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집(단편)

따끈한 커피가 식을때 까지

돌 박사 2007. 10. 18. 11:11

 

     따끈한 커피가 식을 때 까지                                         

                                           석  도 익                    

                                                       

가슴에 꼭 껴안은 녀석은 포대기 안에서 방글방글 웃었다.

금방 어미의 젖꼭지를 물고 있던 빨갛고 조그만 입이 언제나 립스틱을 바르지 않아도 빨갛고 촉촉하게 젖어있는 듯한 그녀의 입술 같아서 자신도 모르게 그녀를 다시 처다 보았다.             

오늘도 화장하지 않은 그녀의 해맑아 석류 같은 입술사이로 읽을 수 없는 하얀 미소가 새어 나오는 듯 했다.

조그마한 녀석을 안고 있노라니 따스한 체온이 가슴으로 전해지며 삶의 무한함과 사랑의 미로 같은 긴~ 옛 일들이 안개처럼 밀려와 과거로 흘러가고 있었다.

시골 간이역전 옆 골목 좁은 여관방, 늦가을의 스산한 바람은 낙엽을 굴리다 그것도 재미없는지 퇴색한 문창호지 방문에 어느 누가 머물다가 떠나간 객들이 뚫어놓은 손 구멍 틈을 비집고 숨어들었다.

역으로 진입을 알리는 디젤기관차의 기적 소리와 레일을 밟고 굴러가는 육중한 쇠바퀴의 긴 행렬에 검은 고철의 둔탁한  움직임으로 가고 오는 소음이 간헐적으로 들리는가 하더니 잠시 멈추는 무거운 침묵마저도 깨버리려는 듯이 후두둑 후두둑 빗방울이 양철 지붕을 때리는 소리가 더욱 을씨년스럽다.

네모진 천정에 당그라니 목 매달린 30촉 짜리 백열등 전구는 역사가 꽤나 오래된 듯 파리들이 다닥다닥 빈틈없이 배설해놓은 점들로 인해 깨죽 같은 조명을 흘리고 있다.

수다를 떨며 이방 저 방을 안내하던 턱이 두개로 보이던 여인숙 주인아주머니도 내실로 간지 반시간이나 더 지났음직한 시간동안 방에 들어선 동민은 어떻게 해야 할지를 잊은 채 우두커니 서서 전등이라도 흔들흔들 움직여주지 않는 것이 야속하게 느낄 정도로 침묵이 무겁다.

반대편 벽에 기대서 동민을 바라보며 꼼짝하지 않고 있던 그녀가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한 것은 빗줄기가 더욱 강하게 후두둑하고 창문을 때릴 때었다.

그녀는 천천히 그녀를 감싸고 있던 껍질을 하나씩 벗기 시작했다.

바바리코트를 다음은 원피스가 발밑으로 흘러내리고... 동민을 바라보는 시선만은 고정시킨 채 천천히 행동만 하고 있었다.

‘무슨 말이라도 해야 하겠는데 꼭 지금은 뭐라고 해야 하는데...’ 하면서도 동민은 목이 마를 뿐 입이 움직여 주지 않았다.

하행 열차의 기적소리와 함께 둔탁한 레일의 마찰음이 길게 멀어지는데 그녀는 무어라고 중얼거리며 동민에게로 다가왔다.

다행스럽게도 마지막 까지 매달린 손수건만한 팬티와 훈련병에게 피아르아이 훈련 때 약삭빠른 훈련병이 준비해 사용하다 들켜 치도구니 맞던 무릎가리개 같은 브래지어 만 남긴 그녀를 바라보며 동민은 반사적으로 한걸음 물러나고 말았다.

ꡒ나 모레 결혼해요. 나의 행복을 찾아가기 보다는 무리아빠 행복을 지켜주기 위해서지요ꡓ

ꡒ…….ꡓ

동민은 여기서도 말을 못했다. 그저 가슴만 후둘 후둘 빗발칠 뿐이었다.

그녀는 동민이 물러난 만큼 더 다가왔다. 가녀린 어깨가 떨리고 있었고 어깨까지 흘러내린 머리가 흔들리고 있다고 동민은 생각했다.

