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집(단편)

며늘재 전

돌 박사 2013. 12. 4. 21:31

 

                                                                며늘재 전(傳)

 

아주 오랜 옛날에 화산현 금물산면 월천동에는 지체 높았던 김 진사가 살고 있었다.

본디 김 진사는 사대 문안에 살던 세도가의 집안이었으나 간신배들의 거짓상소로 인하여 삭탈관직당하고 낙향한 병조참판의 아들로서 일찍이 과거에 합격하였으나 부친의 강경한 반대로 관직을 받지 아니하고 초야에 묻혀서 유유자적하며 살고 있는 선비였다.

감진사의 부친은 이곳에 낙향하여 터를 잡고 세상과 담을 쌓고 살다가 세상을 떴다. 김 진사에게는 늦게 얻은 외아들이 있었는데 인물이출중하고 영특하여 화산현의 삼포 대가 댁 규수와 혼인을 하였으나 학문만 하던 쇠약한 몸이라서 그랬는지 2년 도 채 되지 않은 신혼에 슬하에 자식도 두지 못하고 병사하고 말았다.

아내도 먼저 보낸 터에 아들마저 죽으니 큰집에는 풋 새댁인 며느리와 단둘이었다.

화산현 삼포마을에 대대로 선비집안인 김생원의 셋째여식을 며느리로 혼례를 올리고 데려오던 날 혹시 하늘에 선녀가 세상으로 왔나 할 정도로 미모와 행동에 온 마을 사람들이 한동안 말을 못하였을 정도로 절세가인이었다. 거기다가 제사음식을 태워놓고 조상님께 미안해 몸에 좋은 까만 참깨를 뿌려놓았다고 귀신에게 거짓말을 하는 며느리가 아닌 솜씨까지 뛰어나 집안일에는 막힘이 없는 며느리다.

가문이 기울기는 하였으나 대를 이여 집과 농사일을 하고 보살피며 행랑채에 살고 있는 지서방과 그 댁내 그리고 며느리가 시집올 때 데리고 온 곱단이 라는 계집종이 있었으나 집안은 언제나 절간같이 고요하고 적막하기만 하였다.

가끔 김 진사의 헛기침이나 지서방의 장작 패는 소리나 그 댁네가 마당을 쓰는 빗질소리 부엌에서 곱단이가 설거지 하는 소리가 이 집에서 나는 유일한 큰소리였다.

소슬바람이 추수를 마친 들녘에 할 일없이 서있는 허수아비를 놀려대다 그것도 심심했는지 김 진사네 앞마당에 떨어져 널려있는 밤나무 낙엽을 몰고 다닌다. 이 스산한 풍경을 안채 사랑방 들창을 열어놓고 바라보고 있는 며늘아기의 얼굴에 구술 같은 눈물방울이 흐를 것만 같아 아까부터 며늘아기를 먼발치 마당에서 바라보는 감진사의 마음은 짠하기만 하다.

이팔청춘에 청상과부가 된 며늘아기를 어찌해야 한단 말인가? 양반의 사대부집안에서 어찌하는 도리 없이 수절하며 한평생을 홀로 살아가야할 며느리를 생각하면 억장이 무너진다.

유복자라도 자식이나 하나 있다면 그를 낙으로 삼고 살아가라 하겠으나 새파란 새색시가 늙어가는 홀시아버지를 모시고 살아야하는 그 기구한 팔자를 어찌 고쳐 주어야 한단 말인가? 느느니 한숨이요 하느니 헛기침뿐이다.

한이 맺힌 여인의 눈썹 같은 새벽달이 대추나무 가지에 걸려있고 하늘에는 기러기가 길을 떠나고 있었다.

한기를 껴안은 실바람이 밤나무 낙엽을 떨어트리고 지나가다 며느리 방 처마 밑 풍경을 울리는 듯싶었는데 풍경소리 대신 낮은 인기척이 들린다.

