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고장 넓은 내(洪川)이야기

척야산문화수목원을 찾은 강원대학교 역대 총장님들과

돌 박사 2019. 5. 9. 09:06

    


 강원대학교 하서현 제6대(1996~2000년)총장을 비롯 박용수 제7대(2000~2004년) 총장,권영중 제9대(2008~2012년) 총장은 3·1운동 및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아 6일 부인들과 함께 홍천 내촌면 동창마을에 위치한 척야산문화수목원을 찾아 잊혀져 가는 민족 정기를 되새겨 보는 소중한 시간을 가졌다.

이날 김창묵(98) 동창만세운동기념사업회장은 총장 일행을 맞이하며 함께 민족정기 광장을 둘러봤다. 

김창묵 회장은 총장 일행의 내방을 받는 자리에서 “3명의 전 대학교 총장이 수목원을 방문한 것 자체가 지역에서는 큰 뉴스”라며 척야산 문화수목원 조성배경,대한민국만세 수중 암각 발견,내촌면에서 3·1운동 전개 등에 대해 설명하며 지속적인 관심을 당부했다.


김창묵 회장과 두터운 친분을 유지하고 있는 황재국 전 강원대 교수도 총장일행단과 함께 수목원을 구경하며 다양한 비석이 세워진 유래를 설명하는 문화도우미를 자처했다. (강원도민일보 5월 6일자)


강원대학교 황재국 교수와 총장님들, 동행한 사모님들 그리고 홍봉기  전 홍천군의회 의장  석도익 소설가  신은식 내촌면 번영회장 강원도민일보 유주현 기자 신아일보 조덕경 기자  등은 수목원에  오르기에 앞서, 준비한 다과를 들며 척야산 수목원 조성과 현재까지 이룩한 만세운동기념 사업에 관한 김창묵 회장님의 이야기를 경청하고 환담을 나누다.

▲ 하서현·박용수·권영중 전 강원대 총장은 6일 부인들과 함께 홍천 내촌면 동창마을에 위치한 척야산문화수목원을 방문했다.

척야산 문화공원의 상징인 민족정기 광장에서  ㅡ

민족정기 광장의 윗쪽에 위치한 위대한 역사광장 ㅡ

왼편에 발해석등을 그대로 재현한 것이다.  현재 발해의 수도였던 상경성의 절터에 우뚝 서 있다. 지금은 청나라 시대에 건립된 흥륭사라는 절이 박물관으로 변해 있지만 발해 시대만 해도 이 절은 규모가 상당했을 것이다.  당시만 해도 높이가 무려 6.4미터였다고 하니 광개토대왕릉비(6.39미터)와 같고 화엄사 각황전 석등(6.36미터)보다 컸다. 이 석등이 발해의 번영을 가져온 우리 역사의 자취를 이곳 척야산 문화공원 역사인물광장에  광개토왕릉비와 함께 세워서 우리의 위대한 역사를 재현하려고 직접 현지에서 같은 재질의 돌로 제작해 왔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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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묵 회장이 이루어 놓은  일에 대하여 알고 있는 황교수는 제작 사연을  일일이 설명하고 있다. 척야산수목원에는 황교수가 직접 쓴 명필도 곳곳에서 많이 볼수 있다.

가슴 부풀게 하는 위대한 우리역사의 자취를 보면 볼수록 어깨가 올라가는 듯 하다.

김창묵 회장님이 발해 석등과 그곳에서 수집해온 돌에대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지금 생각해도 "그 때 하지 못했으면 영원히 하기 힘들었던 일"이라고 회상한다.

이 돌에 대한 설명을 써놓아야 하는데 만약 귀한 것이라고  알려지면 몰지각한 사람이 가져갈 염려 때문에 아무것도 표시하지 못했다고 하며 김회장님은  씁쓸하게 웃는다.

이 광장에는 우리 역사를 빗낸 위인분들의 행적을 기록한 비들이 질서있게 배치되어 있다. 안중근의사. 이순신 장군 등.  석학들의 문장과 서예로 . . . .조명하였다.

황교수님의 해설이 있어서 가치를 더 해준다. 총장님들도 여기서는 배움으로 진지하다.

척야산 - 높지도 않고 험하지도 않은 - 독립운동을 하다가 왜경의 수배를 피해 숨어서 마을에 동정을 살피며 꺼져가는 국운을 살리려고 골몰했을 곳이다.

                                 

자연인듯 공원인듯 전혀 이질감 없이 조성된 자연을 자연답게 만든 척야산 수목원이 일상에 찌든 마음까지 쉬게한다.

                                 

봄인지 여름인지 가을인지 다문다문 섞인 색깔은 계절을 혼합한 기술인가? 그래도 모두가 아름다운 채색은 자연의 몫이려니 . . .

