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 작품

[스크랩] 가는 세월

돌 박사 2007. 6. 29. 10:16
      ♤ ... ♤ 가는 세월 석 도 익 꽤나 열심히 살아왔다고 자부하면서도 그것이 자신의 인생에 진정한 “삶”인지도 잘 모르면서 산다. 남들도 다들 하는 결혼을 한지도 십수 년이 지나온 지금까지 동원 예비군 훈련을 제외하고는 외박 한번 한일 없고 한눈 한 번 팔지 않았다고 큰소리를 치고 있지만 어쩌면 자기가 남자치고는 한심한 달팽이 같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 때가 더러 있다. 처녀 때는 그리도 곱상하고 사근사근하던 아내가 세월의 초침에 찢겨 일그러지기 시작하면서 남편을 붙잡아 맨 고삐를 늦추지 않고 더욱더 검문검색을 강화하는 것은 남편이 아직까지 위험수위에 있다고 생각해서 일 것이다. 직장의 상사와 부하의 중간에서 하루의 일과를 보내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물먹은 솜뭉치처럼 짓누르는 피곤과 꼬집어 말할 수 없는 허허로움은 어둠이 깔리는 퇴근길에 곧장 아내가 기다리는 집으로 향해지지만은 않는다. 참새들이 들려가는 방앗간에 한잔 술로 인생의 아리한 상처를 마취시키는 것에 서서히 매력을 느끼고 있었다. 허나 남자들의 이런저런 밖의 사정으로 늦게 귀가하는 것이 다반사이거늘 정도(正道)만을 아는 아내는 모르는 일이다. 다만 9시에 출근해서 5시에 퇴근한다. 며칟날은 월급날, 몇 월은 상여금 나오는 달, 이런 것들은 대학 학점에 뿔까지 더 얹어 성적표를 받을 높은 점수이지만 동민의 힘겨운 마음을 주눅 든 사회생활을 이해하면서도 겉으로만 그러는 것인지. 알바 없다는 식으로 나날이 삶은 콩 마냥 퉁퉁 불어있으니 그럴 때마다 아내의 주름살은 더 늘어나고 늘어가는 것만큼 바가지도 더해 가는 것 같다. 어제만 해도 그렇다. 직원들과 몇 잔술에 이야기가 통해서 높은 분들까지 들먹이며 IMF 가 어쩌니 하는 경제에서 사회, 정치의 현실을 신랄하게 비판하고 세계정세까지 떠들다보니 그놈의 시간은 이럴 때면 마하의 속력으로 가버려서 오늘이 아닌 내일의 문을 넘어서고 있었다. 미안한 마음으로 고양이 발로 집에 들어서다 아내의 아닌 밤중에 항아리 깨지는 소리를 면치 못한 것은 물론이고 과음으로 곱게 잠들지 못하고 엉금엉금 기어서 화장실을 들락 거리다보니 짧은 밤은 금세 가버리고 또 새날이 희망차게 밝아온다. 오늘은 퉁퉁 부은 아내의 얼굴에 미소를 찾아줄 양으로 퇴근시간 정시에 눈치를 보아 부랴부랴 빠져나와 집에 오니 아내의 얼굴은 아직까지 좋은 건지 부은 건지 금방 시들기가 아까운건지 잘못깍은 부처님상 같아 보인다. 침묵을 금으로 믿고 조용하게 저녁밥을 먹고 나니 기껏 일찍 들어와서 할 짓이란 아이들과 이야기하는 것도 잠깐 결국 멋졌게 혼자 떠드는 TV나 바라보는 거다. 참 TV란 더러운 매력을 지니고 있다. 안보면 그만인데도 보기시작하면 잠이 올 때까지 계속 보아야 하니 말이다. “저녁잡수세요” 까지 꼬마 딸을 시키고 여태껏 말 한마디도 안하는 아내의 근처에는 얼씬할 필요도 없다. 남자의 자존심이“먼저”를 허락하지 않는다. 조용한 것을 좋아하는 동민으로서는 아내의 높은음은 결코 좋은 음악이 못되니 또 한바탕 입씨름 할 것이 뻔 할 것 같아 끝내 혼자서 자정을 넘기고 애국가가 경건히 울릴 때까지 시청률을 올려놓고는 코를 골며 잠들어 있는 아내를 내려다보았다. 아내의 신혼 때 모습을 그려본다. 바람이 세게 불어도 날아 갈듯하게 여리디. 여리고 소리만 크게 쳐도 눈물을 흘리던 사람이다. “내가 시집와서 아들딸 낳아주고 없는 살림알뜰하게 살아 주었고 못하는 일 없이 다 잘했는데 당신은 나에게 뭐하나 해준 것 없이 데려다 이렇게 망쳐(늙혀) 놓았다” 아내는 걸핏하면 이런 말을 녹음해놓고 적시에 재생하고 있다. 