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도익< 인생칼럼>

미루나무 그 그늘아래 이야기

돌 박사 2021. 3. 31. 17:30

신작로 미루나무 가로수

 

미루나무 그 그늘아래 이야기

                                      

 

     소설가 석 도 익

 

유년시절 난생처음 버스를 타고 외갓집 가는 길, 비포장 울퉁불퉁한 신작로 길을 뽀얀 먼지를 일으키며 달리는 버스도 흔들리고, 어린 내 가슴도 마음이 설레고 나도 흔들리는데, 차창 밖으로는 미루나무가 자꾸 뒤쪽으로 달아나는 것을 많이 보았다.

신작로 양쪽에 나란히 서있는 미루나무는 멀리서 보면 싸리 빗자루 세워놓은 듯 하고, 어찌 보면 미군들이 행군하는 듯했다. 결코 예쁘거나 멋있지도 않고, 그저 키만 멀쑥하게 뻗어 올라가는 미루나무는 미국에서 온 버드나무라고 해서 미류(美柳)나무라고도 했다.

미루나무는 대한제국 개화기(開化期)초기에 미국에서 수입하여 심기 시작했다고 하는데, 사람들이 아름다운 버드나무란 뜻으로 미류(美柳)나무라고 부르던 것이 국어 맞춤법 표기에 맞추어, 어느 날 미루나무가 되었다고 한다.

지금의 가로수는 은행나무나 벚나무 등 아름다운 것과는 달리 처음으로 신작로에는 키다리 미루나무들이 주를 이루었다.

생장이 빠르고 이식이 잘되기 때문에 가로수로 많이 심었으나, 삶의 질이 높아지고 아름다움을 추구하게 되는 현대에 와서는, 가로수도 여러 종으로 대체되기 시작되었는데 미루나무에 이어서 미루나무와 양버들의 교잡종인, 이탈리아포플러가 장려되어 생장이 느린 미루나무를 대체하기 시작하였다. 마침 미루나무는 재질이 연하고 깨끗하여 나무젓가락이나 도시락 성냥개비 등으로 수요가 급증하므로, 도벌이 성행해서 급속히 없어져 갔다.

지금은 도로의 가로수는, 도열하듯이 서있던 추억에 그늘이 되어주던 미루나무는 볼 수가 없다. 다만 그 미루나무그늘에 낙엽같이 쌓여있던 색 바랜 이야기만 짠하게 깔려있을 뿐이다.

1923년 서대문형무소건립 당시 미루나무가 심어졌다. 사형장으로 가는 길목에 하나있었는데, 사형장으로 끌려가던 독립지사들이 독립을 보지 못하고 생을 마감해야하는 애통함을 미루나무 앞에서 통곡하며 토해냈다고 하며, 그래서 붙여진 이름이 통곡의 미루나무라고 한다.

사형장 안쪽에 같이 심겨진 미루나무 또 한 그루가 있는데, 그 미루나무는 잘 자라지 못했다고 한다. 그래서 미루나무에 죽은 독립투사들의 한이 서려 나무가 잘 자라지 못했다는 말이 전해지기도 한다. 이후 사형장 내부에 있던 미루나무는, 2017815일에 쓰러졌다고 하며, 앞에 남아있던 통곡의 미루나무도 2020년에 독립투사들의 통한을 안고 고사했다고 한다.

또한 민족상잔(民族相殘)6.25를 휴전으로 멈추게 하고, 그 전선에 휴전선을 그어놓고 대치해온 세월, 휴전선을 감시하는 남북공동경비구역인 판문점에서 일어난 미루나무 도끼만행사건으로 일촉즉발의 전쟁발발에 위기를 맞은 적도 있다.

1976년으로 역사의 수레바퀴를 되돌려 보면 아슬아슬한 순간이었다. 광복절이 며칠 지난 818, 공동경비구역 내 연합군 초소 부근에서 미군과 한국군은 미루나무 가지치기를 하고 있었다. 그때 감독하고 있던 미군 장교 두 명이 북한군 50~60명에게 도끼로 무참하게 살해당한 사건이 벌어졌다. 세계의 눈은 모두 이 미루나무에 모아졌으며, 군에서는 데프콘3(준전시태세)를 발령했다. 전 국민은 그 끔찍함과 전쟁의 공포와 적들의 악랄한 행동에 치를 떨었던 기억이 있을 것이다.

2000년 가을에 개봉한 영화 공동경비구역 JSA는 당시의 남북화해 무드를 타고 대박을 터뜨린 영화로 유명하다. 민족의 비극이 응어리져 있는 판문점, 미루나무가 지구상에 나타나고 나서, 전 세계에 그 어떤 나무도 이만큼 집중조명을 받은 일은 전에는 물론 앞으로도 두고두고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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