김 진사는 잠이 오지 않는 밤이면 마당에 나와 하늘을 처다 보며 오늘의 날씨를 가늠하는 버릇이 아내가 죽고 나서부터 생겼다.

밖으로 나오면 자기도 모르게 며늘아기가 긴긴밤을 독수공방하는 방을 먼발치서 바라보게 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버릇이 되고 말았다.

신경이 곤두섰다. 분명 며늘아기 방에서 나는 소리였다. 김 진사는 조심조심 며늘아기 방 쪽으로 까치발을 옮기는 중에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 하마터면 누구냐? 하고 소리를 지를 뻔 하였으나, 지각 있는 터라 가까스로 정신을 가다듬고 다시 본다. 달빛에 어렴풋이 식별되는 것은 웬 사내가 며늘아기의 방문 고리를 잡아당기며 문열어달라는 나직한 소리였다.

이어 염려스러운 작은 목소리로 “아니 됩니다. 어서 돌아가세요.” 하는 애걸조의 며느리 목소리가 분명하게 들렸다.

“부인 잠깐만 문 좀 열어 주시구려. 할 말이 있으니 어서요?

“뉘신지 모르겠으나 어서 돌아가세요. 나는 죽어도 이집귀신으로 죽어야 할 몸입니다. 어서 돌아가 주세요.”

“부인이 이곳으로 시집오던 날부터 보아온 죽은 칠성이 친구입니다.

친구도 이렇게 간 마당에 내가 부인을 위해서 함께 살고 싶어서 그렇습니다.”

“그런 분이 어찌하여 이렇게 무례한 짓을 한답니까?”

며늘아기의 앙칼진 꾸짖음에도 이미 젖어있는 음색이다.

“물론 멍석말이하여 매 맞아 죽을 짓인 줄 알고 있지만 이렇게 하지 않고는 아니 될 것 같아서요. 우리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멀리 떠나가서 살면 되지 않겠소, 부인!”

아들놈을 아는 사내인 모양이다. 문고리를 잡아 다니며 애원한다.

“자꾸 그러시다 아버님께서 아시면 큰일 납니다. 어찌 그러십니까?”

사내의 몸 달은 소리와 며늘아기의 차분하면서도 혀를 깨무는 인내의 목소리가 늦은 밤 찬 공기를 덥힌다.

김 진사는 숨을 죽이고 오히려 자기가 그들에게 들킬 것을 염려하며 저 사내가 누군지를 생각해 내기에 바빴다.

그러던 사내가 며늘아기가 시아버지를 인식하는 말을 하자 자신이 앞뒤 분간 못하였음에 멈칫하고 잠시주위를 둘러보다 김 진사의 그림자를 인식하고서는 혼비백산하고 뒷걸음쳐서 달아나 버렸다.

다시 적막 속으로 빠져드는 밤 인기척에 놀라 울음을 멈추었던 늦가을의 풀벌레들의 울음소리가 여기저기서 합창으로 이어지는데 젊은 여인의 가슴을 마냥 구멍을 내고 있다.

시집 온지 2년도 채우지 못하고 가버린 남편의 병약한 체질은 젊은 여인의 성숙한 몸부림도 담당하기 어려워했기에 참아왔던 젊음은 타오르다 만 불씨가 되어 잠자고 있었는데 어제오늘 연이여 건장한 사내의 구애에 다시 살아나 조그마한 티 검불만 있다 해도 불이 지펴 연소될 것만 같았다.

여인은 부풀어 오른 젓 무덤을 손바닥으로 누르며 입술을 지그시 깨문다, 꿈인 듯 생시인 듯 건장한 사내의 넓고 뜨거운 가슴으로 한없이 빠져드는 황홀한 운우의 몽정으로 밤을 지새웠다.

 

며늘아기가 들고 들어온 아침밥상을 맞이하면서도 김 진사는 밤잠을 설친 며늘아기의 촉휘한 얼굴을 바로 바라볼 수가 없었다.

