맛 같은 호떡을 단숨에 삼키는 상화에게 소년은 따뜻한 물을 따라주며 이것저것 묻는다. 상화는 그가 형같이 생각되어 모두 얘기해 주었다.
그렇구나, 하지만 이 넓은 서울에서 어떻게 엄마를 찾을 수 있겠니? 하긴 나도 전쟁통에 아버지,어머니 모두 잃고 지금까지 찾고 있단다. 너도 꼭 우리들 같구나.
소년은 어른들처럼 한숨을 길게 토한다.
내 이름은 용철이란다. 우리집에 있는 내동생은 용숙이고 상화야 너 갈 곳이 없지? 우리 집에 가서 같이 지내면서 엄마를 찾도록하자.
상화에게는 구세주였다. 더없이 고맙고 반가웠다.
호떡집을 나온 그들은 손을 잡고 사람들 사이를 빠져 새로 시작된 보금자리로 향한다.
걸찍한 물이 꾸물꾸물 흐르는 청계천어귀 토끼장처럼 개울둑에 다닥다닥 들어찬 판잣집사이를 돌아 사과상자로 만든 문을 열고 들어선다.
용숙아!
귀퉁이 판자문이 열리며 여자아이 얼굴이 밖을 내다본다.
오빠, 오늘은 일찍 왔네, 나 이제 밥 하는데.
여자애는 뒤에 서있는 낯모르는 아이를 보고 흠칫 놀란다.
상화야, 내 동생이야. 용숙아, 얘는 서울로 엄마 찾아온 아인데,우리 집에서 같이 살면서 어머니를 찾기로 했단다.
어머, 정말? 아이 좋아. 오빠 그럼 밥을 더 해야 하겠네.
용숙은 반가운 모습으로 밥을 짓는다.
상화야 들어가자. 방은 좁지만 그대신 방세가 싸단다.
용철이가 앉으라는 곳이 아랫목인지 따뜻한 방바닥이 몸과 마음을 녹여 준다.
까만 머리를 양쪽으로 묶은 용숙이는 앙증맞고 총명해 보였다.
전등불을 켜고 방바닥에 신문지 한장을 깔아 밥상을 대신했다. 셋이 동그라니 둘러앉은 저녁상은 반찬은 없어도 행복이넘치는 분위기였다. 상화는 난생처음 사람의 정을 느꼈다.
상화야, 넌 내일부터 용숙이와 같이 대합실에 나가 용숙이가 하는대로 껍을 팔면서 엄마를 찾는거야. 많은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니 혹시…….
열세 살인 용철이는 모든게 어른스러웠다.
이밤 동심의 이 가정은 새로운 내일을 기다리며 나란히 누워 서로의 지난이야기들에 밤 깊은 줄도 몰랐다. 통금싸이렌이 울려서야 불을 껐지만 제각기 눈은 별처럼 반짝이고 있었다.
다음날 아침 상화가 눈을 떠 보니 용철이는 없고, 용숙이가 밥을 짓고 있었다.
새벽신문 배달을 마치고 돌아온 용철이가 마련해 준 상자를 들고 상화와 용숙이는 껌을 팔러, 용철이는 찹쌀떡을 팔러 제각기 집을 나섰다.
용숙아, 상화 잘 데리고 다녀. 그리고 일찍 들어와.
걱정마. 오빠두 일찍 와야 해.
상화는 엄마 잘 찾아 봐라.
응, 형도.
만원인 버스를 용케도 비집고 올라가 용숙이는 껌과 활명수를 잘도 팔았다. 그러나 상화는 아무래도 설기만 했다. 버스에 올라가면 사나운 조수가 밀쳐내고, 손님들은 본 체도 않는다. 어쩌면 껌보다 엄마를 찾을 생각에 마음쓰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별로 팔지도 못했는데 벌써 빌딩의 그림자가 길게 드리워진다. 첫날이라 피곤할거라며 용숙이 재촉하여 일찍 돌아왔다.
반짝반짝 하늘엔 별이 삼형제…….
노래를 부르며…….
얼마후 용철이도 꽁치 세마리를 사들고 돌아왔다.
셋은 만나기가 바쁘게 오늘 있었던 일과 계획에 대해 이야기꽃을 피웠다. 기대에 부푼 즐거움 속에서 상화는 제법 그 생활에 익숙해 지고, 서울아이들처럼 약아가고 있었다.
아직 달라진 것이 없다면 엄마를 만나지 못했다는 것이었다.
용철이 형네 부모님은 피난길에 헤어져 어디 계신지조차 모른다는데 상화어머니는 그래도 서울 안에 있는 것만은 확실하지 않은가?
