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꽃 무궁화방

무궁화 우리말 뿌리(모셔온 글)

돌 박사 2019. 9. 20. 16:19

 

무궁화의 우리말 부리  (좋은 글이라 모셔 왔슴니다.이 글을 쓰신분께 감사드립니다.)

 

무궁화에 대한 명칭은 모두 40여 가지나 된다. 이러한 많은 명칭 가운데‘무궁화(無窮花)’로 기록된 예는 우리 문헌에만

나타나 있다. 이것으로 볼 때 무궁화에 대한 우리말의 뿌리가 분명 있을 것이다. 이것을 알아보기 위해서는 위에 언급한

우호익의 〈무궁화고〉와 검정상의 《무궁화보》중 〈무궁화의 원명고〉부분과 류달영·염도의 공저 《나라꽃 무궁화》에

실린〈무궁화의 우리말 뿌리〉, 또 이러한 연구들을 정리해 놓은 〈나라꽃 무궁화의 어문학적 고찰〉이라는 연구 논문 중

‘무궁화 명칭의 국어학적 고찰’이라는 부분을 비교·분석하여 결론을 얻어야 할 것이다. 허나 편찬자의 식견이 부족한 관계로

위의 관계 내용만을 차례로 나열했을 뿐 결론을 짓지를 못했다. 이에 대한 후학들의 연구가 계속되기를 바라는 바이다.

▲<무궁화보>

 

무궁화의 원명고(原名考)

무궁화가 외국에서 들어온 것이 아닐진대 이에 대한 우리말 이름이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중국에서 부르는 근(槿), 우리 나라에서도

근화방(槿花邦)이라 쓰는 근의 이름이 엉뚱하게‘무궁화’로 전화(轉化)되었음은 반드시 근의 우리말 원명에서 무궁화로 전화된 듯한 의심이

풀리지 않는다. 이제 필자(筆者)의 체험을 부회(附會)하여 그 우리말 원명을 추고(推考)해 보려한다. 필자는 만기 4256(서기

1923)년 여름에 완도군 소안면 비자리(莞島郡所安面榧子里) 앞 바닷가에서 수십주의 굵은 무궁화를 보았다. 오동보라색과 노란꽃이

난만히 피어 있었다. 반가운 마음에 그때의 나라 잃은 젊은이들은 무궁화를 내 나라인양 사랑하였다. “아, 무궁화가 피었구나” 하고

반겨했더니 내곁에 있던 오십 넘은 늙은이가 놀래는목소리로 “아,저게 무궁화요” 한다.