ꡒ그러나 이것 하나만은 분명하게 할 거예요. 우리는 칠년 이라는 긴 나날을 변함없이 사랑해 왔어요. 아니 이 세상 끝나는 날까지 변함이 없을 겁니다. 그래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우리의 사랑을 확인하고 싶어서 함께 오자고 한 것이고 이곳은 무리아빠와 내가 헤어져 있는 중간 지점이 되는 곳 이어서 여기에서 내리자고 했고 이곳이 서로 마지막 헤어져도 돌아가는데 똑같은 거리지요 그래서 우리들의 마지막 공간을 둘이서 메워놓고 싶은 밤을 만든 거예요, 무리아빠가 늘 나에게 불러주던 심술각하의 마지막 심술을 부리고 싶기도 하구요. 오늘 밤만은 아무말씀 마시고 내 말을 들어주셔야만 해요 영원히 후회 없게요.

조용하면서도 볼 메인 목소리로 많은 말을 토해낸 뒤 그녀를 지탱하고 있던 모든 힘이 빠져나간 것같이 동민의 가슴에 쓰러지듯 안겨왔다.

차디 찬 가냘픈 어깨가 세차게 흔들리고 있음을 느낀 동민의 두 팔이 그녀의 나신을 어느새 감싸 안고 답답한 마음 구석을 비집고 간신히 마른 목구멍을 더듬거리며 밑동도 줄기도 없는 말을 동민은 비로소 해야만 했다.

ꡒ각하야 왜이래? 우리 이러지 않았잖아, 사랑은 아름답고 티 없이 숭고하고 소유욕구 없이 승화시킬 수 있는 고귀함 이라고, 탐하기보다는 마냥 포근하게 감싸주는 무한한 정신적인 사랑을 하자고, 너와 내가 원하는 육체적 쾌락보다는 더 깊은 마음속의 포옹 이어야 한다고……. 우리는 지금까지 그래왔고 앞으로도 잊혀지지 않는 영원한 사랑을 갖게 될 것이라고 그래놓고 우리의 약속을 어길 것인가?ꡓ

울먹이는 그녀의 귓가에 되지도 않은 소리를 지껄이는 자신이 바보 같고 증오스럽다고 동민은 생각했다.

ꡒ거짓말, 거짓말 말아요. 모든 것이 결국 무리 아빠는 나를 위하는 척 하지만 자신의 용기 없음을 자학하는 거예요. 한 여자의 남편으로서, 한 아이의 아빠로서 한 가정의 가장 이라는 도덕 윤리 관념이 자신을 돌부처처럼 성인군자 인양 만들고 있는 거 아니야요? 그 울타리를 뛰어넘어 들어가지 못하고 있는 나도 어리석은 구석기 시대의 유물 처녀이고요. 하지만 이제 다 포기했어요. 다만 이것만은 꼭 가지고 가고 싶어요. 우리가 사랑 했다는 증거 그리고 사랑한다는 표시, 우리의 열매를 가지고 싶어요.ꡓ

ꡒ…….ꡓ

ꡒ난 그 열매를 키우고 싶어요. 우리들의 사랑의 열매를, 사람들이 들이 천벌을 받을 년이라고 하더라도 나의 모든 것을 태어나서 처음이자 마지막까지 사랑하는 사람에게 바치는 것이 당연 하다고 생각해요.

남들이 납득할만한 일은 아닐지라도 우리들은 우리 자신을 속이지 않는 일이에요. 어서 위선의 껍질을 벗고 아담과 이브가 그랬듯이 사랑을 확인시켜 주세요.ꡓ

그녀의 비에 젖은 듯한 음성은 동민의 가슴에 자욱하게 안개처럼 내려 깔려 어지럽게 파고드는 듯 했다.

평소의 그녀는 언제나 천상의 여자였다. 옆을 지나쳐 가도 바람한점 일으키지 않는 조용하면서도 정숙함이 겹겹이 둘러져 있는 듯한 느낌을 동민은 늘 받아왔었다.

동민이 군에서 제대 하자마자 얻은 직장에 다니던 사회 초년병 때 처음 만나는 순간에도 어디서 많이 본 듯한 낯익은 느낌에 금방 가까워 졌던 앳되고 깜찍하게 아름답던 소녀, 수줍음이 많은 탓인지 그녀가 자기를 좋아하고 있다는 생각조차 못한 동민은 부모님의 재촉에 못 이겨 중매로 얼떨결에 결혼한 후에서야 그녀가 동민을 깊게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을 때는 서로의 갈 길을 달리 했음에도 불구하고 둘은 더욱 가깝게 아끼고 사랑하며 숫한 시간들을 보내고 지나 왔지만 이렇게 이성을 잃고 흐트러질 수 있는 그녀가 아니다.

