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 작품

개성! 찬란했던 오백년을 묻어버리고

돌 박사 2008. 7. 4. 23:38
 

 

 

 

     오백년의 세월을 묻어버리고

                                                                                   석 도 익

 

고려 오백년 찬란했던 역사의 땅

  오백년 도읍지를 필마로 돌아드니 산천은 의구한데 인걸은 간데없고…….

오늘 이 순간  초등학교 때 읽은 기억으로 이 시조를 떠올리며 개성 시내를 바라보고 있다. 내가 알 수 없는 지나간 시대, 사극에서나 묘사되던 지역이다.

  내가 군 생활을 하던 1970년대, 전방 중부전선 비무장 지대지피에서 대북방송을 하면서 망원경으로 바라보면 어렴프시 보이던 적진 속에 가장 가까운 도시를 이렇게 우리 관광버스로 돌아 볼 줄 어찌 알았으랴!  깊은 감회에 젖어든다.

 지난날 총구를 겨누고 긴장하며 바라보던 북녘 땅으로 간다. 경의선도로 (임진강 역 부근)에 설치된 남북출입사무소에서 간단한 출경절차를 마치고 관광버스에 올라 차창으로 보이는 모든 것을 눈에 담으며 군사분계선을 넘었다.

 일본의 강점에서 해방이 되고 일본을 제압한 국가들이  통치하기 위해 국토를 절반으로 가른 삼팔선, 이미 예고되어진 빼기는 나누기로 바뀌고 가속되어 서로 반대방향으로 이민족 화 되어갔다.

 더욱이 6.25라는 민족전쟁을 감행한 북한은 민족적 원한을 쌓아 더없는 원수지간이 되어서 헤어진 가족일 지라도 서로 쉽게 부둥켜안을 수 없게 된 긴 세월을 원한과 그리움의 갈등으로 대립하며 살아온 통한의 한 백년이 흘러왔다.

 개성은 고려 오백년의 도읍지로 한반도 중부에 위치한 도시로 6.25전쟁 시 북쪽에 빼앗긴 3.8선 이남의 땅으로 상업과 농업 경공업 등이 고루 발달하였고 지금까지도 개성상인을 우러르고 있을 만치 상업중심도시였다.

 본래는 경기도에 속해 있었으나 북조선 치하에서 1951년에 개성지구로 바뀌었고 다시 개성직할시를 거쳐 2003년부터 황해남도에 속하게 되었다. 지금은 개성특급시로 되어있으며 우리나라가 추진한 개성 공업지구가 있다.

 군사분계선을 넘자 북한 군인이 탄 군용 지프차가 선도하여 간다. 차창밖에는 드문드문 보이는 북한군의 초소와 경직된 북한군이 보이는 것은 당연한데 오월의 신록을 보면서 왔는데 휴전선인 군사분계선을 넘자 아직 이른 삼월의 초봄같이 썰렁해 보이는 광경에 의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의 북방한계선에 철문을 통과하고 조금 가니 개성공업단지의 모습이 보인다. 개성공업단지에 공급하기위해 서울에서부터 계속 이어온 우리의 전신주며 옆에 나란히 평행을 유지하며 따라오는 철도하며 우리가 가고 있는 아스팔트도로가 아직은 낯설지 않았고 북측출입사무소 또한 우리남한 측에서 건축한 것임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북측 출입사무소에는 군인들이 곳곳에 서있었고 세관원들이 다른 나라 입국절차와 같이 입국선과 심사대 몸수색 등을 철저하게 한다. 외국에 입국하는 것처럼 경직되지 않는 것은 같은 동포라는 이유에 서일까? 처음으로 대하는 그들이 반갑기도 하다.

 우리 일행은 입국심사를 마치고 다시 우리 관광버스에 올라 잠시 기다리니 북한 안내원 20여명이 줄지어 나오더니 각자 2~3명씩 버스마다 분승한다.