어느 날 용숙이를 먼저 들여보내고 늦게까지 껌을 팔다 터덜터덜 돌아오는 길이었다. 어느 상점 앞에서 상화 또래의 계집아이가 자기 어머니를 붙잡고 늘어져 무엇인가를 사내라고 떼를 쓰는게 눈에 띄었다.
엄마에게 응석 한번 부려보지 못한 상화는 가슴속에서 저며오는 아쉬움에 넋을 잃고 말았다.
계집아이는 상점 안을 가리키며 예쁜 인형을 사달라고 졸라대는 모양이다.
그 상점에는 각종 예쁜 인형과 아름다운 꽃 그리고 거울과 완구 등이 쌓여있었다. 상화도 무심결에 인형이 진열된 위를 바라보다 소스라치게 놀랐다.
먼지 낀 벽에 걸린 그림, 그것은 분명히 엄마의 얼굴을 그린 그림이었다. 엄마에 대한 기억이 뚜렸하지는 않지만 첫눈에도 낯익은 얼굴이었다.
큰아버지에게 들은 얘기도 있지만, 어머니 얼굴과 미술선생님의 얼굴이 어렴풋이 떠올랐다.
인자한 웃음, 상념에 잠긴 초상화, 이 그림이 어떻게 여기에 걸려 있을까? 상화는 넋을 잃고 그림을 보고 또 보았다.
점포문을 닫으러 나온 주인 아저씨가 이상하게 보는 눈치에 아쉬운 발걸음을 돌렸다.
다음날부터는 시간만 나면 그 상점 앞에 가서 그 초상화를 바라보는 것이 유일한 낙이었다. 이제는 가게 주인 텁석부리 아저씨도 으레 그아이거니 하고 내버려 둘 정도다.
오늘도 상화는 일찍 일을 끝내고, 초상화를 바라보며 수 없이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상화 옆에는 언제 왔는지 어떤 아줌마가 와서 인형을 고르다 그림에 눈이 멎자 흠칫 놀란다. 그리고 눈을 부비고 다시 쳐다본다.
주인 아저씨, 저 초상화 팔건가요?
헤헤……. 그까짓 것 사다가 뭘 하시게…….
영감은 그저 이 상점을 인수할 때 걸려있던 먼지 낀 그 그림을 그냥 둔것이라 대수롭지 않다는 대꾸다.
정말이예요. 아저씨. 저거 파세요. 지금은 가진돈이 만환밖에 없어서 어쩌나…….
장사치란 원래 눈치가 빠른 것이어서 대수롭지 않게 여기던 그림을 만환밖에 라는 말에 생각이 달라진다.
예, 나는 원래 그림에는 별로 관심이 없어서……. 우리 안사람이 귀하게 여기는 것인데 어디 한번 의논을 해보죠.
영감은 싱글거리며 방으로 들어가 부인과 쑥덕인다.
부인이 영감보다 한 수 위다. 여자가 대단한 인테리어인 것 같은데, 그림은 꼭 사야한다니 예사 그림이 아닌 모양이다. 한 오만환을 불러 보란다.
헤헤……, 저 저의 집사람이 귀중히 여기는 그림이라, 팔기는 아깝지만 선생님께서 꼭 필요하시다면 오만환은 주셔야 한다는군요.
그러시겠지요. 하지만 제가 그만한 돈을 마련하려면 이삼일을 걸려야 하는데, 그새 누구에게도 팔지 않았으면 합니다.
그거야 헤헤……. 뭐 그렇게 해 보지요.
여인은 아쉬운 듯 다시 그림을 바라본 후 총총히 사라진다. 그 광경을 옆에서 지켜본 상화는 아찔했다.
며칠후면 그 그림마저도 영영 다시 볼수 없게 되는 것이다.
별들이 촘촘히 박힌 밤하늘을 조각달이 유유히 건너고 있다. 거리엔 오색 네온이 켜지고, 크리스마스 분위기에 들떠 사람들은 술렁인다.
나도 오만환만 있으면 그 그림을 살 수 있다. 그런데 돈이 없다.상화의 마음 속에는 오만환과 어머니 모습뿐이다.
크리스마스 츄리가 아름답게 장식된 어느 보석상 진열장 안에는 각종 보석들이 눈부시게 쌓여 있다. 상점안에 아무도 없다. 상화는 잽싸게 문을 열고 들어가 진열장 안의 보석들을 닥치는 대로 움켜쥐고 내닫는다. 한참후 숨을 몰아쉬며 뒤를 돌아다 보았으나 아무도 쫓아오지 않았다.
상화는 골목어귀 조그만 귀금속 상점안으로 들어갔다.