“영감은 무궁화를 오르시오?” 하고 반문했더니 그는 말하되, “무궁화동산이니 무궁화벌판이니 해도 무-게가 무궁화인 것은 처음

듣소이다.” 필자는 즉각적으로 이 지방이 한자말이 적은 곳임을 알았다. 그리고 이 고장에서는 무궁화라는 꽃이름 보다‘무-게’라는

꽃이름이 앞섰다는 사실을 발견하였다. 그 이튿날 필자는 다시 같은 군 신지면 신리同那 新智面新里〕에서 임정현(任鼎鉉) 소년의 책

속에서 한 송이의 마른 무궁화를 발견하였다. 이상하게 생각되어서 물어보았다. “자네도 무궁화를 좋아하는 모양일세그려, 그러나 마른

것을 간직할 거야 있나?” “무궁화가 하도 그리워서 외국間島〕에 계시는 계부님(임재갑)께 청해서 한송이를 얻어 왔는데, 마른 것이라

분간할 수가 없소이다. 무-게꽃 같기는 한데 우리 마을에도 무-게꽃이 많이 있으니 좀 보아주시오” 하였다. 어제의 소안도 노인과 좋은

대조임을 생각하면서‘안셈등’이라는 부락에서 두길이나 되어 보이는 큰 무-게나무를 보았다. 보라빛 꽃이 한창이었다. 자리는 역시

울타리였고 유성온천에서 본 것보다 큰편이었고, 서울 죽청장(최창학씨 집)에 있는 것보다는 작았다. 완도 지방에 사는 한 분의 무식한

노인과 한 소년의 학생이 무-게는 알되, 사방에 흩어진 무궁화를 알지 못함은 무슨 까닭일까? 이 꽃의 우리말 원명이 무궁화가 아니었던

듯한 의심이 짙어졌다. 그해 겨울에 필자는 구례(求禮)에 갔을 때에 토지면 파도리(土旨面把道里)에 계시는 백부님[金章技,

당시76세〕께 물어 보았다. “무-게라는 꽃이 무슨 꽃이며 한자로는 어떻게 쓰는가요?” 했더니,

“애국이니 독립이니 하고 돌아다니면서도 무-게가 목근(木槿)인걸 모르는 무식을 면치 못했구나” 옥편에서‘槿’자를 찾아 보여 주시면서,

“槿-무궁화 ‘근’이라 하지 않았니? 이것이 곧 무-게근자니라. 중국서는 목근이라 하고 우리 나라에서는 무-게라 무궁화라 하는

것인데, 《동의보감》에도 무궁화라 했고, 《한거만록(閑居漫錄)》이라는 잡서에는 목근-속명-無窮花, 《시전》에 이른바 순영이라

적었는데《시전》에 여자와 수레를 탔는데‘얼굴이 무궁화 같다’한 데가 있느니라. 그리고 정다산 의 《산림경제》에는 舞官花(무관화)라

쓰였는데 官(관)은 宮(궁)자를 잘못 쓴 것이다. 무-게는 산과 들에 야생은 거의 없고 인가 근처나 밭가에 심어 있는데, 이것은 여러

가지 병을 낫게 하는 약성이 있을 뿐 아니라 장기를 제거하는 고로 옛적부터 인가 근처에 심는 습속이 생긴 것이다. 춘추전국시대에 중국

피난민들이 우리 나라에 왕래하면서 도처에 무궁화가 피어서 평화로운 꽃밭이 되어 있으므로 《산해경(山海經)》이라는 책에 동방에 무궁화가

많다고 씌어 있고 우리를 가리켜 근화인(槿花人)이라 불렀으며, 고려 때에 중국에 보내는 국서(國書)에 근화향(槿花鄕)이라 쓰던 일도

있느니라. 그리고 이 지방에서는 ‘무-게’라 하던 것을 개화된 뒤에 무궁화로 부르게 되었고 근역(槿域)이라는 간단한 말을

무궁화동산이라고 알기쉽게 고쳐서 부르매 일반이 다 무궁화로 알 게 된 것이다. 고려시절에는 무-게를 사랑하고 심고 하던 풍속이 옛

책에 보인 데가 많다” 고 하셨다. 필자는 무궁화에 대한 설명을 뜻밖에 자상하게 들었다. 갖가지 문적에 손을 대게 된 것도 여기에서

출발하였다. 그래서 이렇게 생각해 보았다. ‘槿’-무궁화-無窮花-무-게, 한 개의 꽃에 여러가지 이름이 붙어 있는데 어느 것이

우리말의 원명인가를 알아보려 하였다. 중국에서‘근’이라 하든지 일본에서‘후구계’라 하든지 이것은 이 꽃의 체계를 찾는 데 필요한

참고가 될 뿐이오. 이 이름들이 모두 한 개의 꽃에 딸려 있는 꽃이름이매, 각기 그 국어와 글자에 따라서 그 표현이 다른 것 뿐이므로

우리는 權이나 후구계에 관계할 것은 없고 우리 땅이 원산인 이 꽃의 첫 이름[原名〕을 찾을 따름이다. 이 꽃을 정음(한글)으로

무궁화라 적은 것은 옥편이 처음인데, 세종왕께서 손을 대게 된 것이매 이것이 가장 오래된 기록이다. 한글이 나오기 전에는 물론

무궁화거나 無窮花 등의 기록은 없었는데, 이 꽃을 입으로 부를 때는‘무-게’‘무궁화’등으로 표시하고, 글자로 적을 때는 '槿’으로

쓰던 것으로 추단(推斷)되는데 한 예를 이 끌어보면 한일합병 당시 의친우우조서(懿親優遇調書)에‘령문숙창 근역천망(令聞夙彰

槿域賤望)’의 구절이 있는데, 당시에 개화풍이 거세게 불어오고 도처에서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을 외치던 그날에도 무궁화 동산으로

표시하지 않고 근역으로 쓰는 것은 한문체의 술능화(術能化)에 인함인 듯한데 글을 쓸 때에 한문의 술능에 따라서 槿으로 쓰고 말로 부를

때에는 말뜻이 분명치 못한‘무-게’보다 소리와 뜻이 서로 통하는 無窮花로 부르던 것인 듯, 무궁화는 무-게의 전환(轉換)인 동시에

한자 無窮花로 전환되고 한자 無窮花의 소리는 우리말 무궁화로 적어 둔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그리하여 한문의 발전과 함께 원어이던

무-게는 한자 無窮花로, 또 국어 무궁화로 굴러서 이 꽃의 원어격을 이루었다.

정음(한글)으로 근(槿)자에 해설을 붙일 때에‘무-게’라는 말을 한자의 뜻과 소리에 맞추어 대기할 수 없으므로(종음대기는 말뜻이 통치

못함)‘무-게’라는 말뜻을 알 수 없는 속명(俗名)을 버리고‘무-게’의 첫소리에 맞는 무궁화로 해설을 붙인 것인 듯한데 정음으로

무궁화란 해설을 붙인 것은 종음표기(從音表記)뿐이오 그 말 뜻인즉, 이 꽃의 분포가 넓으매 번식이 무궁하다는 뜻, 꽃피는 시기가

백일을 넘으매 꽃때가 무궁하다는 뜻, 수령(樹齡)이 만6천년설이 있으매 수명이 무궁하다는 뜻, 자연에 풍부하매 쓸모가 무궁하다는 뜻에

다시 여천지무궁(與天地無窮)이라는 한자숙어(熟語)와‘무-게’의 첫소리에 맞는 무궁에 다시 꽃이라는 화(花)자를 붙여서 아화(雅花)된

無窮花의 소리 무궁화로 적어서 이 꽃을 한없이 사랑하는 의미를 포함시킨 것이 아닐까 추단되는 바이다. 이에 한자의 해설에서 그 실례를

이끌어 보건대 否-살구 행 挑-복숭아 도 이런 것은 우리말로 해설된 것이오. 梅-매화나무 매 菊-국화 국 이런 따위는 이 꽃에 대한

우리말이 없었거나, 혹은 속명을 꺼리어 한자 그대로를 반복하여 설명한 것이다. 그러므로 槿에 우리의 고유한 말이 없었다면 이상의 예에

따라서‘權-근화나무 근’으로 해설되었을 것인데, 왜 근의 해설에 한자의 음의(音義)에서 취해진 無窮花의 소리 무궁화로 적었는가?

해설에 대한 설명을 불 수 없음이 적막한 동시에 너무도 거리가 멀다고 생각되는 바이다.

 

‘무-게’의 전음이 무궁화로 전화된 듯 하다함은 이상에서 말한 바와 같거니와 무궁화라는 말이 보편화됨은 어느 때부터였는가? 이에 대한

고증을 들추어 보건대 단기 4258(서기 1925)년 10월 21일부터 동아일보 학예란에‘조선의 국화 무궁화의 내력’이라는 제목에

“아마 지금으로부터 25년전에 조선에도 개화풍이 불어오게 되고 서양인의 출입이 잦게 되매 당시의 선각자(先覺者) 윤치호(尹致昊) 선생

등의 발의로 양악대를 비롯하여 애국가를 창작?할 때에 애국가의 뒤풀이에‘無窮花삼천리 화려 강산’이라는 구절에 비로소 근화(槿花), 즉

무궁화를 無窮花로 쓰기 시작한 것인 듯하고 이와 동시에 도산(島山) 안창호(安昌浩) 선생등이 맹렬히 민족주의를 고취할 때에 연단에 설

때마다 가두에 부르짖을 때마다 주먹으로 책상을 치고 발을 구르면서 우리 무궁화동산을 절규하매 여기에서 자극을 받은 민중은 귀에 젖고

입에 익어서 무궁화를 인식하고 사랑하게 된 것이다.”라 하였다. 무궁화를 無窮花로 적은 것은 《한거만록》이 수백 년을 앞선 것이나

이때부터가 아니라'무-게’가 무궁화로 널리 알려진 것은 개화 이후였다는 김장현(金章鉉)옹의 실화와 부합되는 것이오, 무궁화가

조선국화라고 적힌 것도 이 신문이 처음인 듯 개화 이전에는 근이거나 무궁화가 모두 책 속에 적혀 있을 뿐이었고 민족의 인식에 들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면 옛적부터 근화국(槿花國)으로 알려진 우리 민족이 어찌하여 시문(詩文)으로 그림으로 노래로 읊고 그리고

