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창묵 동창만세운동기념사업회장을 비롯한 답사단이 13일 홍천군 서석면 수하1리 곧은골에서 동학농민혁명군이 숙영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터를 발견했다. |
동창기미만세운동기념사업회 김창묵 회장님이 이야기하신, 동창만세운동을 주도했던 김덕원의사가 장두로 활동한 동학농민운동과 천도교가 홍천에서의 역사적 발자취를 남긴 자취를 찾아서 4352년 3월 13일 그 현장을 찾아서 갔다.
김창묵 회장은 학계 언론계 문화계 문학계 및 동학운동관련자등 13명으로 구성된 탐사반을 대동하고 4륜구동 자동차 3대에 동승하여 서석 아미산자락에 위치해있는 홍천군 서석면 수하리 고든골 (골짜기의 계곡이 곧게 나있다 하여 곧은골 한문으로는 직골을 발음나는 대로 한 것 같다) 해발 400여 미터 산 8부능선까지 지방도에서 4km걸쳐 임도로 올라가서 다시 정상을 향해 산길도 없는 돌과 잡목사이로 2km정도를 80도 이상의 가파를 산을 올라야 했다.
서석면 수하리 내촌천 지류인 수하천을 따라 있는도로에서 고든골로 들어가는 입구가 나타난다.
입구에는 큰 참나무가 이정표인양 버티고 있고 골에서 내려오는 하천를 건너놓은 교량을 넘기전에 입구로 들어간다.
고든골 입구 (곧은골 직골)
도로에서 4km 정도의 험준한 임도로 올라왔다
고든골이라 할만치 골짜기가 곧게 나있어서 구불거리지 않는 산길이라 여기까지는 편하게 승용차로 올라왔으니 다행이었다.
임도 종점이다. 이제부터는 산행준비를 하고. 길이 없는 산으로 올라야 한다.
돌 들이 많고 잡목사이로 가파를 경사지를 오른다. 다행히 김창묵 회장님이 사전에 기념사업회 직원들을 시켜 잡목을 제거하고 길을 터준 덕분에 나무에 찔리거나 방해받지 않고 오를 수 있었다.
김창묵 회장님은 98세 연로하신데도 함께 오르시는 것을 보고 오히려 우리들이 힘을 얻어 올라갔다.
이곳은 90도 이상의 가파른 경사지 비탈길이다.아무리 동학군들이 관군에 쫏기어 이런곳을 진지로 삼았다는 것이 놀랍기만 하다.
김창묵 회장님이 노구를 이끌고 마음이 앞서 서둘러 오른 탓에 잠시 숨을 고르며 쉬고 있는 중이다.
아직은 3월 초 살을 파고드는 추위가 오늘따라 겨울의 끝 자락을 잡고 찬바람으로 기승을 부리는 산중턱! 그러나 계절은 속임이 없는지 지난날 쫏기던 동학군들이
식량으로 채취했을 귀중한 나물이 언땅을 뜷고 올라왔다.
이곳엔 제법 많다. 이 나물의 군락지인것 같다.
드디어 목적지 김창묵 회장님이 자주 찾아와 보았다는 산 8부능선에 자기잡은 산 정기가 나올만한 장소에 자리잡은 교당터임직한 곳이다. 산중턱 양지바르고 좌우에 계곡이고 산이 둘러있고 앞으로는 멀리 주봉이 보이는데, 누가 보아도 편히 보좌되고 앞이 트여 운이 열린 터다. 이곳을 평지를 만들기 위하여 계곡의 돌을 이동시켜 삼단 들여쌓기로 축조하고 동학의 천도교당을 만든듯 하다.
위쪽과 아랬단에 석축을 쌓고 터를 평하게 다듬어 교당터를 돋은것 같다. 한 세기가 지난 지금도 교단터 위 아름들이 적송이 세그루 자리잡고 있었으며 터에는 그 세월에도 잡목하나 크게 자라있지 않은 점이 의아하다, 어느 누가 관리한 듯이 반듯하게 보존되어 있다.