아저씨, 이거 오만환에 사세요.
상화는 어리둥절한 주인 앞에 한 줌의 금목걸이와 진주반지. 금팔찌등을 내밀었다.
이상한 눈초리로 바라보던 주인은 와락 달려들어 상화를 붙잡는다.
너 이것 훔친 거지? 그렇지?
호통에 겁을 먹은 상화는 그대로 주저앉아 울음을 터뜨린다.
경찰서 보호실에서 상화는 울음만 터뜨린다. 아무리 물어보아도 대꾸도 없이 울고만 있다. 취조 담당 벽형사는 무슨 곡절이 있을거라생각하고, 밖으로 데리고 나와 짜장면 시켜 같이 먹으며 친절을 베푼다. 그제서야 상화는 입을 열었다.
응, 그런 일이 있었구나. 하지만 아무리 그렇더라도 남의 것을 훔치는 것은 도둑이란다. 내가 주인에게 잘 얘기해 볼테니, 너무 걱정말아라.
물건을 도둑맞고 낙심해 있던 여주인은 박형사가 찾아가 물건을 돌려주고 상화 이야기를 했더니 눈물을 흘리더라는 것이다. 그때 보호실 문이 열리며 한 아주머니가 들어온다.
상화야, 이 아주머니가 너를 용서해 주러 오셨다. 인사드려.
박형사의 말에 상화가 겸연쩍게 고개를 들어 바라보려는 순간,
엄…….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어쩌면 그렇게도 초상화 그림을 닮은 얼굴일까? 엄마얼굴을 빼 닮은 얼굴이었다. 와락 달려들어 안기고 싶었다.
자, 상화라고 했지? 상화는 착한 사람, 훌륭한 사람이 될꺼야. 자, 이돈은 상화가 소원을 풀어주기 위해 주는 것이니. 받아라.
아주머니는 두툼한 돈뭉치를 상화의 손에 쥐어주는 머리를 쓰다듬어 주다가 흑!하고 울음을 삼키며 뛰쳐나갔다.
자, 어서 가서 엄마의 초상화를 사야지. 그리고 언제든 생각나면 이리로 오너라.
박형사의 다정한 목소리를 뒤로 하고 상화는 발걸음을 재촉했다.
목화솜 같은 함박눈이 곱게 내린다.
상화가 그 가게에 도착했을 땐 온통 얼굴은 땀으로 얼룩져 있었다.
아저씨 그림사러 왔어요. 자, 여기 돈 있어요.
응, 너로구나. 그런데…….
초상화 그림 제가 사려구요. 오만환이면 파신다고 했잖아요?
아니, 네가 그 그림을……. 하지만 그 그림은 방금 그 선생님이 사 가지고 갔는걸…….
네? 뭐라구요?
상화는 벽을 올려다 보았다. 때묻은 벽엔 초상화가 걸렸던 네모난 빈 자리만 허전하다. 눈앞이 캄캄했다. 목이 터져라 소리소리 지르며 거리로 뛰쳐나왔다. 그림을 들고 가는 사람은 없다. 골목길에 털석 주저앉았다.
엄마,엉엉, 어쩌면 좋아. 이까짓 돈이 뭐야. 이젠 필요도 없어, 엉엉…….
서서히 땅거미가 기어내리는 시각, 인적이 뜸한 골목길에서 상화는 눈과 함께 뒤굴면서 지폐를 마구 뜯어 뿌린다. 눈가루처럼 흩날리는 지폐 조각이 눈발처럼 어지럽다. 눈발 속에 한 얼굴이 떠오른다. 그 얼굴은 다시 초상화에 오버랩된다.
엄마―.
메아리가 눈발을 헤치며 퍼져간다.
교회의 종각이 보이는 골목, 여인의 뒷보습이 보인다. 가지런한 발자욱이 오목오목 따라가고 있다.
까만 가죽장갑을 낀, 왼쪽 팔에 낀 액자를 그녀는 소중히 치켜올려 가슴에 안아 본다. 그리고 먼 하늘을 바라본다. 점점이 뿌려지는 눈발속 환상이 그려진다. 팅팅 불은 오징어다리, 소주병이 뒹굴던방.
국전, 금박글씨로 특상이란 리본이 걸린 초상화 밑에 많은 사람들이 모여 칭송하고, 감탄하는 모습이 어른거린다.
그녀의 입가엔 미소가 흐르고, 횐눈송이가 한 점 그녀의 빨간 입술위에서 사르르 녹는다.
멀리서 성당의 종소리가 울리고 크리스마스 캐롤이 쏟아지는 눈과 함께 온 세상을 덮는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