노래하지도 아니했고, 심고 가꾸고 보호하지 아니 하였던가? 여기에는 어떠한 이유가 없지 아니할 것이다. 우리 민족이 예로부터 자연을

이용하되 애호육성에 등한했던 자체가 많은데 무궁화에 있어서도 그의 물질적 가치와 정신적 가치를 이용했을 뿐이오. 애호 육성에 등한했던

것은 지금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그 자체가 잘 사는 나무라 스스로 번식되어 방곡에 퍼지게 되매 전국시대의 중국인들이 피난차로 왕래하면

서 평화스럽게 피어 있는 것을 보고 《산해경》에 근화국으로 기록하고 또 우리 민족을 가리켜 근화인(槿花人)으로 지칭하였으니, 실은

중국인들이 지적하든 근역(槿域)이오, 근화인으로서 말하자면 타칭적(他稱的)인 근화국이오, 우리 자체는 근화에 대한 독자적 기록도 없고

문헌도 없었다. 다만 《동의보감》에 약성을 적어 놓은 것 뿐이다. 이렇게 우리 민족이 무궁화에 대한 정서적(情緖的) 인식이 부족한

데다가 다시 이조(李朝)에 들어서 이화(李花)를 왕실화(王室花)로 선정하매 무궁화를 돌아보지 않게 됨도 한 이유요, 일본 침략시대에

들어서 일본인들이 무궁화를 독립운동자와 같은 감정으로 대하여, 나무 심기를 좋아하던 그들이 무궁화는 심지 아니하고 또 심지도 못하게

하였다. 이제 왜기(倭記:고등경찰사전)의 1절을 이끌어 보건대, “無窮花는 조선의 대표적 꽃으로서 거금 2천백여년전 지나(중국)에서도

인정된 문헌이 있다. 고려조 시대에는 전 국민으로부터 열광적 사랑을 받았으며 문학상 의학상에 진중한 대우를 받았는데 일본의 사쿠라,

영국의 장미와 같이 국화로 되어 있다가 이조에 들어서 왕실화를 이화로 정하매 무궁화는 점차로 세력을 잃고 조선 민족으로부터 소원해졌던

것인데, 20세기의 신문명이 조선에 들어오매 유지들은 민족 사상의 고취, 국민정신의 통일진작에 노력하여 붓과 말로 천자만홍의 모든

꽃은 화무삼일홍(花無三日紅) 이로되 無窮花는 여름 가을에 걸쳐 3, 4개월을 연속해 피고 그 고결함과 위인적(偉人的) 자용(姿容)을

찬미하였다”따라서 無窮花강산 운운은 자존된 조선의 별칭인에 대정 8년[己未운동] 이래 일반에게 호용 (呼用)되었으며 주로 불온의

의미를 붙인 것이니 근화, 無窮花강산, 근역(槿域) 등은 모두 불온한 문구에 쓰는 것이다.”고 하였다. 불온의 대상인 무궁화는 심지도

가꾸지도 그리지도 못하게 하고 별명을 '눈에 피꽃’이라 붙여서 무궁화를 천시케 하였는데 이렇게 반세기를 오는 동안에 무궁화는 다시

빛을 잃게 되었었다. 그러나 왜가 없는 오늘에도 심지도 가꾸지도 아니하되(전연 없지는 않지마는 넓게 보아서) 그 이름과 모양만을

이용하고 있음은 매우 딱한 사정이다. 이상의 견해로 보면 이 꽃은 중국에서는 근, 우리 나라에서는‘무-게’가 원명인 듯하다.

일본에서는 옛적에‘아사가오(朝類)’로 통칭하다가‘아사가오’는 따로 임자 견우초(牽牛草)가 있으매 우리 무궁화의 원명을 수입하여

임도춘(林道春)이 ‘후구계’로 변작한 것인 듯한데 이‘후구계’는 우리 무궁화와 무-게의 중간을 취한 것이 아닐까 생각되는 바이다.

‘후구계(ムクゲ:무쿠게)’는 無窮花의 전음이라는 잡지 《조선》의 추론(推論)을 우호익(禹浩翊)은 지지했으나(조선 및 조선민족 제1집에

발표된 씨의 무궁화고), 무구게가 無窮花의 전음일진대 후구계로 적지 않고 후구화로 적었을 것이 일문법상으로나 전음의 습성(習性) 및

편의성(便宜性)으로 보아서 당연한 것인데 한자로 무구게(무久計)라 적었음은 끝에 글자‘計’는 花자를 의미한 것이 아니고, 분명히

우리‘무-게’의 ‘게’음을 그대로 표현시킨 것이다. 그리고 또 無窮花라는 한자대기가 처음 보이는 《한거만록》이 ‘후久計’가 처음

나타난《다식편(多識篇)》보다 21년이 뒤졌으매 無窮花라는 글자가 나타나기 전에 전음(轉音)이 생길 수 없음은 상식으로 판단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때는 임진왜란을 겪은지 겨우 20여년 되는 시대로서 꽃이름 정도의 문화가 교류됨직한 시기도 아니매 이것은 임진왜란에

7년을 우리 땅에서 분탕하던 왜들이 흔다한‘무-게’를 보고 가서 임도춘의 질문에 분명한 이름을 대주지

못하고‘무-게’라던가‘무궁화’라던가 어물거리는 꽃이름을 임도춘은 무와 게의 중간에 무궁화의 중간음 궁음을 넣어서 ‘후久計’로 변작한

것인 듯‘후久計’의 일본 소리는 ‘무구게’로서 우리말로는 정확한 발음이 어려우나, ‘무궁에’로 내는 것이 근사한데 발음상의 성질로

보아도‘무-게’'무궁화’와 두 이름을 합하여 변작한 것이오. 임도춘의 자존심으로는 제나라에 이름 모르 는 꽃이 있도록 그 국어의

발전이 늦었음을 허락하고 싶지는 않고 그렇다고 해서 남의 나라 꽃 이름을 그대로 쓰기도 허락되지 아니하므로 이러한 변작으로 어물거려

둔 것이 분명한데, 이로써 보면‘무-게’‘무궁화’가 이 꽃의 원명이었고 한자말로 된 무궁화 보다‘무-게’가 옛 것인 듯한데 어의가

밝지 못함에서 음의가 합치되는 무궁화로 부르게 된 것임은 무단한 억측만은 아닐 듯하다. 그리고 금태장삼랑의 “무구게는 목근(木槿)의

전음”이라 함은 부당한 말이다. 목근의 중국어 발음이 ‘무-친’혹 지방말로‘무-킨’인데 첫소리는 그렇다 하고 끝소리는 거리가 너무 먼

것이 아닌가. 그리고 또 옛적에 일본의 한문화 수입이 거의 우리 나라를 거쳐간 것이매 목근의 말 수입은 없었을 것이므로 금태설은

억만으로 생각되는 것이다.