“아가 지난밤에는 바람이 벌써 차더구나. 잠은 잘 잤느냐?

“네 아버님 젊은 저야 아무렇지 않지만 아버님께서 몸조심을 하셔야지요. 찬 있는 진지도 제대로 올려드리지 못해서 송구스럽습니다. 나이 드실수록 잘 드셔야 건강을 유지하시는데요.”

효성이 지극하고 사대부집 며느리로서 버릴 것 하나 없고 못 쓸 것 하나 없는 여인이다.

시아버지로서 가슴이 또 찡하게 아려온다.

 

김 진사는 방에서 한동안 움직임 없이 고심하더니 방문을 열고 내다보며 지 서방을 불렀다.

지 서방이 달려오자 방으로 잠깐 들어오라 한다. 하인을 방으로 들어오라고 하는 것이 처음이라 지 서방이 멈칫 멈칫 하자 어서 들어오라 다그친다.

지 서방이 들어가자 방문을 닫게 하고는 한참 뒤에야 지 서방은 방을 나와 마을 밖으로 종종 사라졌다.

며칠 뒤 김 진사는 며느리를 불렀다.

며느리에게 추수도 다 끝났고 집안에 큰일도 없으니 잠시 짬을 내서 친정집에 가서 쉬고 오거라. 화산까지 나도 볼일도 있고 하니 내일 아침 일찍 떠날 것이니 준비 하라 일렀다.

이튿날 며느리와 김 진사는 아침밥을 물리자마자 길을 떠났다. 며느리에게는 며칠간 친정에서 묶으며 보모님께 진지라도 지어드리는 효도를 하고 오라 했기에 조그만 옷 보따리 하나만 들고 나섰고 김 진사 역시 지서방과 곱단이에게 따라 나서지 말고 집에서 일할 것을 당부하고 마을 어귀를 지나 며느리의 친정인 삼포로 간다.

화산현 삼포로 가려면 금물산 줄기인 높은 재를 하나 넘어야 한다. 산이 험준하지는 않으나 거목과 울창한 숲이 우거져서 낮에도 어두컴컴하고 무서워서 가끔은 산적들이나 호랑이가 출몰한다는 이야기도 심심치 않게 나돌고 있는 고개다.

이 재만 없다면 화산 동헌까지 걸어서 한나절 반 정도 걸리고 삼포까지는 해전에는 당도할 수 있는 거리다. 더욱이 연약한 아녀자가 넘어가기는 어려운 산길이라 이 재를 넘을 때는 여럿이 모이면 오가곤 하는 금물산과 화산을 있는 유일한 길이기도 했다.

삼포에 사돈이 되는 정생원은 김 진사와는 오랜 친분으로 잘 아는 터라 여식을 이곳 금물산까지 기꺼이 시집보내준 사람이다. 이에 보답도 못하고 딸이 청상 과부되게 한 김 진사는 볼 면목도 없고 만나기조차 민망한 처지였는데 며늘아기마저 친정에 가는 것을 사양하여 시집오고 근친한번 다녀 온 후 오늘 나들이가 처음이다. 부부가 함께 처가를 간다면 얼마나 즐거울 가를 생각하는지 서너 걸음 뒤따라 땅만을 내려다보며 걸어오는 며느리는 흐르는 눈물을 몰래 훔치는 모습이 보였다.

경사가 아주 가파른 산길이다. 애리한 며늘아기가 작은 나뭇가지를 휘어잡으며 힘겹게 따라 올라온다.

“아가 천천히 오거라 이제 조금만 더 오르면 정상이란다.

“네 아버님 저야 젊은데 아무것도 아니지만 아버님이 힘드시죠? 곱단이 데리고 혼자가도 될 것을 아버님 죄송스럽습니다.”

“무슨 이야기냐 나도 오랜만에 버덩에 좀 구경하러 일부러 가는 건데 아가랑 가니 더없이 든든하구나. 어험!”

