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 작품

그리움으로 피어나는 꽃

돌 박사 2020. 7. 31. 11:11



상 사 화
석 도 익

아지랑이가 언덕에 피어오르고 백지 같던 햇빛이 두터워지면 서로 엉켜 얼어붙었던 흙이 제 색깔을 찾아 부드러워지기가 무섭게 굳은 땅을 뚫고서 제일먼저 파랗고 탐스럽게 솟아 올라오는 것이 상사화 잎이다.

연약한 듯하지만 강인한 상사초는 잎이 군자란이나 원추리 닮은 수선화과의 다년생이며 뿌리가 크지는 않지만 양파 같다.

다른 화초들은 늦게 나와서도 꽃을 먼저 피우는데 상사초는 이른 봄 무성한 잎줄기만 나와서 크다가 봄이 다 가기도 전에 잎이 시들어 버려 흔적 없이 사라지고 만다.

한여름에 풀들이 무성하게 자라나 상사초가 어디에 있었는지 조차 모르게 기억 속에서도 잊혀진다.

검은 먹구름이 몰려와 소나기 한줄기 뿌리고 지나가고 청개구리 소문나게 울던 밤, 물 젖은 수박 달이 대추나무 가지에 걸려 개똥벌레의 불빛을 시샘하는데 뻐꾸기 새끼가 자신보다 몇 배 큰 남의 자식을 먹여 키우느라 더 왜소해진 멧새의 기른 정도 무시하고 양부모의 친 새끼를 밀어내 떨어트리는 무정한밤. 흔적도 없던 상사화가 땅속에서 꽃대를 힘차게 밀어 올린다.

약지 손가락만 한 굵기의 꽃대는 60센티 이내의 높이로 불쑥 올라와 새벽 물안개 속에서 드러난 돛대모양 꽃을 피운다.

한 뿌리에 한 대씩 멀쑥 올라온 꽃대 끝에 엷은 담홍 자색의 꽃잎은 백합꽃 같고 여섯 꽃잎에 여섯 꽃송이고 암술 하나 수술 여섯의 꽃술이 가지런하게 박혀있다.

기다란 꽃대 끝에 가지런하게 피어있는 꽃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꽃이라기보다 슬픔을 간직한 비화(悲話)를 보는 것 같은 애잔함마저 간직하고 고고하게 피어있다.

상사화는 잎이 먼저 피었다 죽어버린 오랜 후 다시 꽃만이 혼자 외롭게 피어나서 서로 만날 수 없는 운명이라 그 전설도 애잔한 상사화라 하는데 달빛 흐르는 밤에 보면 스산할 정도로 소복한 여인의 형상 같이 한에 사무쳐 보인다.

우리는 수많은 인파 속, 요란한 소음, 아귀다툼인 삶의 여정에서도 가슴 허전한 고독에 외로워하고 가끔 앞가슴 파고드는 한기에 추위를 느끼며 따스한 정을 그리워하며 산다.

무엇으로라도 채워지지 않는 아련한 것 그리움일수도, 이루지 못한 사랑일 수도, 꿈 일수도 있다.

누구나 가슴깊이 묻어놓고 살아야하는 사랑의 꽃씨하나, 누가 볼세라 감추어 두고 들을세라 침묵하고 알세라 숨죽이며 꼭꼭 숨겨놓고 나만이 은밀하게 바라보고 이야기하고 위안 받으며 살며시 미소 지으며 행복해하고 혹은 몸부림치며 그리워하는 그것은 언제 어떻게 피어날지도 모를 잎이 다진 상사화 같이 꽃대하나 힘차게 밀어 올리지 못하는 상사화의 뿌리하나가 언제나 가슴속에서 은둔하고 있다.

위선의 옷을 입고 거짓의 웃음을 웃어가며 남을 위해 산다.

하루를 행복할 수 있다 하여도 그 뒤에 남은 다른 나날들 때문에 용기 없이 가슴속에 상사화의 꽃씨를 발아시키지 못하며 어설픈 광대곡예에 대리만족을 느끼며 죽은 듯 살아간다.

나를 위하여 나는 무엇을 할 수 있을 것인가?

먹고 자고 그게 전부인 것을…….

무성한 숲 속에서 외로움의 손짓 같은 상사화는 이 밤에 희게 빛나 한 맺힌 색깔로 다가서는가?

가슴 어딘가에 구멍 뚫린 부분을 메우고 있는 진정한 사랑의 씨앗으로 나를 지탱하고 있는 너는 진정 무엇인가? 나의 설계 속에 언제나 주인공인 너를 위해 살고 싶다.

상사화여 다음봄날은 잎과 함께 피어나 다오 한을 풀어버리고 사랑하며 노래하며…….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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