 

무궁화의 우리말 뿌리

무궁화의 원산지를 영국의 식물학자 포르브스와 헨스라이는 인도와 중국이라고 했고, 러시아의 부레이스 제네델은 중국 대륙이라고 단정했다.

일본의 무라고시[村越]는 인도와 중국 대륙과 소아시아 지방이라고 하였다. 그런데 중국의 여러 옛 문헌에 한반도와 관련하여 무궁화가

여러 곳에서 나타난 것으로 미루어 한반도도 무궁화의 원산지 중 한 곳이라는 것을누구도 부인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렇다고 하면,

반드시 한국 특유의 식물 이름이 있었을 것이 분명하다. 중국 문헌에 나오는 무궁화의 그 많은 이름 가운데‘무궁화(無窮花)’로 씌어진

것은 아직까지 발견되지 않고 있다.

무궁화을‘無窮花’로 쓰는 것이 옳은 것인지 또는 ‘無宮花’로 쓰는 것이 옳은 것인지, 이에 대한 문제는 이론(異論)이 많았었다.

더구나 그 서로 다른 의견을 주장한 주인공이 원 예 작물과 화훼에 대하여 많은 시를 남겨 놓은 이규보(李奎報)였다는 점에 대하여

우리는 진지한 흥미를 느낀다. 또 박물학의 대가인 홍만선(洪萬選)이 쓴 《산림경제(山林經濟)》의 양화편(養花篇)에는 근(槿)은

무궁화(無官花)라고 되어 있는데, 이것은 궁(宮) 자가 관(官)자로 잘못 인쇄된 것으로 믿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舞官花’의 官은

宮을 官으로 잘못 썼거나, 인쇄 당시에 오식한 것이 아닐 것으로 믿고 싶다. 그 까닭은‘無官’으로가 아니라, ‘舞官’으로 舞자를

썼다는 점에 중점을 두고 생각해 볼 일이다. 官 을 宮의 오자로 주장한다면 舞자도 無의 오식으로 생각하게 될 것이다.‘無宮’과는 아주

다른‘舞官’으로 썼다는 것은 그 당시 우리말의 무궁화 명칭이‘무강’이나 ‘무관’은 매우 비슷한 발음으로 지역에 따라서 넘나들 수가

있다. 홍만선이 무궁화를 舞官으로 썼다는 사실이 더욱 우리말 옛 뿌리에 해당하는 명칭이 있었다는 것을 입증하는 것으로 믿고 싶다.

덧붙여서 말하고 싶은 것은 무궁화는‘무우게’, ‘무게’, ‘무강’으로만 불리어 졌던 것이 아니라, ‘무관’에 가까운 발음으로도

씌어졌던 것 같다. 옛 선비들이 즐겨 쳤던‘無疆’이라는 단어를 쓰지 않고 어색하게‘舞官’이라고 썼으니 말이다. 어찌 되었건 무궁화의

우리말 고유의 이름이 있었을 것이고, 그 이름은‘무우게’, ‘무게’, ‘무강’, ‘무관’, ‘무구게’와 유사한 것이었을 것으로

믿어진다. 이런 것은 지금은 분명히 알 수 없는 무궁화의 우리 말 옛 이름을 모두 나름대로 한자로 음을 맞추어 쓴 것이라고 믿어진다.

특히 우리의 관심을 끄는 것은 무궁화의 일본말 이름이다. 일본에서는 무궁화가‘아사가오〔朝類〕’라는 이름으로도 널리 씌어 왔었는데,

나팔꽃이‘아사가오’로 더 널리 씌어지면서부터 그 뒤 혼동을 피하기 위하여 무쿠게〔ムグゲ:牟久計〕라는 옛 말을 다시 쓰게 되었다는 것은

이미 위에서 설명한 바와 같다. ‘무쿠게〔牟久計〕’는‘아사가오’의 고칭(古稱)이라고 하였고, 목근(木槿)의 전음(轉音)일 것이라고도

하였다. 그러나 나의 추측으로는, 무궁화가 한반도에서 건너간 꽃나무라는 것이 확실한 이상 반드시 한국 이름이 붙어 갔을 것이며, 그

이름이 그대로‘무쿠게’로 오늘까지 남아 있게 된 것이라고 믿어진다. 최초에 건너간 이름 그대로가‘무쿠게’인지 오랜 세월에 다소

변해서‘무쿠게’로 된 것인지는 분명히 알 길이 없다.‘ムグゲ’를 한자로‘牟久計’로 쓴 것은 옛 한국말을 한자로 음만 맞추어 쓴

것이라는 추리를 하지 않을 수 없게 한다. 우리 옛 말이 일본으로 건너가서 그대로 일본말로 굳어진 것은 헤아리기 어려울 만큼 많다는

점을 우리는 기억해 두어야 하겠다. 몇 가지 보기를 들어 보면, 마을→무라(ムラ), 절→테라(テラ)로, 싸울아비→사무라이(サムライ),

섬→시마(シマ), 낫〔鐵〕→나다(ナダ), 밭→바다(バダ: 하타케의 옛말), 속→소고(ソゴ), 납→나마리(ナァリ: 紹),

나→나(ナ:옛말), 우리→와레(オァレ), 검→가미[方::神〕, 곰→구마[グマ:熊〕등이 있다. 또 한문이 들어와서 모든 기록을

한문으로만 하고 그 한자어들 중의 어떤 것은 우리말과 아울러 써오 다가 우리말은 쓰지 않게 됨으로써 이전에 있었던 우리말이 없어지고,

한자어만이 전용되어 온 것들도 적지 않다. 몇 가지 두드러진 보기를 든다면, 어제·오늘·‘내일’·모레·글피, 이렇게 때를 구별하는

단어에 있어서‘내일’만은 한자어로서 우리말이 지금은 쓰이지 않는다. 내일(來日)을 나타내는 순수한 우리말이 없었을 까닭이 없으나

오늘에는 찾아 별 방도가 없다. 셈수에 있어서도 하나에서 아흔 아홉까지는 순수한 우리말이지만 백은 한자어이며, 순수한 우리말인

‘온’은 지금에 와서는 잘 쓰이지 않는 말이 되어 버렸다. 백이라는 발음이 쓰기에 간편하여 그대로 굳어지면서, 백에 해당하는 우리말은

이제 거의 쓰지 않는 사어(死語)가 되어 버린 것이다. 무궁화도 無窮花·無宮花·舞官花 등으로 써 오다가 의미가 좋은 無窮花로 통일된

것 같다.