오늘 따라 경향각지에서 온 상춘객들로 산길 교통이 마비될것 같은데 이 수목원을 자신이 직접 사비로 만들고 지금까지 무료로 구경 할 수 있게 하는, 백수가 되신 김창묵 회장님은 마음이 흡족하단다. 이곳에 투자된 자금은 큰 회사의 자본금만 할 것이다. 그 보다도 30여년을 손발이 닳도록 쏫아부은 땀과 노고에 경의를 표하지 않을 수 없다.

때론 나홀로 훌쩍 자연의 미로속으로 숨어버리고 싶을 만한 미로의 통로도 많이 있다.  젊은이 들이 밀어를 나눌 수도 있을만한 곳이다.

황재국 교수의 피톤치드에 대한 강의?

청로봉에 호젓이 서있는 청로각이 보인다.  동창들에서 바라보이는 아름다운 정자다. 진달래 산벗꽃으로 뒤덮인 곳인데 진달래 산벗꽃은 소임을 다하고 낙회된 뒤다. 


청로각 오르기 중간에 척야산 진달래라는 노래비가 있다. 국민가수 이미자가 부른 이 노래는 김창묵 회장의 부탁으로 만들고 부른 것인데 노래비를 진달래 군락지인 이곳에 세웠다. 이 노래 말고도 홍천에 관한 노래를 작사작곡하게 하여 국내 유명가수가 불러준 노래가 14여 곡이 있다. 그 중에는 주현미의 노래 "홍천으로 오세요"가 홍천군민들의 인기를 모으고 있다. 



동학혁명운동에 장두로 가담하고 동창기미만세운동을 주도한 김덕원 의사의 제당이다. 그는 이곳에서 낮이면 왜경의 눈을피해 숨어있었다는 곳이라고도 한다.


청로각 위에서 내려본 동편에 용호강이다. 중간 산자락이 척야산 정상에서 내려오는 길이다. 천천히 둘러보며 돌아오면 빠르게 1시간 늦으면  2시간 쯤이면 넉넉하다.

청로각 위에서 내려다 보이는 내촌면 물걸리 만세운동을 하던 동창들이다. 이 곳에서 독립만세운동을 하다 쫏기는 몸으로 숨어살며 마을 동정을 살피던 곳일 것이다.

청로봉에서 내려다 본 용호강 이 강에 보둑을 막고 산길과 바위를 깨내서 보를 만들고 물길내서 동창들을 옥토로 바꾸는 대 역사를 만든 사람이 낙향한 경주김씨 후손 김군보 라는 사람이다. 당시 개인으로 농경문화에 선구자 역을 해낸 것 또한 홍천에 큰 농경문화 역사다. 



 청로각 위에 올라  애국애족에 현장 민족정신과 민족정기가 서린 곳에서 다 함께 만세삼창을 했다. " 대한민국 만세!"

빠르게 흘러가는 시간을 아쉬워하며 정상 여러곳을 오르지 못하고 내려와서 나라꽃 무궁화를 심는 기념식수를 했다. 민족정기가 깃든 민족광장 한편에,




척야산자락 을 휘감돌고 흘러가는 벼락바위 밑으로 길을 낸, 남강로를 따라 김군보 보를 끼고 300여 미터 가다보면 서석면 수하리 용호터 마을이다.

이 마을 외진곳 냇가에 최근에 발견되에 화제가 되고 있는 "대한민국 만세"라고 새겨져 있는 암각바위가 있다.

마을에서 외지고 물이깊은 이곳에 조금 드러나 있는 바위에 새겨진 대한민국만세 바위

아마도 대한민국이란 국호를 쓴것으로 보아 임시정부가 수립된 시기일 것이다.

이곳에서 윗쪽 산굽이가 진 외진 곳에 도깨비집이라는 곳이 있다. 일제 강점기 기미년 동창만세운동을 주도했던 김덕원 의사가 수배자의 몸으로 3년간이나  고물다락방에서  숨어 살았던 곳이 있다.

아마도 수배자의 몸으로 항일에 울분과 구국의 노력을 이곳 냇가에 와서 바위뒤 물에 몸을 숨기고 앉아서 돌에 대한만국만세 라는 글자를 새기지 않았나 추측 할 수 있다. 후세 사람들에게 남기고 싶은 메세지였을 것이기도 하다.

황재국 교수가 직접 탁본한 것을 보여주고 있다. 탁본에도 선명하게 찍힌 "대한민국만세"다.


