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 작품

봄 봄

돌 박사 2023. 2. 13. 13:06

봄 봄

글 : 석 도 익

파란 하늘이 끝 간 데 없이 높아가고 청아한 들국화가 시리게 피어나는 들녘에는 후덕한 여인의 젖무덤 같은 낟가리가 봉긋봉긋 하나 둘 쌓아져 갈무리되고 나면 허허로운 바람만이 거침없이 낙엽을 몰고 다닌다.

황금들을 지키던 후줄근히 늙은 허수아비만이 서있을 뿐 모든 것이 달팽이같이 움츠려 동면의 긴 잠을 준비할 즈음이면 한여름 내내 토실 해진 농우는 바빠진다.

게으른 되새김질과는 다르게 힘차게 끌어당기는 밭갈이 보습 날에 일구어지는 기름진 밭이랑 따라 농부 아낙의 투박한 손에서 보리씨앗이 촘촘히 뿌려져 생명으로 뿌리내린다.

중부지망 이북으로 기름진 텃밭이 보리밭이 되고 이남 지방에는 논이 보리밭이 된다.

지금은 가난에서 벗어난 지 오래되어 중부지방에서는 보리밭을 찾아보기 힘들지만 서리꽃이 하얗게 필 때면 이랑 긴 보리밭에는 봄이 벌써 왔나 하는 착각 속에 파란 싹이 여리게 덮어져 초겨울의 썰렁함을 메워주곤 하였다.

나의 어릴 적 기억으로는 겨울이 무척이나 길고 추웠다. 십일월 초순부터 가재 잡던 맑은 냇물이 꽁꽁 얼어붙어 유리 같은 얼음장 밑에 송사리 떼의 한가한 몸짓이 보이고 아버지가 만들어주신 발구를 타고 놀다 얼음이 깨져 솜바지 적시던 겨울...... 겹겹이 쌓이는 눈은 그대로 굳어져 그 위로 봄이 왔다.

따뜻한 양지쪽 언덕 밭에는 눈 속에서 이미 봄을 준비한 인동의 파란 보리 싹을 제일 먼저 볼 수 있었던 봄, 보리밭! 그것은 춘궁기의 희망이며 생명을 부지할 수 있는 최후의 보루였다.

지금도 보릿고개는 가난의 상징어로 전해지는 우리 선대들이 가장 넘기 힘들었던 높고 높은 산이었다.

쌀 다음으로 주곡인 보리! 보리는 강하고 지순한 우리네 농민이고 우리네 어머니를 닮았다.

가난을 숙명처럼 머리에 이고 참고 견디어온 순하고 질박한 삶. 맛도 냄새도 투박하게 그저 생명을 질기게 순종해 온 여인네 그리고 보리!

우리 나라 기후에서 유일하게 2모작을 할 수 있는 곡식으로 한해의 반을 생명을 부지하게 해주는 곡식이었다.

일제의 들쥐가 갈취하고 간 빈창자에 다시 피로 얼룩진 동족상잔의 화약 냄새가 아지랑이처럼 어지럽던 산하를 뒤져가며 나물과 나무껍질로 여린 맥박을 이어가던 굶주림의 시절에 보리밭은 우리를 다시 일으켜 세운 위대한 우리의 젖과 꿀이 되어주었다.

보리밭 녹색 물결위로 종달새 높이 날며 노래하는 아름다움보다는 어서 줄기마다 배가 불룩 불러오고 털이 숭숭한 이삭이 태어나길 기다렸다.

악을 쓰며 울어대는 매미소리가 숲을 누비면 텃밭에도 자주감자 꽃이 별처럼 돋아나는 하지를 기다리며 굵어진 감자알을 캐려다 조그만 감자가 딸려 나오면 다시 다독거려 묻어두며 조금만 더 크거든 캐야한다던 어머니의 여축된 마음이 더 허기를 지치게 할 즈음이면 검푸르던 보리밭도 황금물결로 다가온다.

피골이 상접한 가족을 외면하지 못한 어머니는 무명치마 말아 올린 앞섶에다 얼추 여물어 가는 보리이삭 섬섬히 골라 뽑아 담아서 가마솥에 들들 볶아 디딤 방아에 쿵쿵 찧어서 고운 껍질가루는 개떡 빚어 올망졸망한 아이들에게 쥐어주고 보리쌀은 질경이 뜯어다 함께 넣고 보리죽 쑤어 한 사발씩 떠주니 흥부전이 따로 없다.

아이들 게 눈 감추듯 두어 그릇 먹고는 장구통같이 부풀은 배를 자랑하면 부모들 눈시울 적심도 잠깐 그것이 대견스러울 뿐이었던 우리들의 멀지 않았던 이야기다.

보리밭을 바라보며 허기져 넘었던 세월의 보릿고개, 가난이 한이 되어 우리도 잘 살아보자고 허리띠 졸라매고 죽기 살기로 일했다.

가난은 숙명이 아니어서 입맛도 까다로워지고 아이들 머리에 기계 충도 없어져갔다.

보리혼식을 강요하던 시절도 지나가고 이제는 살 빼는 약을 복용하고 돈을 내며 운동해서 비만을 치료해야 오래 산다고 야단들이다.

그렇게 맛있던 보리개떡도 지금은 개에게 던져주어도 개들도ꡒ뭐 이런 게 있어ꡓ 하고 거들떠보지도 않을 것이 분명하다. 어릴 때 보리밥을 먹고 자란 탓인지 보리밥만 보면 배가 살살 아파 오던 나도 꽁보리밥을 파는 식당에 가끔 가보고 싶어지는 것은 그 시절 추억에서일 것이다.

잊지는 말아야지. 그래도 보리밭은 우리들의 은인이었는데…….

농사가 천대되고 가뜩이나 우루과이라운드에서 패배한 이후 농촌에서는 농민들이 하나 둘 떠나가고 있지만 언젠가는 우리의 역사를 계속 지켜주는 보리 씨앗이 「올게 심니」의 마음으로 보존되어 가리라 믿는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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