넓은 내(洪川) 범파정(泛波亭) 복원을 그리다
소설가 석 도 익
(사진은 북방면 능평리 능들 양효정)
동쪽에서 서쪽으로, 시내 중심을 가로지르며 흐르는 넓은 내(洪川)가있는 홍천은 다툼이 없음으로, 관리들이 편하게 정사를 볼 수 있어, 와치현(臥治縣)이라 했듯이, 순민들이 천년의 역사를 이루어 오며, 찬란한 문화예술을 생성하고, 보존해 왔음이 하화계리 선사유적지와 내촌면에 물걸 사지에서 출토된 유물들을 보아도 알 수 있다.
불교문화로 삶이 융성하고, 동학으로 의를 세우고, 유학으로 충효를 지키며, 위민지도자가 많았는가 하면, 주민은 화합 단결하였던 홍천은 충절의 고장이며, 시동(詩洞) 마을까지 있어 시인묵객의 발길이 전국에서 모여들던 문향이기도 하였다.
이같이 자랑스러운 홍천에 살면서, 훗날 우리들의 보람된 자취를 어떻게 남길 것인가 생각해 본다면, 우리는 지금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를 고민하지 않을 수 없다.
찬란한 홍천지방문화역사의 지난 천년에 자취를 찾아 보존함으로서 우리 후세들의 삶에 자원이 되고, 이정표가 되도록 해야 할 사명이 우리에게 있다. 천년의 자산과 유산을 그냥 세월 속에 묻어지게 할 수는 없다
홍천에는 출중한 인재가 많았을 것임에도 제대로 기록에나 구전에서 찾아내지 못한 인적자원이며, 기록되지 못해 이야기로 묻혀버린 역사적 사건과 유적 유물 또한 있을 것이다. 찾아내고 복원하여 후세까지 길이 전해주어야 할 것이며, 또한 유적지나 설화의 대상지 등은 현대화에 묻혀버리고 사라지고 그늘에 가려지고 있음으로, 우선 표지석이라도 세워야 할 것이다. 지체하고 있다가는 흔적도 없이 영원히 사라질 지도 모를 귀중한 유산들인 것이다.
홍천은 과거에서부터 강원도 18개 시 군중에서도 무엇으로라도 뒤처지지 않던 고장이었다고 기억하고 있는데, 지방자치가 되면서 문화예술에 근간을 두고 삶의 질을 향상하고 자기고장의 품격과 위상을 정립하여 선진지역으로 발 빠르게 발전해가고 있는 지방화현실에 우리고장은 문화예술부분에서는 뒤쳐져 있는 듯하다.
선사시대 유물이 하화계리에서 발굴되었지만 타 지역 박물관에서 전시되고 있는가 하면 우리고장 문화예술인들이 전국을 무대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지만 막상 내 고장에서는 그 이름조차 생소하게 느껴지게 되는 것은 그 부분에 우리들이 제몫의 일을 못하고 있는 것 아닌가 싶다.
홍천의 자연풍광은 산자수명(山紫水明)하다고 말할 수 있다. 이러한 자연적 환경을 지닌 홍천에 누각이나 정자가 없을 수 없다. 조선의 문화역사서라고 할 수 있는 ‘신증동국여지승람’에도 학명루(鶴鳴樓)와 범파정(泛波亭) 기록이 나와 있다. 그러나 아쉽게도 현재 홍천에는 이름 있는 누정(樓亭)이 남아있지 않다.
천년 홍천현의 동헌이 어디쯤에 자리하고 있었었는지 현민의 소리를 경청하던 학명루(鶴鳴樓)는 어디 있었고 시인묵객이 홍천의 아름다움을 노래하던 범파정(泛波亭) 또한 어느 곳에 있었는지 표지석 하나 없어 구전으로 찾아내야 할 판이다.
(아래는 인터넷에서 발췌함)
범파정은 홍천읍 갈마곡리에 있었던 정자였다고 한다. 강원도지에는 객관 앞에 있었다고 하고, 홍천현읍지에는 현의 관아 동쪽 2리에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범파정은 대동여지도에도 이름이 남아 있으며, 여기에다 남아 있는 문헌들을 덧대어 살펴보았을 때 북쪽에서 흘러드는 군업천과 홍천 동면에서 흘러나오는 성정천이 만나 합수를 이루는 지역 아래이거나 성정천 끝자락 변에 위치하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亭下澄江亭上山(정하징강정상산) 정자아랜 맑은 물 정자 윈 푸른 산이라
曲欄人倚翠微間(곡란인의취미간) 굽은 난간에 기대니 푸른빛으로 물든다.