한꺼번에 너무 많은 말을 한 그녀는 지쳤는지 힘없이 흐느끼는 그녀의 몸은 더욱 엉키듯이 가중 되어 왔다. 비에 젖은 새가 몸을 떨듯이……. 창밖에는 빗소리가 제법 점점 굵어지고 있었다.

어깨를 만지고 있던 동민의 손이 그녀의 뼈가 없는 듯한 가는 허리를 살포시 안았고 그녀는 무너지듯이 찌든 침구위에 쓰러지는 바람에 동민의 팔이 베개가 되어 그녀를 눕히고 그녀는 한없이 파고들었다. 노란 병아리가 어미닭의 날개 속으로 파고들듯이…….

동민이 이불을 당겨 덮어주며 억지로 차분하게 꾸미며 말을 꺼냈다.

ꡒ각하야, 그래 모든 것이 맞아, 나도 지금 나 자신을 지탱 할 수 가 없어 각하를 얼마나 갖고 싶었는지 몰라 천번 만번 하지만 난 그럴 수 가 없었어. 난 너무너무 각하를 사랑한다. 그러기에 내 욕심대로 각하를 가질 수 없는 거야 각하는 지각생 이라고 자기가 그랬잖아 어쩌겠어? 이미 결혼한 내가 가정을 버릴 수 도 있다고 하자 사랑을 위해서, 하지만 한 가정을 전복시키고 행복하다고 할 수 있으며 한 여자를 불행하게 만든 내가 각하를 세상에 없이 행복을 느끼며 살 수 있게 해줄 수 있을지는 모른다는 생각이 드는 거야 이미 나는 행복할 수 있는 자원을 반쯤은 써버린 사람이고 각하는 무한한 가능성이 있는데도 나의 구덩이 속에 빠트려 놓고 그 가능성을 말살해 버리면서 결국 사랑의 지고지순한 의미는 없어지고 결국 모두에게 나는 잘못만 하게 되는 결과라고 언젠가도 이야기 했잖아, 그래서 우리는 참아왔고 이제 각하는 행복한 내일을 위해서 가는 것이고 나는 이렇게 사랑하는 마음으로 보내고 싶은 거요.ꡓ

ꡒ…….ꡓ

그녀는 무슨 말을 하려다 만다.

ꡒ각하야, 난 사랑한다. 당신에게서 때로는 어머니 같은 포근함을 어떤 때는 누나 같은 안정감을 나보다 어린 각하에게서 느끼는가 하면 가끔 아주 많이 불같은 성적 감정을, 자제하기 힘들었지만 아내가 있고 이제는 귀여운 아이까지 있는 내가 사랑하는 각하의 불행을 만들 수 는 없었소. 다만 언제 까지나 오늘이고 싶고 내일도 오늘로 이어지는 변함없는 내일이고 싶었지. 각하에게 나의 때를 뭍이고 싶지 않은 아름다운 꽃이었소. 우리가 서로 미치도록 갈망 하면서도 그 어려운 고비들을 얼마나 잘 넘었는지……. 그러면서도 우린 지금까지 아름답게 사랑해 왔소.”

ꡒ그건 그랬어요.”

그녀의 가느다란 울림이 동민의 가슴속에서 들리는 듯 한 것은 그녀의 얼굴이 동민의 가슴깊이 묻어버린 때문이리라.

ꡒ다시 생각해봐요? 우리가 오늘밤 우리의 사랑을 서로 확인한다는 구실로 서로의 열망을 채운들 무엇을 얻을 것인가? 그리고 사랑의 열매를 얻는다 하자, 그 애는 과연 사랑의 열매인가요? 아니야 이 세상 모두에게 축복받으며 태여 나야 하는 한 인생을 우리는 우리의 한때 잘못으로 저주받은 인생으로 만들고 마는 거야 커가는 아이를 우리는 어떻게 지켜볼 것이며 어떻게 살 수 있는가를 거기까지 생각해 보았소ꡓ

조용히 띄엄띄엄 이야기 하는 동안 그녀는 아무 말 없이 알몸을 동민에게 묻은 채 간혹 긴 한숨을 가슴으로 내보내며 따스한 체온을 전하고 있었다.