그러나 틀림없는 사실은 무궁화의 고유한 우리말 이름이 반드시 있었을 것이라는 점이다.

그런데 만의 하나라도 그 우리말 이름의 흔적이 남아 있다고 한다면, 그곳은 한문을 숭상하고 일상 용어에도 한자어를 즐겨 쓰는 도시나

양반들의 집단 거주 지역이 아니라, 문화권에서 벗어난 주변 지역일 것이고, 또 하나는 무궁화가 널리 퍼지기 쉽고, 잘 자랄 수 있는

기 후 조건을 갖춘 지역일 것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상식적으로 쉽게 생각할 수 있는 곳은 남부의 해안 지역이나 또는

섬들이 아닐 수 없을 것이다. 필자가 이러한 무궁화의 우리말 뿌리를 생각하고 있을 즈음에 찾아진 문헌이 바로 벽산(壁山)

김정상(金正祥)의 《무궁화보(無窮花譜)》였다. 이 문헌 속에 〈무궁화의 원명고(原名考)〉라는 항목이 있는데, 나는 이 논설을 값진

것으로 지지하고자 한다. 1955년에 처음으로 무궁화에 대한 역사적 고찰을 상세하게 한 《무궁화보》를 펴낸 김정상은 그 저서 중의

〈무궁화의 원명고〉에서 우리의 큰 관심을 끄는 조사(調査) 결과를 발표하였다. 그 발표문의 일부를 뽑아 간추려 보면 다음과 같다.

무궁화가 외국에서 들어온 것이 아닐진대 이에 대한 우리말 이름이 있어야 할 것이다. 필자는 1923년 여름에 완도군 소안면

비자리(莞島郡所安面榧子里)앞 바닷가에서 수십 주의 굵은 무궁화를 보았다.···〈중 략〉··· 그 분은 옥편에서‘槿’자를 찾아 보여

주시면서 “槿-무궁화 근’이라고 하지 않는가? 이것이‘무우게 근’자여. 중국서는 목근(木槿)이라고 하지만 우리

나라에서는‘무우게’또는‘무궁화’라고 하는데 《동의보감(東醫寶鑑)》에는 무궁화라고 했고《한거만록(閑居漫錄)》에는‘木勤-속명 무궁화’라는

기록이 있다.” 라고 하였다.

《무궁화보》의 저자 김정상의 이상과 같은 조사는 무궁화의 순수한 우리말의 뿌리를 찾는 데 있어서 매우 중요한 문헌을 남겼다고 할

것이다. 동일한 석물이 지방에 따라서 그 속명(俗名)을 달리하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그 일부분이 공통성을 가지는 경우가 적지 않다.

'무우게'라는 이름이 완도의 섬뿐만이 아니라 전남의 구례(求禮)에서도 노인들에 의하여 기억되고 있는 것을 보면, 이 이름이 비교적

넓은 지역에 걸쳐서 씌어졌던 것 같다. 그리고 전라북도 임피(臨皮) 지방에서는 지금도 무궁화를‘무게나무’라고 부르고 있는데,

이는‘무우게'을 짧게 발음한 것에 지나지 않아서 흥미를 끈다. 더구나 백제와 문화적으로 관계 가 깊었던 일본에서 무쿠게(牟久計)라고

불리어지고 있는 것은 무궁화의 원명의 뿌리를 찾는 데 있어서 중요한 단서가 될 수 있는 것이다. 만일 기호·영남

지방에서도‘무우게'처럼 무궁화의 옛이름이 찾아질 수만 있다면 원명은 더욱 분명해질 수 있을 것이다. 비록 일부 지역적인 조사에서

찾아진 것이라고 하더라도‘무우게’가 무궁화의 순수한 우리말 원명이거나 원명의 하나임에는 틀림이 없다.

한자로‘無窮花’,‘無宮花’,또는‘舞官花'에 있어서 그 첫 발음이 ‘무'로 시작되었고 또 한자어로서의 의미가 있도록 유의한 점을 엿볼

수가 있다. 또 하나의 흥미있는 것은, 뒤에 실은 이양하(李敭河)의 수필 중에 그의 친구가 무궁화를‘무강'이라고 하더라는 대목이

나온다. 이양하씨가 이미 고인이 되었고, 그 친구가 어디에 사는 누군지를 모르는 실정이지만, 호남 지방임에는 틀림이 없는

듯하다.‘무강'에 대해서도 더욱 밝힐 수 있는 날이 올 것으로 믿는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첫째는 무궁화가 우리 한반도의 자생 식물인

것을 부정하기 어렵고, 둘째는‘僅'자를 사용하기 이전의 우리말 이름이 있을 것으로 보이는데, 무궁화라는 이름은 전혀 쓰지 않았던

명칭이므로 무궁화라는 한자식 이름이 우리 고유의 나무 이름이라고 단정할 수 없겠으며, 셋째로는 무궁화는 당시에 쓰이던 우리말에 한문

글자를 맞춘 것일 터이므 로 무궁화의 원명은 발음이 무궁화와 매우 가까운 것으로 생각되고, 넷째로는 호남지방에서는 지금도

무궁화를‘무우게', 또는‘무강’으로 부르고 있는 것으로 미루어‘무우게'와‘무강'은 무궁화의 우리말의 뿌리로 보아도 좋을 것이다.

그러므로 무궁화를‘無窮花'로 쓰고 있더라도 그것은 우리말을 한자에 맞추어서 써온 것이라고 할 것이다.

무궁화 명칭의 국어학적 고찰

 

무궁화에는 많은 다른 이름들이 있다. 무궁화(無窮花, 無宮花), 목근(木槿, 木菫), 훈화초(薰華草), 근화초(童華草,

僅花草), 권황화(權黃華), 단( ), 츤( ), 순(舜, 蕣), 옥증(玉蒸), 화노옥증(花奴玉蒸), 일급(日及),

조균(朝菌), 학자화( 子花), 조개모락화(朝開暮落花), 조생모락화(朝生幕落花), 흡용(治容), 애로(愛老),

번리초(藩籬草), 일화(日華), 주순(朱蕣), 홍근(紅槿),적근(赤槿), 백근(白槿), 조근(朝槿), 조화(朝華),

조순(朝蕣), 조생(朝生), 모근(暮槿), 명근(瞑槿), 조춘(朝椿), 시객(時客), 황한(皇漢), 목화(木樺),

불상(佛桑), 부상(扶桑)등이 그것이다. 이들 이름들에는 주로 아침에 피었다가 저녁이면 지는 이 꽃의 생태와 관계되는

이름들이 많다. 또 이들 이름들은 거의가 중국(中國)의 것이다. 앞선 무궁화의 많은 이름들 중에서 흥미로운 것은 다른 모든

것들의 전거(典據)가 모두 중국인데 반해 유독 오늘날 우리가 부르고 있는 이름 무궁화(無窮花, 無宮花)의 두 명칭만은

중국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는 사실이다.

