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도익< 인생칼럼>

문창호지

돌 박사 2022. 5. 31. 19:56



인생칼럼 소설가 석도익
문창호지
7년여 기다림에 허물을 벗고 우화하여 짧은 7일 남짓 생존하는 매미들이 구애 세레나데를 실록의 숲에서 합창하더니, 어느덧 하늘이 높아지고 장독대 주변에는 맨드라미가 붉은 면류관을 쓰고 길가에는 목이긴 코스모스가 가을을 몰고 오는 하늬바람에 흔들리고, 노란 병아리의 솜털 같은 햇살이 개나리 울타리 사이로 기어 들어와 엄동설한 긴긴밤과 무더위 비바람 폭풍을 견디어낸 빗살문 찌든 창호지에 볼을 부비고 있을 때면 앞으로 닥쳐올 동장군을 막아낼 집 단장을 한다.

지붕의 곧은 선 끝이 하늘로 날아 오를듯한 기와집은 절간의 대웅전에 꽃살문이나, 여염집 대청덧문도 쌍바라지 미닫이 빗살문에서부터 크고 작은 문과 창문까지 많기도 하고, 초가집은 장독소래위에 눈이 소복하게 쌓인 모습 같이 포근한 곡선에 정이담긴 지붕아래 소박하게 달린 안방문과 윗방 사랑방문이 걸친 옷도 모두 창호지다.

문짝과 창문을 떼어내 햇빛 고루 널린 앞마당에 가지런히 모아 세우고, 빛바래고 누런 창호지를 깨끗이 뜯어내고, 한지에 풀을 매겨 새로 바르면, 갈바람에 창호지는 어느 결에 마르고 곱디. 고운 마음 같은 순백의 한지는 팽팽하게 당기어지며 미음자 시옷자 꽃살문 빗살문이 곱게 입었다.

거기에다 더 멋지게 치장하는 것이 있으니 사람의 손이 가장 많이 닿는 동그란 문고리가 매달린 부분에 여린 풀잎에 맨드라미꽃을 뜯어 넣어 꽃피우고, 행복의 클로버 잎 또는 코스모스꽃 등으로 그림을 만들고, 그 위에 예쁘게 오린 한지를 덧바르면 한 폭의 자연생화그림 액자가 된다.

우리네 조상님들은 문과 창문에는 닥나무 껍질로 만든 한지로 곱게 발라 멋과 실속을 함께 하며 긴 역사와 삶을 누려왔었다.

물질문명이 발달하고 생활은 편리를 극대화하는 변화 속에 한옥이 줄어들고 서구화된 양옥과 고층 아파트가 숲을 이루며 모든 문과 창문은 단단한 유리로 막아져 이웃을 단절시켜놓고 있다.

투명한 유리의 완전노출이 아니면 불투명유리 장막으로 바람 한 점 소음 한줌도 허용되지 않는 밀폐된 공간을 만들어 놓고, 알지 못하는 고독을 질근질근 씹으며 살고 있지 않은가 싶다.

더구나 안에서는 밖을 훤하게 바라볼 수 있으나 밖에서 안은 보이지 않는 가증스런 유리창을 우리는 선호한다는 사실이다,

지난날 우리네 문과 창문은 한지로 발라서 유랑하는 나그네바람의 넋두리도 간간이 들을 수 있었고, 이슬비 종알대는 소리 귓가에 담아보기도 하고, 싸락눈 내리는 소리가 임의 발자국 소리 같아 마음 설레어 밤을 지새우기도 했다.

동장군 칼바람 휘몰아쳐 문풍지 서럽게 울리는 소리에 사람 그리움도 살 갚게 느끼며, 내 집의 소중함을 다시 생각해보는 행복감에 더없이 가슴 따듯하였다.

불 켜진 방안에 다정한 가족들의 그림자가 비춰 행복하게 보이고, 도란도란 말소리도 고즈넉하게 들려와 정감을 느끼게 하던 이웃의 풍경이다. 대문 앞에서 큰기침만 두어 번 하여도 알아차리고 반기던 우리네가 아니던가, 지금에 생각하니 이게 다 한지로 문창호 바르고 살았던 때문이 아니었나 싶다.

혼례 치룬 첫날밤, 신방을 훔쳐보려는 젊은 여인들이 손가락 끝에 침 발라 뚫어놓고 들여다보는 짓 굳고 해학적인 장난도 먼 옛날얘기가 되었다.

빗살문 촘촘한 쌍바라지 문에 어른거리는 달그림자 벗 삼아 담돌 밑에서 울어대는 가을풀벌레 노래 소리를 밤새워 듣고 싶다. 밖에 찬바람을 살짝 바꾸어 온화한 공기로 받아들여 놓는 한지의 멋을 잊어 가는 세월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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