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도익 <칼럼>

섣달그믐 이야기

돌 박사 2013. 2. 9. 13:47

2013-02-09 오전 11:28:28 입력 뉴스 > 홍천뉴스

[석도익 홍천문인협회장 칼럼] 섣달그믐 이야기



동지를 열흘쯤 지내고나면 낮의 길이가 토끼꼬리만치 길어진다고 하지만 매서운 북풍한설은 문풍지를 울리면서 긴긴 밤을 지새우는 섣달이다.

 

▲ 석도익 홍천문인협회장


낼 모래가 설날이라고 기분이 들뜬 아이들을 보며 애들에게 무엇으로 배불리 먹이고 어떤 옷으로 따듯하게 입힐까 하는 고민으로 부모들은 시려오는 언 가슴으로 밤잠을 설치게 된다. 찰옥수수나 찰조로 떡쌀을 담그고 보리쌀에 싸라기를(쌀 부스러기) 섞어 메 쌀떡을 준비한다.


일제의 강점으로 나라를 잃고 식민으로 피를 빨려 핍박해진 터에 해방의 기쁨도 잠시 다시 6.25전쟁을 치룬 잿더미에서 하루하루를 연명해가면서도 희망을 잃지 않고 몸부림치던 50~60년대 허리띠를 졸라매면서 가난을 물리치기 위해서 양력설과 음력설의 이중과세를 금지시킬 목적으로 음력설은 공휴일로 지정하지 않아서 공무원이나 기업에서는 정상근무를 해야 했고 떡방아 간을 열지 못하게 했다.


그러나 수백 년 전해내려 오는 민속명절인 설은 속내를 들어 내지 않으면서도 조상을 섬기고 어른을 공경하며 이웃들과 나눔의 미풍양속으로 지내졌다. 


설을 앞두고 흩어져 살던 작은아버지 어머니 삼촌들이 설 쇠러 모여와서 큰댁 집은 가득해지고 떠들썩해질 무렵에는 앞마당에 떡판 귕이 놓이고 김이 무럭무럭 나는 떡살이 담겨지면 작은 아버지와 삼촌들이 번갈아 기합을 넣으며 내려친다. 젊은 남자가 없는 집에는 이웃집 사람들이 돌아가면서 해주니 떡메소리가 마을 여기저기에서 울려 퍼진다.


친아버지 장작 패는 옆에는 가지 말아야 되고 떡메 치는 의붓아버지 옆에는 가라는 옛말같이 아이들과 검정 강아지까지 모여서 구경한다. 재수 좋으면 떡메에 튀어지는 떡고물을 먼저 먹어볼 수 있는 기회도 있다.


찰떡은 알맞게 떼어져 바로 먹을 것은 팥이나 콩고물을 묻히고 흰떡은 동그랗게 봉을 만들어 떡살로 찍어 누르면 아름다운 무니가 새겨지는 가래떡이 된다. 오래두고 떡국에 넣어먹을 메떡은 둥근 보름달처럼 달떡을 만들어 대보름 때 먹는데 벌집에서 채취한 밀을 발라서 다락방에 보관한다.


일 년을 마감하고 새해를 맞이하는 준비를 하는 섣달그믐은 그간에 소원했던 이웃과 일가친척의 관계를 더욱 돈독하게 한다. 떡이 만들어 지면 설날 차례 상에 올릴 떡은 안주인이 잘 간수해 두고 나머지는 이웃에게 나누어줄 몫이다.


떡이며 전을 이웃집집 식구 수에 따라 양을 가늠해 담아서 돌리는데 이는 당연한 아이들의 몫이다. 떡 그릇을 들고 넘어질세라 종종걸음으로 마을집집마다 찾아가서. “저희 집 떡 맛 좀 보시래요” 하는 인사말은 어머니들이 일러준 말과 함께 봉송된다.


넉넉지 못한 집에서는 떡을 이웃에 돌리고 나면 집에 남은 것이 없다. 그러나 온 동네 집집에서 하나같이 우리 집 떡이니 맛이나 보시라고 돌리다 보면 그만큼 가고 그만큼 오는데. 다만 떡 만든 솜씨나 맛이 온 동네 떡이고 온 동네 맛을 볼 수 있는 떡 백화점에서 된다.


어둠이 산자락에서 내려와 처마 밑으로 숨어들면 마당에는 관솔불이 밝혀지고, 부엌에서는 아낙들의 이야기가 방에서는 남정네들의 웃음소리가 싸리문을 넘는다.


‘섣달그믐 날밤에는 잠을 자면 눈 섶이 희어진다’는 끔직한 경고는 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큰댁 방은 이미 앉을자리가 없을 정도다. 거기다 소반위에는 만두가 곱게 빚어져 줄지어 올라앉아지고 어른들은 돌려지는 술잔에 오랜만에 함께한 피붙이들이 있어 행복한 이야기에 젖고 아낙들은 차례음식과 떡국 만두 빚기에 밤을 밝히고 아이들은 내일 입을 설빔에 설레며 새로 사온 양말과 고무신을 신었다 벗었다 하다 앉은 채 잠이 든다.


넉넉하게 살지는 못했지만 마음만은 풍성해지던 나눔의 세시(歲時) 밖에는 눈보라치는 엄동설한이라도 집안에는 따듯한 봄이 오는 섣달그믐이었다.

 

홍천인터넷신문(hci200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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