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집(단편)

흙둔지 총각

돌 박사 2016. 9. 17. 20:19

                         흙둔지 총각

                                                    석 도 익

 

조금만 더 올라가면 펑퍼짐하여 드러눕기 딱 좋은 쉬인재 길목이다.

검꼴에서 괘식이로 가는 산길이 길어서 쉬어쉬어 가야한다는 쉬인재 그곳에는 아름드리 노송이 여러 그루 있어서 그늘을 지워주고 널찍한 둔덕에는 금잔디가 깔려있어서 아픈 허리를 펴기 딱 좋은 곳이다.

총각은 오늘 흙둔지 장터에서 팔다 남은 옹기그릇을 엮어서 지게에 짊어지고 숨을 몰아쉬면서 가까스로 쉬인재로 들어서는 길목 들머리까지 쉬지 않고 허위허위 올라와서 지게 멜빵을 벗고 지게작대기로 지게를 안전하게 받쳐놓고 나온다.

이곳에 그를 아는 사람들은 모두 ‘흙둔지 총각’이라고 부른다. 총각의 키는 구척이요 힘은 항우같이 장사다. 총각은 이곳 흙둔지 장터에서 옹기그릇을 팔고 있기 때문에 흙둔지 장에만 가면 볼 수 있었던 총각이라서 그렇게 불러지게 된 것이다.

어느 누구도 그를 다르게 부르지 않았지만. 사실은 괘식이 산골에서 노모와 같이 살고 있는 총각이다.

총각은 결혼 적령기가 지난 노총각이지만 가세도 그렇고 홀시어머니 집에 시집 올려는 처자가 없는 것은 고사하고 매파가 선 듯 나서지 않아서 더벅머리 총각으로 동학란 때 남편을 잃고 청상으로 아들하나만을 바라보며 살고 있는 노모를 모시고 살고 있다.

어려서 부터 구송포 새점말에서 옹기가마를 가지고 항아리며 오지그릇을 만들어 굽는 외삼촌네 집에 가서 옹기가마 잡일을 거들다가 힘이 오른 시기부터는 지게에 옹기그릇을 짊어지고 다니면서도 팔기도 하고 흙둔지 장에서 붙박이 장돌뱅이로 팔기도 해서 가계를 꾸려나간다.

총각이 워낙 기운이 센지라 그의 우직한 지계에 짊어지는 그릇은 큰 장독이 두 개에 작은 항아리 세 개 그리고 그 항아리 안에 동글동글한 요강이 두 개 오지동이가 네 개 뚝배기가 열개 사발 열개 대접 열개 종지가 수무여개정도를 요령 있게 집어넣고 묶어 지게에 올리고 다시 지게 끈으로 단단하게 엮어서 짊어지고 다닌다.

이것들을 장마당에 펼치면 옹기그릇점이 훌륭하게 된다. 그래도 오늘은 큰 항아리며 작은 그릇들을 장마당에서 팔아서 어깨를 짓누르는 무게는 아니었다.

이곳에 진흙이 너무 좋아 흙둔지라고 했듯이 총각 외삼촌네가 원래 이곳에다 옹기점을 차리려 했지만 옹기그릇을 만들어 도처에 내다팔아야 하는데 뱃길이 홍천강 내삼포 와 외삼포가 끝인지라 어쩔 수없이 흙의 질이 떨어지기는 하나 나루터가 있는 구송포 새점말에다 터 잡는 바람에 총각은 오십 여리 길을 등짐지게로 옹기그릇을 져 날라다 팔아야 했다.

짐을 벗어 놓은 그는 흐른 땀을 닦고 나서 담배쌈지를 꺼내서 곰방담뱃대에 담고 부싯돌을 그어댄다. 쇳조각과 차돌이 부딪칠 때마다 마찰음과 함께 작은 불똥이 떡취를 말려서 만든 쏘시개에 붙어 가느다란 연기가 피어난다. 이윽고 입으로 불어서 불씨를 살려 담뱃대에 붙이고 힘껏 빨아 당기자 담배연기가 입안에 가득 고이며 아릿한 흥분감 마저 든다.

“ 휴 ~ ” 담배 연기가 아지랑이 피어나던 언덕으로 안개 같이 흘러간다.

연거푸 담배를 들이빨아 대니 저녁나절 나른한 봄볕은 노란병아리 놀다간 금잔디에서 피어오르던 아지랑이의 현기증처럼 아련하게 잠이 몰려온다.

총각은 잠시 몸을 쉬려고 지게 옆에 비스듬하게 누워 하늘을 바라본다. 뭉게구름이 꽃바람에 실려서 검꼴 쪽으로 비행한다. 검꼴은 밭갈이연장인 보습을 만드는 대장간이 있는 마을이다.