정면에서 본 석축과 10평정도되는 교단인듯한 터 그리고 위 석축사이에 서있는 적송나무가 이곳을 지켜온듯 하다.
터 좌측계곡 이 고든골 계곡이 이어지고 아늑한 곳이라 산죽이 푸르다.
일행중 절을 올리는 모습도 보인다. 앞에 소나무는 밑부분의 두꺼운 껍질 걷부분이 연기에 그을러 있었다, 누군가 촛불을 피워 놓았던 것 같았다.
위로 보이는 능선이다. 서석면 수하리 마을이 내려다 보이는데 이곳에서 아래의 동향을 볼수있어 충분히 경계 할 수있는 추격자로 부터 보호받을 수 있는 곳이 적임지다.
우측으로 가면 서석면 검산리가 나온다고 한다.
좌측으로 가면 내촌면 동창쪽이 나온다.
모든 역사적 추리를 해보면서 이 지역의 지난날에 이야기를 엮어보는 중이다.
홍천문화원 향토사료연구소 전상기 소장이 깊이 생각에 잠긴 모습이다.
한 세기가 지나간 흔적이 크게 휘손되지 않고 있음은 살아 있는 세월의 이야기를 들려 주고 있었다.
이곳으로 군영을 정하고 막사를 짓고 숙영하며 사용하였을 우물터다. 지금도 마르지 않고 샘이고이고 있었다
군생활을 할때 훈련시 약간의 평지에 천막을 치기위해 땅을 고르던 생각이 난다. 완만한 구릉지를 이룬 이 지역이 혁명군들이 막사를 지었던것 같이
돌을 골라 아래에 놓고 서너평 정도를 고르고 평지를 만든곳이 2천여평은 됨직하다..
이런 숙영지가 밀집되어 있다. 더러는 채소정도는 심어서 먹을 수 있는 밭도 있을 듯 싶다.
김장묵 회장님이 이곳까지 올라온 것은 우리들에게 이곳에 대한 모든 것을 알주기 위함이라 힘에 부침에도 기어이 정신력으로 해내신 것같다.
김회장님은 지금까지 자료로 모아온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홍천에 뒤 늦게나마 내려와서 지난 역사의 흔적을 찾던 중 동학에 관한 이야기를 접하게 되어 하나 둘 알아가던 중에 이곳에 모든 역사가 동학과 관련되고 그 사상과 뿌리가 민족정신이 되어, 동학농민혁명운동에서 다시 이어져 3.1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났음을 부정할 수 없었음으로 나는 동학에 관한 세미나도 주선해 개최했던바 하나 하나 이어지는 역사적 줄기를 찾게된 것 같아서 탐사계획를 오래 전에 했으나 이제사 실행하게 되었다고 했다.
김창묵 화장님은 이곳을 여러번 와서 탐사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그 흔적이 많이 달라진것 같아 아쉬워 하며 이 모든 것이 우리의 민족정신이 새겨진 곳이라며 수하리
용호강가에 암각으로 새겨진 대한민국만세의 유물에서 부터 도깨비 터에서 일어났던 이야기며 그 집의 주인인 연규환 님의 행적이 압록강변에 있는 그의 묘지의 의문, 그리고 이제 동학군이 머물러 있던 군영지인 고든골, 까지 이 모든 것이 하나 둘 이어지는 설키고 엉킨 지난 일을 역사적으로 규명고 풀어내서 민족정신의 한 페지로 기록해야 할 것이 우리들이 해야할 사명이라고 말했다.
김회장님의 이야기다. "서석면 풍암리 전투에 참여했던 상당수의 동학군이 이곳 지리에 능한 지역동학교도 (김덕원 장두 등) 의 안내로 이곳 고든골에 모여 산과 계곡을 개간하여 영농으로 생계를 이어가며 재기를 준비했던 곳으로 추정된다고 했다
그 증언으로 이곳 눌언동에 살던 지금은 고인이 되신 변성환 할아버지의 말씀을 들었다고 했다.