 이제부터는 그들이 안내를 한단다. 하나같이 젊고 깡마른 그들은 허름한 양복을 입었지만 깔끔한 타입에 눈빛이 강렬하다. 처음부터 기선을 제압할 것 같은 느낌이나 막상 그들은 우리 일행을 안전하고 즐겁게 안내하려고 노력을 하는 것이 역력히 나타난다.

 버스는 출입사무소를 빠져나와 개성으로 향한다. 바로 옆으로는 우리나라 기업들이 상주하여 활동 중인 개성공단을 지나게 되는데 여기는 북녘 땅이지만 우리나라 어느 공장이 밀집한 도시 같다.

 안내원 말로는 이제 1차 사업계획에 의하여 실행된 것이고 앞으로 2차 3차 사업에 의하여 많은 공장이 들어서게 하기위하여 계속 토목공사가 진행 중이며 북측의 노동인력을 기술연수를 시켜 남측이 원하는 공장에 충원시키고 있으며 지금도 연수중인 노동자가 많이 있다고 한다.

 안내를 하는 북한청년의 기대에 찬 말을 들으니 가슴이 벅차고 목구멍이 뻐근해진다.


땅도 사람들도 표정을 잃었다.

 개성시내에 들어서니 빛바랜 단층주택이며 연립 같은 건물이 즐비한데 가끔 주민들이 보여서 그렇지 하나같이 폐허를 연상케 한다.  골목마다 군인이 빨간 깃발을 하나씩 들고 부동자세로 서있는데 시내라서 그러려니 했으나 농촌 마을길 입구마다 똑같은 자세로 서있다. 이들은 우리일행의 안전보호를 위해 경계근무를 하고 있다는 안내원의 말이나 실은 주민들을 통제하고 있는 듯 했다. 경계병의 먼발치 뒤에는 허름한 작업복을 입은 주민들이 삼삼오오 서거나 앉아있었으며 가끔 우리 일행버스를 바라보며 손은 흔들고 있으나 하나같이 무표정한 얼굴에는 핏기마저 없는 듯하다.

 시내 변두리를 지나 박연폭포로 가는 길이 평양으로 이어지는 길이라 도로 옆에 작은 이정표에는 평양이라고 써있는 것이 얼핏 보였다.

 개성은 분지 형으로 시내를 중심으로 주위에는 평지 토지가 많고 작은 언덕 같은  산은 모두개간을 하여 농지로 만들어 놓고 보리를 심었으나 이삭이 제대로 나오지 못하고 누렇게 말라가고 있다. 제대로 자랐다면 청춘남녀가 숨어서 사랑을 나누어도 될 만한 시기인데 보리밭 골 사이로 붉은 땅이 그대로 들어나 있다. 모든 것을 눈에 담으려 애썼으나 지나치는 넓은 들판에서 소를 본 것은 두 마리였고 트럭을 세대 보았을 뿐 경운기나 트랙터도 보이지 않았다. 군데군데 깃발을 꽂아 놓고 주민들이 모여 일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높은 산들도 나무가 없어지자 개간을 하고 식량난을 해소하고자 곡식을 심어왔으나 이제는 풀도 제대로 나오지 않은 척박한 땅이 되어 황사를 일으키지나 않을까 의심이 날 지경이다.

 햇살은 오월의 중순을 내달리고 있는 계절이니 녹색물결을 이루어야 되는 시기인데 여기는 아직 춘삼월같이 아직 물감을 칠하지 못한 그림같이 와 닿는다.

 하늘마저 잿빛으로 내려앉아 사람도 산야도 희망의 색깔이 퇴색되어 있음을 바라보니 안내원의 말이 귀에 들어올 리 없는데 우리들의 무관심에 그들은 진땀을 빼며 말로는 안도겠다 싶었는지 노래를 부르나 사분의사박자 똑같은 음절의 노래에 흥이 나지는 않지만 너무나 열심인 그들에게 미안하여 억지로 치는 박수소리만 허공에 날린다.