소림광산에서 금이 많이 나온다고 법석이더니 금이 아니라 쇠가 많이 묻혀 있다고 하여 언젠가는 대장간이 아니라 쇠공장이 될 거라는 이야기를 대장장이 김가 영감님이 침이 마르도록 떠벌리면서도 쇠를 다루는 솜씨가 귀신같아 날이 선 보습을 주물로 부어서 몇 개씩 모래에서 뚝딱 꺼내 놓는다. 하지만 총각은 대장장이 말보다는 영감님의 딸인 곱단이를 한 번 더 보는 게 급하다. 다행하게 총각이 갈 때마다 한번쯤은 꼭 곱단이를 보았다,

대장간에는 물을 많이 쓴다. 그 물을 오지동이로 길러 나르는 곱단이가 총각의 주 거래처다.

곱단이는 그의 아버지 말과 같이 데퉁맞아 그런 건지 열흘도리도 물동이를 깨먹는 터에 총각에게는 더없는 행운이다. 오지항아리 하나 팔아보았자 보리쌀 반 되도 안 되는 이윤이지만 곱단이를 한번 보는 건 그 이상의 횡재가 아닐 수 없다. 그야말로 임도보고 뽕도 따는 셈이다.

곱단이도 총각의 마음을 아는 건지 여전히 물동이를 깨먹어 총각을 오게 하고 가끔은 미치도록 밝게 웃어주는가 하면 옹기동이를 만지작거리며 그 많은 그릇을 지고 다니는 총각의 몸뚱이를 은근히 훔쳐보는 모습에 총각은 애간장이 녹아난다.

오늘도 흙둔지 장마당으로 물동이 하나 갔다달라는 전갈을 받고 설레는 마음으로 물 살 센 너분-나들이 여울을 건너서 대장간으로 갔는데 오늘 따라 곱단이는 옷매무새도 예쁘고 오이처럼 가는허리며 능수버들처럼 늘어진 머리에 빨간 갑사댕기를 하늘거리며 총각이 건네준 새 오지동이를 받아들고 들어가다 힐끔 돌려다보며 살짝 웃어 보이는가. 했는데 언제인가 싶게 꽁지가 빠져라 들어가다가 대문턱에 걸려서 새 동이를 한 번도 못써보고 또 깨버렸다.

얼굴이 사색이 된 딸을 바라보며 꾸중도 못하고 혀만 차던 대장장이 영감은 맥 빠지게 흐흐흐 웃다가.

“어이 총각 또 깼네, 내일 하나 더 가져오게나.” 하고 씁쓸하게 들어간다.

봄볕의 나른함이 온 몸을 짓누르고 눈꺼풀이 천근 잠으로 감긴다.

 

노랑나비 하얀 나비가 하늘과 땅을 윤회하듯이 날고 진달래가 울긋불긋 피어나는 천치리 산자락 바위 밑 샘터 우물가에서 옹기 짐을 벗어놓고 물 한 바가지로 갈증 난 목을 축이려 하는데 난데없이 곱단이가 나타나서 물 한바가지를 떠서 총각에게 건너 주는 게 아닌가? 이게 꿈인지 생시인지 분간할 겨를도 없이 총각은 백옥같이 하얀 손끝에서 바가지를 받아들고 쭉 들이켰다.

시원한 물은 목구멍을 적시고 내려가 가슴에 포만감을 준다. 바가지 위로 곱단이를 힐끗 본 총각의 눈이 곱단이 눈과 마주쳤다. 순간 곱단이의 예쁜 쌍꺼풀눈이 찡긋하며 총각을 빨아들였다. 총각의 가슴이 찌릿하고 오장에 열이 나고 정신이 흐릿해지는 느낌이다.

총각은 자신도 모르게 곱단이에게 다가서서 가느다란 허리를 껴안았다.

“아 ~ ”

“곱 ~ 단~”

가슴이 콩닥대고 정신이 아찔해진다.

총각의 거센 힘이 팔뚝의 힘줄에 전해지니 곱단이의 여린 허리가 한줌이 되어 총각의 몸에 비단결같이 달라붙으려는 순간이다.

‘우지직’ 하고 곱단이의 갈비뼈가 부러지는가? 했더니 이어서 ‘~ 쿵쾅 ~’ 하고 배 터지는 소리에 총각이 깜짝 놀라며 나른한 춘몽에서 화들짝 깨어났다.

흙둔지 총각이 꿈속에서 곱단이를 끌어안는다는 것이 지게작대기를 잡아당기자 무거운 지게를 받치고 있던 작대기가 부러지면서 받치고 있던 지게가 쓰러지자 가득 짊어져있던 옹기그릇들이 다 깨진 것이다.

깨져서 나둥그러진 옹기그릇들이 아까운 것 보다는 꿈속에서나마 보고 싶었던 예뿐 곱단이를 품에 안았던 꿈에서 깬 것이 못내 아쉬워 총각은 다시 털썩 주저앉아서 곰방대를 빼물었다.

길게 내뿜은 담배연기가 꿈결에 보았던 곱단이 형상이 그려지다가 하얀 뭉게구름이 떠있는 하늘로 사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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