 

◀<무궁화명칭의 국어학적 고찰>이 실려있는 <한국학논집>

 

차차 밝히겠지만, 이는 위《산해경》에서 근 4천년 전에 우리 나라에 무궁화가 많다고 하였는데 그렇다면 이 꽃에 대한 순우리말 이름이

과거부터 있지 않았겠는가 하는 생각과도 연결된다. 목근(木僅)이니 번리초(藩籬草)니 하는 이름들은 중국·일본 할 것 없이 통용되어 온

이름들이다. 그런데 유독‘무궁화’라는 이름만은 중국에서도 일본에서도 사용 된 적이 없고 우리 나라에서만 쓰여 왔다. 더 구체적으로

무궁화라는 명칭은 이와 비슷한 이 꽃에 대한 순우리말 이름이 있었는데, 후대로 내려오면서 한자(漢字)로 음차(音借)되는 과정에서

無窮(무궁)·無宮 (무궁)등의 이름이 붙여진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다. 그러나 이러한 언어적 측면에서의 고려는 확실한 문헌자료가

나타나지 않는 한 선뜻 단정적으로 결론을 내릴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문헌자료에 의해 위의 가정이 신뢰성을 보장받지 못한다면, 그밖에

우리는 방언자료 등의 보조적 자료의 도움을 받을 수가 있다. 이 문제에 대해서 주로 방언의 도움을 받고, 그밖에 문헌 기록들을 참고

유추하여 접근하려고 한다. 또한 이러한 추정은 처음 시도하는 것이 아니라 앞선 이들의 이와 관련된 부분적인 논의가 있어 왔음을 밝혀

둔다. 이에 새로 찾아 낸 자료들을 포함하여 종합적으로 다시 거론하려는 의도이며, 이에 대한 새로운 학설을 제기하려는 것은 아니다.

무궁화란 명칭이 가장 처음 나타나는 것은 이미 살펴본 바와 같이 고려 때의 문장가 이규보(李奎報 l168∼1241)의

고율시(古律詩)에서이다. 이 시(詩)의 병서(幷序)에서 그는‘근화명(僅花名)’을 두고‘無窮(무궁)’이 옳다,‘無宮(무궁)’이 옳다

하고 다투는 두 벗의 이야기를 적고 있다. 그리고 이 두 벗들이 각각의 이름을 가지고 시를 짓고 자신에게도 지을 것을 요구하여 짓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덧붙였다. 이들 두 사람의 시(詩)가 남아 있었더라면 이 문제를 해결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을 테지만, 유감스럽게도

사정 이 그렇지 못하다. 여기서 우리는 먼저 이규보가‘僅花之二名(근화지이명)’이라고 하였음에 주목한다. 즉‘僅花(근화)’라는 이름이

본래 한자 문화권에서 통용되던 이 꽃의 이름이었음을 위의 표현은 말해 주고 있다. 그리고나서 이‘근화’라는 꽃을

당시에‘무궁(無窮·無宮 어떤 것이든)’이라고도 불렀다는 사실도 함께 알 수 있다. 그리고 당시뿐 아니라 지금까지도 이 꽃 을 두고

중국에서는 무궁화(無窮花)혹은 무궁화(無宮花)라고 부른 적이 없으므로, 이‘무궁’이란 이름은 당시 우리 나라에서만 부르던 이름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동시에‘無窮’이니‘無宮’이니 하며 싸웠다는 사실로 미루어 당시에 이‘무궁(혹은 이와 비슷한 말)’이란 이름의 한자

표기(漢字表記)에 보편적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았었다는 사실 또한 짐작하기에 과히 어렵지 않다. 이렇듯‘무궁화’란 이름이 처음 나타나는

이규보의 시(詩)는 이 명칭을 살피는데 있어 많은 시사를 우리에게 던져 준다. 이러한 이규보의 시가 주는 시사를 간직한 채, 시대를

뛰어넘어 1925년 10월 21일자《동아일보》의 기사를 이 문제에 국한시켜 살펴보면,

근화를 훈화(薰花)라고도 하고 혹은 목근화(木槿花)라고도 하엿스니 목근화를 그 당시 무궁화 비슷이 발음하여 오든 모양이람니다. 이는

지금 일본에서 무궁화, 즉 근화를‘ ’ムクゲ(무쿠게)라고 부르는 것을 보아도 그 당시 발음이‘무궁화’비슷이 혹은 화뎐

되여‘무궁화’라고 속향에서 불러내려왓는지도 모른다고 학자들은 말합니다. 그러나 근화, 즉 무궁화를 지금과 가치 無窮花라고 쓰게 되기는

극히 짧은 근대의 일이라 합니다... 그러나‘無窮花’라는 자를 쓴 동긔는 순전히 보기 좃코 뜻깁게 하노라고 쓴 것이지요···.

라고 하였다. 이 글에서 이 꽃에 대한 예전의‘발음 이 무궁화 비슷’하였다거나, 이를 또‘無窮花(무궁화)’라는 한자를 빌어 쓴

것이‘순전히 보기 좃코 뜻깁게 하노라고 쓴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점은, 우연찮게도 앞선 이규보 시(詩)가 던져 주는 시사와 놀라운

공통점을 보여 준다. 요컨대 이 두 글은 본래 중국명 槿花(근화)에 대한 순우리말 이름으로‘무궁화’ 비슷한 것이 있었는데 이것이

한자로 전차(轉借)되 어서 오늘날 無窮花(무궁화)라는 명칭이 나온 것이라는 짐작을 가능케 해준다. 그러나 이러한 짐작만 가지고 이

문제를 결정적으로 논단할 수는 없는 것이다. 여기에는 이에 값할 만 한 다른 방증이 있어야 한다. 이 문제를 검토하는 데 있어

조선조(朝鮮朝)의 초기에서 후기에 걸친 주로 사전류에 해당하는 여러 국어 자료들과 주로 전라도 지방에서 채취되는 방언들은 많은 도움을

준다. 먼저 문헌자료들을 살펴보자. 무궁화란 명칭이 나타나는 문헌들을 시대순으로 정리하여 실린 그대로 보이면 다음과 같다.