 박연폭포의 물도 여위여 흐른다.

 벌거숭이산을 한참 굽이돌아 오르니 울창한 나무숲에 다다랐다. 그들이 자랑하는 박연폭포가 있는 명승지라 이곳만은 용케 산림이 보존되어 있었다.

 우리 지명으로는 경기도 개풍군 영북면 천마산록에 있는 폭포로 근처의 가을 단풍이 아름다워 송도삼절(松都三絶)의 하나로 꼽힌다. 또 금강산의 구룡폭포, 설악산의 대승 폭포와 함께 우리나라의 3대 명 폭포 가운데 하나이다. 계곡엔 맑은 물이 소리 내 흐르고 기암괴석이 명산임을 말해주는데 산림이 울창하면 새들도 날아다니며 노래할 법 한데 아무리 찾아보아도 새들은 보이지 않는다.

 예로부터 유명한 명산이라 시인묵객이 찾아왔다가 자신들의 이름 석 자 길이 남기려고 바위마다 각인한 것에 아쉬워 할 틈도 없이 웅장한 기암괴석 마다 온통 김일성 김정일을 찬양한 글귀들이 산을 도배해 놓았는데 아이러니 하게도 이런 곳 주변에는 옛 선인들의 함자각인을 애써 지워버린 흔적이 많아 실소를 자아내게 한다.

 폭포소리를 벗 삼아 득음을 하려는 명창의 소리가 들리는가?  시인묵객들이 경이로움을 찬양하는 시어를 들어 봄직 하거늘 태평성대 오백년 도읍지의 명승지에서 태평가 하나 들리지 아니하고 황진이의 춤사위 같이 너울너울 떨어지는 폭포의 물줄도 가물어 이곳의 기아현상을 말해주듯이 힘없이 질질 흘러내리고 있었다.


* 황진이는 조선중기 개성에서 활동한 명기이다. 기명은 명월(明月)로 일명 진(眞),진랑(眞娘) 등으로도 불린다. 시, 시조, 거문고, 노래에 능했으며, 조선중기 경기도 개성에서 주로 활동했다. 그녀는 일찍이 "송도에는 삼절이 있으니, 첫째는 박연폭포요, 둘째는 화담선생이요, 셋째는 곧 나이다."라고 하였다 한다. 아름다움과 기예가 함께 뛰어나서 그 명성이 온 나라에 가득했으며 서경덕 등의 명사들과 교유하여 많은 일화를 남겼다.



 북한은 팔 상품도 별로 없었다.

 박연폭포를 오르는 산길 중간 길목과 박연폭포에는 그들의 간이매점이 설치되어 있었으며 판매원 아가씨와 지도원 간부 그리고 가판대 안에서 일하는 여인이 있다. 판매원 아가씨는 한복이나 양장을 단아하게 입고 밝은 미소를 짓고 있었으며 지도원 남자는 허름하지만 양복을 입고 친근하게 우리들을 대했으며 대화도 적극적이었다.

 우리들은 무엇이든 사보려고 했으나 사고 싶은 물건이 별로 없었다. 옥수수 지지미대. 녹두지짐이대 감자지지미대등 으로 나누어 가판 안에서는 지지미를 만들고 가판대에는 옥수수가루 같은 것으로 만든 약과나 강정 견과류를 팔고 막걸리 맥주 등이 전부였다. 미 달러만 받는데 비싸기는 하나 호기심으로 이것저것 사서 먹어보았으나 맛이라고는 별로 없다. 약과나 견과류를 사서 나누어 먹고 안내원들도 나누어 주며 삼삼오오 안내원들과 대화의 장을 만들어 본다. 이제는 그들도 우리들과 대화를 적극적으로 하려들고 정치적 이야기도 서슴없이 하려드나 그들과는 생각의 차이가 많아 우리도 그들을 이해하기 힘들고 그들도 우리말을 이해하기 힘들어한다. 그들은 당이나 김정일의 뜻에 따라 뭐든지 할 수 있다는 사고가 우리나라의 대통령이 자기들에게 원조하던 것을 중지하지 않을까하는 걱정을 하면서도 자존심은 죽이기 힘들어한다.