이 곳이 암각바위가 있는 산모퉁이를 돌아와서 위치한 용호터 도깨비 집이다. 이 부엌 고물다락방에 숨어서 3년을 지낸 김덕원의사다. 다락방에서 나는 소리를 도깨비가 그런다고 주인인 연규환 부인이 둘러대서 마을 사람들은 이 집을 도깨비집이라 하게 되었고, 집이 헐리자 도깨비 터라고 전해내려 왔다고 한다. 지금도 마을사람들은 도깨비터라 하는데 김창묵 회장이 독립만세기념사업의 일환으로 새로 집을 복원해 지었는데 초가집이었지만 관리하기에 어려움이 있어 기와를 올리게 되었다고 한다. 

이 곳에 여러 용도로 쓰일 교육관을 건립해 놓았다. 이곳을 이용하는 단체들이 사용 할 수있게 계획된 강의실 또는 세미나실로 쓰일 회관이다.

전면에서 바라보는 도깨비집이다.

측면에서 보면 행낭채는 당시 마을청년들이 밤에 모여서 야경을 돌던 야경방이였으니. 안채 고물다락에 숨어있던 의사의 마음은 얼마나 불안했을까?  그가 이 집에 살고있던 도깨비였다.  김덕원 의사가 도깨비 주인공이 된 이야기다.  

황교수님의 현대판 도깨비전 이야기다.

교육관 주변 경관을 만들기위해  지금도 조경이 한창이다. 멋진 민족정신함양 교육관이 될것이다.



국내에서도 보기드문 거대한 석비다. 김덕원 의사의 추모의 글 이 장문으로 기록되어 있다.

김창묵 회장님이 이곳에 지난날 이야기인  김덕원 의사와 이를 3년간이나 고물다락에 숨겨준 연규환 내외분에 대해 자세한 설명이 이어졌다.

이곳은 지난날 김덕원 의사의 집근처에 있는 동산으로 수하리 도로변에 위치한 뽀죽하게 솟아오른 봉으로 앙천봉이라 부르기로 했다. 김덕원 의사가 이 산위에 올라 하늘을 우러러 나라의 독립을 염원하며 통곡했다고, 하는 곳이기 때문이다.

앙천봉 입구부터 그때 피토하던 울부짓음이 들리는듯이 붉게 연산홍 꽃으로 물들었다


젊은이들의 발걸음으로도 오르기 힘든 경사로다. 이곳에 이러한 시설을 한다는 것이 여간 힘들지 않았을 것인데 어떤장비로 했을까 했는데 나무과 나무를 연결해 로프를 매고 장비를 이용해 올렸단다.  김창묵회장의 민족정신에 열정이 아니고는 이루어 내지 못했을  일이다.

 나훈아의 "이소원을 잊지말아주오" 라는 노래비가 세워져 있다. 김의사가 이곳에 올라 독립을 염원하던 소원을 노래한 것인데 나훈아는 내용을 듣고 노래를 부르는 것을 영광이라 하고, 오히려 비를 세우는데 자비를 기꺼이 출연하여 세웠다는 이야기를 황교수가 전한다.



앙천루에 올라보면 저멀리 아미산이 보이고 아미산 고든골에는 동학군이 진을치고 후일을 도모하던 곳이다. 아마도 동학교도의 장두였던 김의사는 이 산에 올라 험한 지세를 이용해 수배자로 몸을 숨기기도 하고 동학군인 그들과 연락하며 제2의 독립만세를 계획했을 것이라 추측해 본다. 

이곳은 척야산 뒷편 산을 오르는 입구이기도 하고 반대쪽에서 오른사람들이 내려오는 길이기도 한 길모퉁이 작은 공원이다..

함께하신 분들이 젊은 시절이 아니라 다리도 아프고 잠시 작은 공원에서 쉬면서. . . .

하서현 전 총장의 글로 세운 비 앞에서 부인과 나란히 서서 지난 일을 회고하며 앵글에 담는다.                       

함께 장시간 높고 낮은 산과 강을 돌아 온 분들이 젊은 시절을 지난지라 끝으로 편히 앉아서 숨을 고르기로 하고 도원정을 찾았다. 도원정 옆에 조성한 잔디광장이 더 자연스러워 이곳에 널자리 펴고 식탁에 앉아 총장 사모님들께서 준비해온 떡과 과일을 나눈다. 적당히 경사진 잔디광장은 마음을 눞혀도 될 장소와도 같았다.


                                 

척야산 수목원을 보고 즐기며 지나 가다가 김창묵 회장님을 보고 발걸음을 멈추었다는 그림을 하는 여인들과 기념사진 한장. 이분들이 가장 존경하고 고맙게 생각하고 있다고 말하는데 그간 힘들었던 일과 암담했던 기념사업을 해오면서 느꼈던 피곤이 사라지는 듯 하시다는 노 회장님의 미소가 넉넉하다.

해넘이 서산에 낙조가 아름답게 그려진다. 이 화가 여인들이 그린 그림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