幽情遠峀孤雲出(유정원수고운출) 깊은 정은 먼 산에서 피어나는 조각구름
倦意長空獨鳥還(권의장공독조환) 지친 생각은 먼 창공에서 돌아오는 외짝 새.
塵土幾年愁迫隘(진토기년수박애) 흙먼지 속 몇 년을 근심으로 쫓기다가
仙區此日喜寬閒(선구차일희관한) 선경(仙境)에 선 오늘 여유로워 즐겁다.
南橋鶴去烟莎綠(남교학거연사록) 남교엔 학이 가고 푸른 향풀은 흐릿하니
立望淸都窓莫攀(입망청도창막반) 서서 청도를 바라보나 슬프게도 오를 길 없어라.
< 범파정 벽면의 운자로 짓다(次泛波亭壁上韻) 한원진(韓元震)> 남당(南塘) 한원진(韓元震 1682 -1751)은 성리학자로 그 학문적 연원은 율곡(栗谷) 이이(李珥)에 맞닿아 있는 인물이다. 이 시는 남당이 불혹(不惑) 중반기인 45세 때(1726년 11월쯤)에 홍천을 방문, 범파정에 올라 지은 것이다. 이 시는 각 구절마다 한자씩의 시안(詩眼)을 두고 있는데, 시안을 순서대로 늘어놓으면 징(澄 : 깨끗함) - 취(翠 : 푸름) - 고(孤 : 외로움) - 독(獨 : 외로움) - 수(愁 : 근심) - 희(喜 : 즐거움) - 거(去 : 떠남) - 창(心변+長: 슬픔)이다. 이를 정리하면 산수(山水)가 절묘하게 어우러진 범파정은 깨끗하여 그곳에 있으면 그 푸른빛이 몸 속으로 스며들어온다. 이러한 곳에서 자신을 바라보니 먼 산에서 피어나는 한 조각구름이며 창공을 배회하는 짝 없는 새와 다를 것이 없다. 그것은 말 그대로 고독(孤獨)이다. 여기에 흙먼지로 뒤덮인 세상일에 쫓기다가 범파정에 올라서니, 이곳은 신선이 사는 지역으로 여유가 있으며 즐겁기만 하다. 그러나 이렇게 머물러 있을 수 있는 처지만은 아니어서 현실로 돌아 가야한다. 학이 떠나고 신선세계의 향취도 흐릿해지며 청도(淸都 : 신선세계)는 멀어져간다. 이 시는 개인의 심사와 범파정의 아름다움을 대비시켰다고 할 수 있다. 범파정이 지어져 그곳에서 산자수명(山紫水明)한 홍천의 자연풍광을 감상하며, 인간이 자연을 지배하려한 탐악한 폭군이 아닌 자연의 한 부분임을 깨달았던 남당의 생각을 되새기고 싶다. 허준구 <강원대·한림대 강사>
홍천현(洪川縣)의 학명루(鶴鳴樓)에 대한 기문
서거정(徐居正, 1420년~ 1488년)은 조선 문종, 세조, 성종 때의 문신이며 학자이다)
나는 어려서 영서(嶺西)에 유학하면서, 원주에서 춘천으로 갈 때에 재차홍천을 지나다녔다. 그때에 그 고을이 그윽하고 밝으며 산수가 맑고 기이하며 백성이 많고 물산이 풍부하며 나무들이 울창한 것을 보고 흐뭇해하면서, 한편으로는 한번 올라가서 경치를 감상할 누대가 없는 것을 안타깝게 여겼다.
정통무진년(1448,세종30)봄에 윤후(尹侯)가 선발되어 수령으로 왔는데, 한 달도 안 되어 정사가 매우 잘 이루어 졌다. 3년째가 되던 경오년(1450,문종즉위년)가을에 비로소 객관의 동쪽에 누대를 세우고 그 누대 앞으로 못을 파고 연꽃을 심어, 공무를 보는 여가에 올라가 경치를 둘러보면서 답답한 마음을 풀곤 하였다.
하루는 고을의 노인들을 불러 잔치를 베풀며 낙성식을 하고, 누대의 이름을 어떻게 지을까를 물었다. 노인들이 말하기를, “객관 앞 수 십 걸음쯤 되는 곳에 옛날에 학교(鶴橋)라는 다리가 있었습니다. 처음다리가 이루어졌을 때에 학이 와서 울었는데, 그것으로 이름을 삼은 것입니다. 학은 우리고을의 상서입니다. 이것으로 이름을 붙이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여, 윤후가 그 말을 따랐다.
안평대군(安平大君)이‘학명루(鶴鳴樓)’라는 세 글자 편액을 써서 누각을 빛나게 했다.