 이 제와서 원조를 중단하면 모처럼 화해의 분위기가 끝장날 것이라며 노심초사 하는 그들이 안쓰럽다.

 먹을 것도 없고 팔 물건도 없어 보인다. 당장 그들은 배급이 중단되면 굶어죽기 십상이다. 이제는 뜯어 먹을 나물이나 벗겨먹을 나무도 없었다.


절에는 부처님 만 있었다.

 박연폭포를 뒤로하고 조금 오르면 울창한 나무와 기암괴석 사이에 관음사라는 절이 있다. 고려시대인 970년에 세운 천년고찰인 관음사에는 대웅전을 비롯하여 칠층석탑 과 바위동굴에 대리석 관음상이 있는데 대리석 불상은 그들만이 가지고 있다고 현지에 서 해설을 하는 여자안내원의 자랑이 대단하다.

 법당에는 염불을 할 줄 아는지는 모르지만 삭발을 하지 않은 스님 한분이 있는데 그 스님도 평양에서 출퇴근한단다.

 북한관광객이나 신도들은 없는지 아니면 통제를 하는지는 모르지만 한사람도 보이지 않고 남한 관광객 불자들만 열심히 참배하고 미화나 우리나라 돈을 불전 함에 넣기 바쁘다. 아마 그들의 외화벌이에 한몫을 담당하고 있으리라 생각된다.

 절 앞에는 승방이 있으나 관광지로서 보존만 해놓고 일상 수도나 기도의 목적으로는 사용하지 않는지 사람이 기거한 흔적이 없는데 그나마 옛 문화재와 전통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음이 다행스럽다.


개성민속여관

 개성 남대문 북쪽에 위치한 개성민속거리에는 민속여관 50여동이 줄지어 있다. 조선시대 전통가옥단지를 여관으로 개조하였다고 하는데 담쟁이가 벽을 타고 올라 세월의 이끼를 온몸에 감싸 안고 대문을 굳게 잠근 채 사그라질 듯이 가만히 숨죽여 엎드려 있었다.

 그 옛날 한량묵객들이 즐겨 찾던 곳이다. 명월 황진이도 기거했을 기생집 골목인 전통가옥단지를 가로 지르는 실개천에는 수양버들, 감나무 오죽 등의 나무들이 다소곳이 자라고 있어 이곳이 겨울에도 그다지 춥지 않은 북한에서는 최남단인 분지형의 땅임을 알 수 있었으며, 말끔히 손질된 개울에는 맑고 작은 물줄기만 소리 없이 흐르고 있다.

 관광객의 식당으로 사용되는 민속여관 중 한집인 백송식당에서의 점심은 노란 놋그릇에 밥과 반찬을 모두 뚜껑을 덮어 가지런히 놓은 11첩 반상기 앞에 앉아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애리한 아가씨들의 봉사를 받으며 먼저 백두산 들쭉술로 반주 한잔부터 마셨다.

 계란찜, 고사리 볶음, 도토리 묵채, 개성 특선약과 등 개성 토속음식이라지만 우리의 1960년대 시골 잔칫집에서 먹던 음식 같다.

 햇살 밝은 실개천 따라 산책로를 거닐어보니 여기도 봄볕이 완연하고 나뭇가지에 새잎이 돋거늘 우리 일행 외에는 사람이 없는 텅 빈 거리여서 적막하기 그지없다.

 어느 대문을 두드려보나 인기척이 없이 잠겨 있는데 담 벽에 시설된 벽보에는 위대한 수령님 과 장군님을 찬양하는 것과 인민을 선동하는 선전계시물이 붙어있으나 주민들은 없고 이곳에 종사하는 사람들만 가끔 보일뿐이다.


개성상인은 다 어디로 가고.

