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칼럼> 존경이란 말이 실종되었다.
소설가 석 도 익
지난날 필자가 서울에서 회의가 있어서 버스를 탔다. 자가용이 별로 많지 않았던 때인지라 이른 아침인데도 직행버스에는 빈 좌석이 없이 가득 차있었다.
버스 중간쯤의 자리에 앉았는데 마침 삼십대 후반쯤의 여인이 여자어린아이를 업고 네다섯 살쯤 되는 사내아이의 손을 잡고 한손에는 무거워 보이는 보따리를 들고 들어와서 차내를 두리번거리다가 마침 비어있는 내 옆자리에 사내아이를 앉게 하고 본인은 의자를 붙들고 서있다.
내가 일어나서 여인의 짐을 받아서 선반에 얹고 사내아이를 내 무릎에 앉히고 여인을 앉으라고 권했다. 어디까지 가는지는 모르겠으나 아이를 업고 서서 가긴 어려울 것 같아서 궁여지책으로 이렇게 한 것이다. 여인은 등에 업은 아이를 내려 안고 옆자리에 앉았다.
버스가 영업소를 떠나서 서울로 힘차게 내달린다. 내 무릎에 앉은 사내아이는 버스를 처음타보는 것인지 연신 몸을 움직이며 밖을 보고 엄마에게 말을 걸며 부산을 떤다. 어린아이라도 무릎에 앉으면 다리가 저리고 아픈데 가만히도 안 있고 연신 좌불안석으로 설쳐대는 것이 내 게 미안했던지 아들에게 가만있으라. 꾸짖는데 그 목소리가 너무 크고 투박해서 내가 미안할 정도였다. 누가 보더라도 내가 그 가족과 관계가 있어 보이기도 했을 것이다.
여인의 모습이나 말투로 가늠해본다면 누가 보더라도 시골 아낙이다. 허름한 의복에 라면파마머리하며 화장기 없는 민얼굴에 학식이나 교양은 몸에 조금도 묻어있지 않은 것 같았다.
여인은 아이를 꾸짖는 말끝마다 “그러면 너의 아버지 욕 먹이는 짓이다” “너는 커서 아버지 반만이라도 해야 한다” 하고 은근히 애 아버지를 들먹였다.
애 아버지가 얼마나 대단한 분이시기에 저러나 싶고 궁금해서, “혹시 애기아버지가 뭐하시는 분인가요?” 하고 물어보았다.
여인은 자랑이라도 하듯이 “얘 아버지는 일곱 집이나 사는 동네에 반장님”이라고 했다. 말하는 것으로 보아서 외진 산골마을에 띄엄띄엄 있는 농가 일곱 가구가 사는 동네 반장 일을 맡아보는 남편을 존경하여 아들에게 거울이 되게 하려고 훈육을 하는 것 같았다.
언제부터인지 대통령도 이름을 막 부르며 욕하고 아이들 선생님까지도 대단히 여기기지 않고 아내를 무시하고 남편을 깎아내리려는 부모의 가정에서 자란 아이들이 무었을 배우겠는가?
현시대에 사는 사람들은 모두 잘난 사람만 있어서 존경할만한 사람이 없으니 “존경한다.”는 말은 사라져가고, 흔해빠진 “사랑 한다” 는 말로 얼버무려지는 작금에 그 시골 여인의 말이 현대의 명심보감이 아니었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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