이해겨울에 윤후가 서울에 와서 나에게 말하기를, “대저《춘추》에 토목공사는 반드시 기록하였는데 그것은 백성의 일을 중요하게여긴 것입니다. 지금 우리수령들은 대부분 백성을 고생시키고 군중을 동원하며 어려운 때인데도 호사스러운 일을 벌입니다. 누대하나를 세우거나 정자하나를 세우면, 반드시 장황하게 써서 일과능력을 떠벌리니, 이것이 무슨 의리 입니까? 나는 이러한 이름을 싫어합니다. 다만 그대는 과대하게 칭찬하는 자가 아니기 때문에, 누대가 지어진 내력이나 기록해두려고 한 마디 해주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하였다. 내가 그 말을 듣고 아름답게 여겼다. 이어 그를 위해 다음과 같이 글을 짓는다.
“대저누관을 짓는 것은 단지 보기에 아름답게 하려는 것만은 아니다. 그 것 으로 왕인(王人)을 높이고 빈객을 접대하며 시절을 점치고 농작을 살펴, 백성과 더블어함께 즐기려는 뜻을 붙인 것이니, 어찌 작은 일로여길 수 있겠는가. 하물며 누관이 보수되느냐 황폐해지느냐 하는 것은 한 고을이 흥성하는지 쇠퇴하는지가 그것에 연관되며, 한 고을이 흥성하느냐 쇠퇴하느냐 하는 것은 수령이 현능한지 그렇지 못한 지가 그것에 관련된다. 대체 누가 이것을 하찮은 일로여길 수 있겠는가. 일으킨 공사가 어떤 것인지를 보아야할 뿐이다. 윤후는 이번 일을 하면서 재물을 손상하지도 않았고 때를 어기지도 않았다. 그리하여 ‘백성을 부리기를 때에 맞게 한다.’ 라는《춘추》의 뜻을 깊이 체득하였으니, 성인이 포폄한 사례로 볼 때에, 마땅히 크게 특별히 적어서 찬미해야 할 일이다. 내가 사양하고자 한들 될 수 있겠는가. 지금 윤후의 말 한 마디를 들어보니 윤후의 사람됨이 더욱 미덥다. 내 또 들으니,《시경》에, ‘학이 구고(九皐)에서 우니 소리가 하늘에 까지 들린다.’ 하였다. 구고는 매우 깊숙한 곳이고, 구천(九天)은 매우 광활하고 먼 곳이다. 참으로 지극하면, 아주 깊숙한 곳에서도 오히려 광활하고 먼 곳에까지 도달하는 것이다. 이제 홍천이 비록 작은 고을이지만 윤후의 명성이 이와 같이 빛나니, 끝내는 틀림없이 온 나라에 소문이 날것이고 군주에게까지 알려져 부름을 받아, 높은 벼슬에 올라 한 시대에 이름을 날릴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이렇게 되면 윤후가 누대에 그러한 이름을 붙인 것이 어찌 더욱 징험이 있지 않겠는가. 윤후는 시서(詩書)에 능통하고 문아(文雅)를 좋아하는 통달한 사람이다. 그러므로《시경》과《춘추》에 있는 말을 아울러 써서 기문을 짓는다.” 경오년(1450,문종즉위년)겨울. 四佳亭
범파정에는 전국의 시인묵객이 찾아와 그 아름다운 풍광을 글로써 그려낸 작품이 전국에서 많이 발견되어 홍천의 역사를 풍요롭게 하였고. 학명루 또한 시류에 현정을 논하여 태평세월이 흘러가길 어언~ 이제 그 흔적조차 지워져 가고 있다.
학이 날아들었다는 학명루터는 연못이 메워지고 웅장한 건물이 들어서 학명루는 복원하기 요원하니 표지석이라도 세웠으면 하는 바람이나, 조선 당대 석학들과 시인묵객이 찾아왔던 범파정 만은 복원하여 옛 홍천의 역사를 찾아, 풍류와 시가 생성되어 흐르는 곳으로 만들었으면 하는 소원을, 홍천에 옛 풍류의 한시를 잃지 않고 이어가고 있는 추강 유병규 (秋江 柳炳圭)어르신을 필두로 여러 유생 분들과 홍천을 아끼는 많은 분들의 당부로 이글을 올린다.
이는 서거정 고학자(高學者)가 앞에서도 말했듯이 지역융성을 위하여 이루려는 것이지 호화스러운 낭비가 아님을 이미 설하였다. 이제 홍천의 문화와 역사 그리고 선조들의 얼을 이어가서 다시천년의 역사를 이루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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