변성환의 말에 의하면 이곳이 동학군이 살던 곳이고. 호랑이가 무서워서 사람들 발길이 드문곳이 었으며, 이계곡 아래 원까불이와 정똑보가 살고 있었고 . 김덕원 의사가 밤중에 이곳을 자주 출입했는데 원까불이와 정똑보는 김덕원 의사를 존경하여, 그들이 야밤에는 호완이 두려우니 다니시지 말 것을 진언했으나 김덕원 의사는 개의치 않았다고 했다. 당시 마을 주민들은 두려운 호랑이의 피해를 막기위해 호망을 치고 살았다고 했다. .
또한 누런동에 사시던 지춘복 님의 이야기는 "장모님이 장수하셨는데 사연은 알수없지만 어쩌다 보기드믄 사람들이 다니는 것을 보았다"고 하셨다. 또한 "동학을 믿으면 밥을 한 주발 (옛날 놋쇠로 만든 밥그릇)을 비우고 주문을 외우면 다시 밥이 한 그릇이 된다는 이야기도 들었다"는 말씀도 있었다. 고 지난 날 그분들의 말을 직접 회장님이 들었다고 한다.
탐방을 마치고 하산하는 길
▲ 3월13일 김창묵 회장을 비롯 엄찬호 강원대 사학과 교수,심형기 홍천동학추모사업회장, 전상기 향토문화연구소 소장. 강대덕 역사학자, 석도익 홍천문화원 부원장,유주현 강원도민일보 기자. 기념사업회 임원 등 12명으로 답사단을 구성,수하1리 곧은골에서 교당 터와 숙영지,논·밭농사로 생계를 이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흔적을 탐사했다.
홍천서 농학농민혁명군 은거한 교당·숙영지 터 발견
서석면 수하1리 산속
165㎡·6600여㎡ 규모
홍천 동창만세운동기념사업회는 13일 김창묵 회장을 비롯 엄찬호 강원대 사학과 교수,심형기 홍천동학추모사업회장,강대덕 역사학자,석도익 홍천문화원 부원장,기념사업회 임원 등 12명으로 답사단을 구성,수하1리 곧은골에서 교당 터와 숙영지,논·밭농사로 생계를 이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흔적을 발견했다.이는 당시 눌언동에 살았던 고 변성환 옹의 발언에서도 이를 뒷받침한다.변성환 옹은 생전에 곧은골은 동학군이 살던 곳으로 호랑이가 자주 출몰해 주민들이 호랑이의 침입을 막기 위해 그물을 치고 살았다고 말했다.특히 김덕원 의사가 왜경의 수배를 피해 밤중에 자주 출입하기도 했다고 증언하기도 했다.
산 중턱에 교당터로 보이는 평평한 부지는 165㎡규모로 고려시대 산성축조 방식인 3단 들여쌓기로 둥그렇게 축조했다.강대덕 박사는 “교당이 자리잡았다면 당집에 주초석이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만큼 고증 작업에 나서야 한다”고 말했다.또한 바로 옆에 6600여㎡규모의 숙영지로 추정되는 넓은 터와 식수로 사용할 수 있는 계곡의 물,숫가마터로 보이는 흔적들은 동학군이 머물 수 있다는 흔적을 반증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심형기 동학추모사업회장은 “답사하기 전에는 화전민이 거주했던 터로 미심쩍어 했는데 실제로 확인해 보니 그렇지 않은 것을 알았다”며 “전체적으로 산의 형세를 보니 토벌군이 오면 한눈에 알 수 있도록 좋은 자리에 터를 잡은 것 같다”고 말했다.98세의 노구에도 불구하고 현장을 찾은 김창묵 회장은 “예전에 교당을 찾기위해 검산리쪽 사람들도 험한 산을 넘어 다녔다는 이야기를 들었다”며 “여러가지 정황으로 볼때 동학농민혁명 최후의 유적지가 분명하다”고 말했다. 유주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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