ꡒ각하야 자 우리가 늘 그랬듯이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러움 없는 사랑을 했노라 자부하며 당당하고 순결한 마음과 몸으로 서로의 길을 가기로 하지ꡓ

ꡒ그건 제가 하던 말이잖아요ꡓ

ꡒ맞아 우리 심술각하가 하던 말을 오늘은 내가 써먹고 있지만 이것이 결코 현실을 피하는 것이 아니고 미래를 아름답게 가꾸기 위함이라 생각하며 여기까지가 아닌 더 멀리 까지라 믿으며 아름다운 꿈을 꾸며 잡시다. 각하를 재워줄게 응ꡓ

ꡒ…….ꡓ

두 사람의 숨소리는 이상하리. 만치 차분하고 평화로운데 청승맞은 늦가을 빗소리가 깊은 밤 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지나간 추억 속을 헤매고 있던 동민이 어린 아이가 우는 바람에 꿈에서 깨어난 듯 자신이 안고 있던 아이를 추스르며

ꡒ각하야 아니 애기엄마 아이가 껍데기 찾네.”

아기를 건네받은 그녀는 스스럼없이 부푼 유방을 비집어 애기에게 물리면서 눈은 아이에게 머무른 채 나직하게 속삭인다.

ꡒ참 잘했어요. 무리아빠가 정말 좋은 사람이었어요. 진정 나를 사랑해주는 것이었음을 이젠 알 것도 같아요. 그때는 한없이 미웠어요.

하지만 내가 만약 무리네. 가정에 비집고 들어가 내가 차지했었다고 해도 평생을 죄의 의식 속에서 살아야 했을 것이고 내 생각대로 당신의 아기를 가지고 갔다면 지금은 이렇게 살아 있지도 못했을 거예요……. 하지만 한편으로는 아직은 아니 영원이가 될 것 같아요 영원히 허전한 가슴 한복판에 구멍 뚫린 듯한 공허함을 메울 수 는 없을 것 같아요. 후후…….ꡓ

이야기 끝에 하얀 눈발 같은 웃음은 진한 습기를 머금은 듯 했다.

앞의 말을 보충하려는지 아니면 재차 우울해지는 자신의 마음을 바꾸려는 듯 음색을 바꾸며

ꡒ신혼여행 제주도에서 돌라오는 길로 친정에 먼저 가겠다고 하고서 무리아빠 찾아 갔다가 꾸중만 듣고 그냥 선채로 돌아왔던 때 그런 마음 말이지요.ꡓ

깊게 빨아 당긴 담배 연기를 천천히 흘리고 있는 동민의 눈가에는 담배연기 때문인지 물기가 서렸다.

ꡒ아니 위선이었소 내가 이제 와서 위선이었음을 느끼는 것은 아니요 그때도 위선이라 자학하곤 햇소 하지만 후회는 없어요. 이렇게 행복해 보이는 각하를 보니 말이요 그런데 이상하게 애기가 날 닮은 것 같은데 웬일일까?ꡓ

ꡒ저도 가끔 그렇게 생각될 때가 있어요, 임신해서 누구를 미워하면 그 사람 닮는다고 하던데ꡓ

ꡒ허긴 내가 미운 놈이었지 참 이름이?ꡓ

ꡒ무희 에요ꡓ

ꡒ무희?ꡓ

ꡒ네, 무리, 무희 돌림자 아니에요? 호호ꡓ

ꡒ그러고 보니…….ꡓ

ꡒ애기 아빠에게 애 이름은 내가 지은 것으로 하자고 떼를 써서 지은 이름인 걸요 ꡓ

ꡒ참 인사가 늦었어요. 무리엄마 건강해요?ꡓ

ꡒ글쎄 난 지금은 모르겠소. 내 곁에 없으니…….ꡓ

말끝을 흐리는 동민의 씁쓸한 미소와 그녀의 놀란 눈빛이 공간을 방황하고 찻집의 깨지는 듯한 음악은 어둑한 틈새를 난무한다.

두 사람 앞에  놓여진 두 잔의 커피는 이미 차갑게 식고 빛깔은 퇴색되어 시간이 흘러갔음을 알리고 있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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