 우리는 장사를 잘하는 상인을 가리켜 개성상인 같다는 말로서 칭찬을 할만치 개성은 상업도시로 명성을 날렸다고 하는데 지금의 개성은 상점이 별로 없는 것 같았다.

 시가지에 관광코스가 산재해 있어 시내 중심가에 잠시나마 머무를 수 있었으나 골목마다 지키고 서있는 군인들에 의하여 통제된 주민들이 반대쪽으로 움직이기 때문에 그들과는 대화나 심지어는 멀리서 사진도 촬영할 수 없게 한다.

 가까이 지나가는 그들을 보면 입은 옷도 우리의 70년대 옷차림과 비슷하고 체구역시 깡마른 데다 하나같이 무표정한 얼굴이며 힘없는 발걸음으로 왕래하고 있는데. 다만 군중 속에 대학생들은 남자의 교복은 검정양복이고 여학생은 검정치마에 하얀 저고리를 입은 것이 돋보였는데 이들만은 그래도 발걸음이 힘이 있어 보였다.

 개성은 예부터 상업이 발달하여 이름이 있는 도시였다고 하는데 옛 건물 말고는 보잘것없는데다 색깔마저 퇴색되어가는 빈민도시로 전락해 있었다.

 도시답게 길은 잘 확보되어 있고 사거리에는 교통신호를 하는 공안원은 있으나 차는 고사하고 사람마저 왕래가 적어 오히려 을씨년스럽다.

 거리 앞 건물에는 간간이 이발소. 약방 공업품상점 식료품상점 등의 허술한 간판이 걸려있으나 거리에서는 안이 들여다보이지 않아 들여다볼 수 없고 문을 열고 들어가야 볼 수 있겠는데 하나같이 출입문이 열려있지 않았고 사람들도 상점 안으로 들어가고 나가는 것을 볼 수 없었다.

 명성을 떨치던 개성이 지금은 상업의 상자도 거래되지 않는 파장의 흔적도 없는 빈민도시로 메말라 가고 있는데 개성시내 한복판에 높은 단을 쌓아올리고 세워 논 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상의 망령이 이도시의 빛을 빨아먹어버려 점차 어두움으로 변하고 있는 듯한, 착각마저 들게 한다.


동전의 앞과 뒤

 세계 어느 나라나 화폐로서 낮은 단위는 동전으로 통용된다. 그 동전의 앞면과 뒷면의 그림이 다르다 하여 서로 맞지 않고 상반될 때에 흔히 동전의 양면성을 이야기 한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남과 북을 동전에 비유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것은 양면의 그림은 다르나 숫자는 동일하게 돈의 가치를 표시하고 있는데 실제 우리 남한과 북한은 같은 동포이기는 하나 너무나 다른 사상과 가치관 그리고 문화와 생활양식이 변해버렸다. 그냥 막연히 통일이 되어야 한다는 기대만 같을 뿐이다. 이것은 동전 하나가 하나의 가치로 표시하고 있는데 그에도 못 미치기 때문에 동전의 양면성에도 해당되지 않는다.

 헐벗고 메마른 산과 들판, 표정을 잃어버린 민중들이 최후까지 버리지 못하는 자존심으로 견디고 있는 그들의 독백에서 측은함과 섬뜩함이 가슴을 아리게 하는데 데 그들이 열어준 문으로 들어갔다가 나온다하여 대단한 텃세에 주눅이 들은 마음으로 출입사무소를 통과하고 버스에 올라 오후 5시를 기다려 남쪽으로 내려오는 길 그들이 열어주는 육중한 철망 문으로 개성공단을 출입하는 차들과 함께 줄줄이 빠져나왔다.

 휴전선을 넘어 위풍당당한 국군장병이 맞이하는 남한한계선을 통과하니 오월의 싱그럽고 향기로운 바람이 푸르른 숲을 일렁이며 다가와 우울하던 마음을 위로하며 몸 구석구석에 풍요로움과 행복감을 가득 안겨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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