김 진사는 착잡한 마음을 헛기침으로 누르며 며늘아기의 모습을 한 번 더 눈여겨 새긴다.

여름에는 하늘이 안보일정도로 우거졌던 나무숲이 군데군데 참나무가 낙엽을 떨구고 있어 훤하게 드러난 산길을 두어 식경 오르니 정상이다.

정상에는 앞마당만한 평평한 터가 있고 네 갈래 길이 뭉쳐있다.

하나는 금물산에서 올라온 길이고 반대쪽은 화산으로 내려가는 길이며 정상 양쪽으로 난 길은 산적들이 살지도 모른다는 도사곡길이고 반대는 원주 감영으로도 갈 수 있다는 산길이다.

“아가 힘들었겠구나. 여기서 쉬었다 가자 이제 내려가는 길은 쉬울 것이다 멀기는 하다만”

“네 아버님 좀 쉬세요. 이럴게 힘든 길을 가마꾼이 저를 태워서 왔으니 그들은 얼마나 힘들었겠어요. 아버님”

“허허 그러게 말이다”

며느리는 조그만 바위 위를 손바닥으로 쓸고 치마를 여미며 걸터앉는다.

김 진사는 나무그루터기에 걸터앉아 장죽에 담배를 담아 부싯돌로 불을 붙이면서도 주위를 연신 둘러보며 무언가 살피고 있는 듯하다.

도사곡길 쪽을 바라보던 김 진사는 초초에서 안심의 얼굴로 바뀌더니 급하게 일어나며 며느리에게 “소피 좀 보고 올 것이라고 말하고는 도사곡길 반대 능선으로 내려가 자취를 감추었다.

며느리에게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소피를 보기위한 것 일게다.

 

해가 뉘엿뉘엿 서산으로 넘어가며 붉은 낙조가 드리워진 월천동 산자락 길에 김 진사는 힘없는 발걸음을 옮겨 마을로 향하고 있다.

기진맥진하여 돌아온 김 진사는 진서방과 곱단에게 일러 며늘아기를 산에서 소피보러간 사이에 잃어버렸다고 했다. 온 마을 장정들이 횃불을 들고 산으로 달려가서 찾았으나 김 진사의 아름다운 청상과부 며느리는 영영 찾지 못하고 말았다.

 

며느리를 친정으로 데리고 가다가 고개정상에서 며느리를 잃어버린 사건이 있은 후 마을에서는 이 고개를 며느리고개라 불렀으며 아름다운 청상과부 며느리와 시아버지에 대한 많은 이야기가 떠돌았다.

시아버지가 소변보러 간 사이에 호랑이가 며느리를 잡아 갔다고 아이들에게 겁주는 이야기가 돌았다. 그런가 하면 산적들이 예쁜 며느리가 탐이 나서 데려다 두목의 각시를 삼았다는 이야기는 동네 여인들의 공공연한 화제가 되기도 했다.

이웃마를 봉로 방에서는 시아버지가 너무 어여쁜 며느리에게 흑심을 품고 덤비자 며느리가 도망갔다는 이야기도 심심치 않게 하기도 했다.

그러나 김 진사가 혼자 사는 며느리 방문을 사내가 열려고 하던 현장을 목격하고 다음날 진 서방을 시켜 사내를 불러오게 하여 그의 사람 됨됨이를 알아보고 며늘아기의 장래를 부탁했으며 사나이에게 멀리 떠나가서 살 수 있는 노자를 마련하여주고 며칠 후 고개정상으로 와서 며느리를 데려가라 당부해 놓았었다. 는 구체적인 이야기도 쉬쉬하며 나돌고 있었다.

세월이 흐르고 흘러가서 바람에 날리며 비에 젖고 눈이 내려 덮여지고 나무가 떨군 낙엽에 쌓여 며느리고개 이야기도 깊이 묻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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