여든 두 번만 더하면 백 번째는 될 것이다. 허나 그게 어디 동민이 때문에 늙은 것인가? 모두가 가는 세월이 그랬지……. 중매로 맞선을 보던 날 “나에게 시집오면 형편없이 고생해야 할 것이다.” 라고 했는데 그래도 괜찮다고 젊어서 고생은 당연한 것 아니냐고 하던 야무진 말과는 달리 여리디. 여려서 사랑으로 덮어주지 않으면 추위에 떨거나 얼어 죽을 것만 같던 그녀가 시집와서 없는 살림 꾸려나가느라 이토록 대단해져 가고 있었다. 신접살림 살림도구 별로 없어 덩그런 셋방 한 구석에 둘이 누워도 모서리 한귀 퉁만 차지하던 것이 이제는 커다란 내 집 넓은 방이 적을 정도로 들어찬 살림도구 때문만이 아니더라도 부부가 들어서면 좁을 지경이다. 결혼 전에 나는 나무젓가락 같이 마르고 아내도 빌기 먹은 듯이 불쌍한 모습이었는데 장가들고 아내의 알뜰한 거둠(?)으로 살이 두럭두럭 하지만 아내역시 볼 장 다보고 보따리만 볼품없이 커진 것 같이 장난이 아니다. 언제 이렇듯 변해버린 아내에게서 진한 연민의 정이 콧등을 시큰거리게 한다. 가슴 설레고 얼굴 붉어지는 아릿한 연해 한 번 못해보고 좋은 시절 다 지나갔다고는 하나 아직 인생의 절반 밖에 지나가지 않았으니 아내가 따라만 준다면 충분히 재미있고 행복하게 오순도순 도란도란 살아갈 수 있지 않겠냐고 장담할 수 있다. 거대한 꿈을 가진 적은 없다. 그러나 오래전부터 꾸어오던 작은 꿈은 거의 이루어져 가고 있었다. 조용하고 아름다운 전원에 조그마한 집을 짓고 앞마당 양지쪽엔 잔디를 길섶엔 줄장미를 올리고 뒤뜰에서는 채소를 가꾸며 아내의 머리 위 흰 수건과 앞치마의 동그란 주머니를 바라보고 싶었다. 정원에 나무가 크게 자라면 아이들에게 그네를 매주고 밤이면 호롱불 밝히고 풀벌레소리 음악 삼아 글을 쓰고 책을 보며 아내가 끓여온 커피를 마주앉아 같이 마시며 밤이 깊어가는 줄 모르고 언제나 젊은 연인으로 늘 함께하는 친구로 살아가리라 했었는데……. 모든 것이 그럴듯하게 되어 가는데 마지막 한 가지는 바쁘게 살다보니 여유가 없어서인가 정서가 메말라가는 것인가 잘 될 것 같지가 않다. 생각이 여기까지 이르자 소년이 되어진다. 창밖의 달은 보름이 지난 짱구 얼굴로 소담하게 창문 옆 침대위에서 자고 있는 아내얼굴을 비추고 있어 어쩌면 아내가 이렇게 천사같이 보인다. 언제부터인가. 섬돌 밑에서 귀뚜라미가 찌르르 찌르르 울어대고 있으니 문학소년 기질이 발동 안할 리 없다. “각하 일어나시지” 동민이 아내의 옆구리를 슬슬 찔러가며 갓 새댁 때 토라지면 부르곤 했던 “심술각하”에서“심술”은 빼고 다정스럽게 부른 것이다. 늘 그렇듯이 은근히 젖무덤으로 올려놓는 동민의 손을 매정스럽게 뿌리치며 퉁명스런 잠꼬대다. “왜 또 그래요…….” 한마디 하고는 또 칭칭 잠에 감겨들려고 한다. “각하야! 달도 밝고 산들바람불어 코스모스 꽃이 살랑이고 귀뚜라미 울어대는 가을이 깊어 가는데 우리 밖에 나가 손을 꼭 잡고 저 꿈과 낭만의 동산 길을 한바퀴 걸으면서 이야기나 합시다. “.....” “응, 어때 내 생각이?” 감정을 풍부하게 부풀려서 시낭송 하듯이 아내의 귀에 대고 조용하게 데이트신청을 해본다. “이이가 미쳤나? 피곤해 죽겠는데 잠이나 자요” 아내의 퉁명스런 일언지하의 명언(?)에 부풀었던 오색풍선에 꿈도 따뜻하게 가슴에 달아오르던 열기도 차갑게 식어 굳어지고 있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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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홍천예술인연합회
글쓴이 : drdol(돌박사)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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