。 槿  也俗呼木槿花무궁화 《사성통해(四聲通解)》, 1517년 간행

。 僅 무궁화근俗呼木槿花 《훈몽자회(訓蒙字會)》, 1527년 간행

。 僅 무궁화근 《운회옥편(體會玉篇)》, 1536년 간행 。 木槿 무궁화 《동의보감(東醫寶鍵)》, 1613년 간행

。 木무槿긴花화, 무궁화 《역어류해(譯語類解)》, 1690년 간행

。 木僅花 무궁화 漢 木무槿긴花화 淸 모오연일하 倭무궁계노하나 《방언류석(方言類釋)》, 1778년 간행

。 僅花 무구o계노하나. 《왜어류해(倭語類解)》, 1786년 추정 。 木僅花 無窮花 朝華幕落 《사류박해(事類博解)》, 1829년 간행

。 僅-무궁화근, 木槿, 朝華幕落, 亦可食 白曰 , 赤曰 , 蕣, 舜 《자류주석(字類註釋)》, 1856년 간행

。 木槿(근)―名 ―名 ―名日及―名 (?)―名隕 무궁화玉篇 木僅 朝生幕 木僅華 《신지원(新字源)》, 1920년 3판 간행

위는 무궁화의 명칭이 나타나는 조선조의 기록들을 시대순으로 배열한 것이다. 흥미있는

사실은《사류박해》에서만‘無窮花(무궁화)’라고 한자 표기를 하였고 나머지는 모두 우리말 표기로‘무궁화’로 적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사실로도‘무궁화’(혹은 이와 비슷한 소리)란 이름이 먼저 있었고, 이것이 뒤에 한자(漢字)로 옮겨졌다는

암시를 강하게 받을 수 있다. 특히《방언류석》, 《왜어류해》등 당시 일본어 교재에 보이는‘무궁계노하나’란 표기는 무궁화의

어원을 찾는 데 있어 중요한 자료가 된다. 이 점은 뒤에서 상세히 논급하겠다.

 

◀<운회옥편>표지, <역어류해>의 내용, <방언류석>의 내용

 

 

이러한 우리말로 표기된 문헌자료 외에도 몇 가지의 무궁화와 관련된 자료를 찾아볼 수 있다. 먼저 정재륜(鄭載崙 1648∼l723)이란

이의《한거만록》에는 ‘木槿俗名無窮花 詩所謂舜英者也(목근속명무궁화시소위순영자야)’라고한 대목이 있고, 또 홍만선(洪萬選

1643∼1715)의《산림경제》〈양화편(養花篇)〉의 근화조(僅花條)에는‘僅花卽舞官花(근화즉무관화)’라고 하였다.

이때‘舞官’의‘官(관)’을‘宮’과 비슷한 데서 온 오식(誤植)으로 보 것인지, 아니면 무궁화의 옛 우리말의 당시 발음을 반영한데서 온

것인지에 대해서는 논의의 여지가 있다. 이 또한 뒤로 미룬다. 앞 서 이규보 시(詩)의‘無宮(무궁)’까지를 포함하면 ‘무궁화’의 한자

표기에‘無窮花’,‘舞官花(흑 舞宮花)’,‘無宮花’의 세 가지 다른 형태가 존재했었다는 사실을 위 문헌들의 표기를 통해 알 수 있다.

이는 앞서 제시한 주요 언해류(諺解類)의 초기 문헌들에서 한결같이 굳이‘무궁화’라고 한글로 표기하고 있다 는 사설이나, 1925년

10월 21일자《동아일보》기사 가운데의‘순전히 보기좃코 뜻깁게 하노라고’라 한 문맥과 연관지어서도 생각해야 할 문제이다. 이상 몇

가지 인증(引證)을 통해 우리는 일단‘무궁화’에 대한 순 우리말 이름이 과거에 있었으리라 는 추정에 도달할 수 있다. 그렇다면 현재

남아 있는 그 우리말 이름의 잔영들에 어떠한 것이 있는지, 그리고 있다면 이러한 잔영들을 추적해 올라갈 때 어떠한 결론을 얻을 수

있을 것인지의 문제를 검토하여야 할 것이다. 먼저‘무궁(혹은 그 비슷한 소리)’이라는 우리말 이름의 유래가

한자(漢字)‘木僅(목근)’의 당시 음(音)이 반영되어 나타나는 것인지, 아니면 이와는 관계없이 순수하게 독립된 우리말 이름인지에

대해서도 논란 의 여지가 많다. 김규선은 이 문제에 대해《무궁화 교본》에서 이렇게 말하였다.

중국어의 한국한자음화 발달은 그 경우가 한결같지는 않으나, 무궁화의 경우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이 된다.

 

중국원음 중국원음→한국귀화음 木菫·木槿 → (무궁)(무친·무긴) 한국한자음→한국한자음 (목근) (목근)

곧‘木菫·木槿’에 대한 한국한자음이‘목근’으로 정착되는 과정에 맞서서 중국 원음 역시 세월이 흐르는 사이에‘무궁’으로 변음되어 살아

남아 이중어(二重語)를 형성하게 된다. 중국원음의 자취를 가지면서 한국귀화음이 된‘무궁’은 더욱‘無窮’이란 한자어와 접합됨으로써

당초의‘木槿’과는 전혀 엉뚱한 한자어가 생겨나고, 이런 역사성을 가지는 사이에 한국귀화음의 것과 한국한자음을 가지는 것 서로는 완전히

유연성(有緣性)을 상실하여 별도의 말인 것처럼 인식되기에 이른 것이다. 이런 예는‘大紅’이 ‘대홍과 다홍’‘白菜’가‘백채 및

배추’등으로 양립하는 예와 거의 같다.

윗글에서 보듯, 김규선의 견해는‘목근’의 중국 원음이 변음하여 된‘무궁’이‘무궁(無窮)’이란 한자어에 접합되어 우리의 국화 무궁화의

화명을 이룬 것이라는 주장이다. 앞서《역어류해》의 예에서‘木槿花(목근화)’의 아래에‘무긴화’, ' 긴화’라는 중국 음을

달아놓고‘무궁화’라는 우리말 이름을 달리 표시하고 있지만, 이때‘무긴화’와‘무궁화’는 바로 ‘白菜’와‘배추’식의 이중어(二重語)일 뿐

결국 그 말 뿌리는 동일하다는 말이다. 이러한 김규선의 논의에 타당성 있음을 결코 부인하지 않는다. 그러나 동시에 논의에 타당성이

있다고 해서 그것이 곧 진실이라고 볼 수는 없는 것이다. 이러한 생각의 바탕에는 적어도 중국 문헌에 의해 4천년 전에 이 꽃이 우리

나라에 많이 있다고 기록되었을 정도라면 현재는 그 정확한 이름이 한자‘無窮’에 의해 고정되었지만, 반드시 이에

대한‘진달래’,‘개나리’식의 우리말 이름이 있었을 것이라는 인식이 전제되어 있다. 즉, 앞선 김규선의 결론은 문헌자료에 기준 할 때

나름의 타당성을 갖지만, 우리는 이 꽃 에 대한 가장 최근까지도 통용되어 온 순 우리말 이름을 특히 전라도 지방의 방언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류달영(柳達永)과 그에 앞서 김정상(金正祥)의 고찰이 있었다. 김정상은 1955년

《무궁화보(無窮花讀)》라는 50여 페이지에 걸친 책자를 펴냈는데, 이 가운데〈무궁화의 원명고〉라는 글이 있다.

