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생 칼럼 >
요지경 세태(世態)
소설가 석 도 익
우리집안 조상님들은 권력이나 재력이 없어서인지 선산하나 마련하지 못한 터라 묘소가 여기 저기 산재해 있다. 해마다 벌초를 하려면 손 귀한 집 5대독자 아버지께서 우리형제를 많이 두셔서 아들, 조카, 손주들까지 다모이면 소대 인원이 이른 새벽부터 시작한다.
마지막 늦더위는 벌초하는 사람을 땀 빼고 지치게 만든다. 힘들어하는 아이들을 어르고 칭찬하며 안산묘소에 벌초를 끝내고 다음 산으로 이동하는 중에 잠시 마을 어귀 느티나무 정자에서 쉬고 있는 중이다.
느티나무 그늘아래 평상에는 이 마을 노인 세분이 장기를 두고 계셨다. 한삼모시옷을 정갈하게 차려입으신 분과 손주의 학교체육복을 입으신 분이 대결을 하고, 몸집이 우람하고 목소리가 큰 분은 옆에서 훈수를 두고 계셨다. 우리 일행을 힐끗힐끗 보며 훈수가 아닌 벌초이야기를 하신다. 장기를 두면서도 벌초라는 주제로 세분이 한마디씩 분담이나 한 듯이 이야기를 주고받는다.
“ 애들까지 함께 온 것을 보면 용역업체 사람들이 아니네 그려”
“ 요새는 벌초대행용역업체가 있어서 돈을 잘 번다는데. 저렇게 모여서 함께 벌초를 하니 화목한 집안 같아 보여 참 보기 좋네.”
“메뚜기도 한철이지, 어제도 용역 맡은 묘를 못 찾아 헤매는 걸 봤는데 잘못하다 엉뚱한 묘지를 깎는 수도 있다고 하데.”
“그렇겠지 왜 아니겠어. 매년 찾아와 벌초를 하는 자기네 묘도 헷갈릴 때가 있는데 이야기만 듣고 남의 묘를 찾기가 어디 그리 쉽겠어? 벌초하기 전에 사진을 찍어 두고 끝낸 후 다시 찍어 사진을 전송해 주어야 한다니 그것도 쉬운 일이 아니지. “
“돈을 주고 조상의 묘 벌초를 남에게 시키는 세월이 되었으니 세상 참 많이 변했네.”
“양지골 우리 밭 위에 있는 묘도 언젠 부터인지 벌초를 하지 않아 보기 싫기에 내가 밭둑을 깎다가 벌초를 해주었는데 이제는 힘에 부쳐 그만두어야 할 것 같네.”
“그 집안이 옛날에는 잘나가던 집안이었다던데?
“무슨 소리야 자네는 아직도 요즈음 세태를 영 모르는군. 집안에 손이 끊겼으면 몰라도 묘지가 묶는 집은 아주 잘나가는 집안이라네.”
“그건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야?”
“생각해봐 자식들이 출세해서 외국에 나가살면 벌초하러 오겠어? 그러니 잘된 집안에 묘는 벌초를 못해서 묶거나 벌초대행 용역을 주니 그게 명당에 자리 잡은 거란 말일세.”
“이제 저 집안처럼 모두모여 벌초를 하는 집은 드물지. 돈이 많은 집이나 출세한 사람이 많으면 벌초하러 못 오는 사람이 많아지니까”
“지금은 워낙에 바쁜 세상이라서 벌초를 하려해도 집안이 다모이지 못해요. 일없는 사람들이나 올까? 요새 젊은 애들은 휴일에 놀러 가면서 바쁘다고 안 온 다지?”
“하긴 우리 손주 놈들도 그런 핑계대고 오지 않더군. 부모야 자식들 편한 거 나무라지 못하고”
“오면 뭐하나 풀 한포기 깎지 못하고 그늘에 앉았다 가도 피곤하다는 놈들, 예초기 안 나왔다면 큰일 날 뻔 했어”
“누가 아니래 처음에 애들이 예초기로 벌초를 할 때는 조상님께 죄스러웠는데 이제는 예초기 없으면 못해”
“그러게 세상 변하는 대로 따라가야 하는 걸세”
“추석이나 설 명절에 차례도 대신해주는 대행업체가 있다면서?”
“그런 게 있대나 봐. 돈만주면 차례 상 차려주고, 절에서는 합동으로 차례도 지내 준대.”
“자식들은 뭐하고?”
“노는 날이 많으니 외국으로 놀러가지. 다 조상들 음덕으로 잘 살게 된 집안사람들이 누리는 특권이 아니겠나?”
“못난 자식이 효도한다는 옛말이 맞나보네”
“그럼 자네 말대로라면 저 집안은 못 가르치고 유산도 물려받지 못한 자손이란 말인가 ”
“…….”
시간이 없어 세분 노인들의 이야기를 다 엿듣지 못하고 다음 산을 오르려고 떠나는 우리 등 뒤에. 덮치는 말이 예초기의 무계보다 더 무겁게 누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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