무궁화가 외국에서 들어온 것이 아닐진대 이에 대한 우리말 이름이 있어야 할 것이다. 필자는 1923년 여름에 완도군 소안면

비자리(莞島郡所安面榧子里) 앞 바닷가에서 수십 주의 굵은 무궁화를 보았다. ···〈중 략〉··· 그 분은 옥편에서‘僅’자를 찾아 보여

주시면서,“槿-무궁화 근이라고 하지 않는가? 이것이 무우게 근자여. 중국서는 목근(木槿)이라고 하지만 우리

나라에서는‘무우게’또는‘무궁화’라고 하는데《동의보감(東醫寶鐵)》에는 무궁화라고 했고,《한거만록 (閑居漫錄)》에는‘木僅 속명

무궁화’라는 기록이 있다.”

이 글을 통해서 완도의 섬 지방뿐 아니라, 전남 구례에서도 무궁화를‘무우게’라고 불러 왔다는 사실을 뚜렷이 알 수 있다.

이‘무우게’란 명칭은 무궁화의 우리말 뿌리를 캐는 데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말이다. 또한, 전라북도 임피(臨皮)지방에서는 예전에

무궁화를‘무게나무’라고 불렀다고 한다. 이때 전남 임피의‘무게’란 명칭은 위 완도나 구례의‘무우게’에서 겹치는‘ㅜ’모음이 축약되어

이루어진 형태이니, ‘무우게’와‘무게’는 그 근친성(近親性)이 바로 드러나는 말이다. 위 두 가지의 증거들은 특히 전라남도 지방에서

이 꽃을‘무우게’혹은‘무게’로 흔히 불러 왔다는 사실을 잘 밝혀 준다. 또한 여기서 주목할 것은 현재 일본에서 이 꽃을 두고

예전에‘ムクゲ' 즉‘무쿠게’라고 하였다는 사실이다. 이에 대해 류달영(柳達永)은《나라꽃 무궁화》에서

《신주한화 대사전》의 순화(舞花)의 설명에‘ムクゲ'(무쿠게)の(노)花(화) 俗稱(속칭) 朝顔(조안)アサガオ(아사가오)’라고 하였고,

《광사림》에는‘朝顔、アサガオ(아사가오)’古稱(고칭)‘ムクゲ"(무쿠게) 木僅(목근)の(노) 轉音(전음)’이라고 풀이했다. 고칭(古稱),

곧 아주 옛날에 불리웠던 명칭이 무쿠게(ムクゲ)라고 한 것은 주목할 만한 가치가 있다. 무구계( 久計)라는 한자에는 아무런 뜻도 없는

것이며, 단순히 무쿠게(ムクゲ)와음이 같은 한자를 맞추어 썼을 뿐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일본 학자들 중에는 무쿠게(ムクゲ)는

모쿠긴(モクギン,木槿)에서 전음된 것이라고 주장하는 일본사람도 있기는 하다.

라고 하였다. 이‘모쿠게’라는 이름을 전라도 지방의 방언‘무우게’,‘무게’와 비교하면 이것이 일본 학자들의

주장처럼‘木槿’즉,‘모쿠킨’보다는 휠씬 더 유사하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다시 말해‘무우게’란 형태는 일본

이름‘무쿠게’에서‘ㅋ(곧ㄱ)’이 탈락한 형태이다. 후대로 내려오면서‘ㄱ’이 탈락되는 음운현상은 국어에서 흔히 있는 현상이다.

따라서‘무구게’라는 일본말은 현재 우리말 방언‘무우게’의 앞선 형태의 잔영을 반영하고 있다고 보여진다. 그렇다면‘무궁화’의 순 우리말

뿌리는 오히려‘무구게’라는 일본말에 그 모습이 남아 있는 셈이다. 여기서 앞서 논의를 보류했던《왜어류해》와《방언류석》을 다시

살펴보자. 이 두 책에는 무궁화를 18세기 말 당시 일본 사람들이‘무궁계노하나’혹은 ‘무구o계노하나’라고 불렀다고 되어 있다. 이 두

가지 는 실제 표기상 차이일 뿐, 다 같은 발음으로 읽혀지 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무궁계(노)’흑은‘무구o계(노)’로 표기된

부분을 주목한다. 이때 받침의‘o’은 뒷음절 초성의‘ㄱ’과 바로 접속되어 나타나나, 다음 단계에 가면 그 음가는 약화되거나 상실되어

결국 지금의 일본 이름‘무구계’가 남게 된다. 완도나 구례, 임피 등에서 채집된‘무우게’또는 이의 축약형인‘무게’등의 우리말

이름과‘무쿠게(ムクゲ)’와의 근친성을 이상에서 살펴보았다. 방언과의 유추관계에서만이 아니라《왜어류해》등의 문헌에 나타나는

바‘무궁계노하나’등과의 상관성도 짙게 나타나는 것이다. 이로 볼 때도 무궁화의 일본 이름‘무구게’는 우리말에 그 뿌리를 두고 있음이

거의 확실하다. 뿐만 아니라 채집된 방언자료들과의 유추관계로 볼 때는 오히려 이 일본말‘무쿠게’에는 지금은 남아 있지 않은 순우리말

이름의 원시적 형태의 잔존 요소도 남아 있음을 위 언급을 통해 살필 수 있으리라본다. 이 밖에 또 한 가지 다른 계열의 방언이 있다.

바로 이양하(李敭河)의〈무궁화〉란 수필 가운데 그것이 보인다.

그래 상허(尙虛)는 무궁화가 우리 국화로서 가당하지 못하다는 여러 가지 이유를 들고 우리들에게 좀 친근하고 보편적인

진달래를 국화로 하였으면 하는 의견을 말하였다. 국화로서의 무궁화에 대한 혐오의 감을 더 절실하게 단적으로 표현한 것은

어떤 친구의 이야기였다. 이 친구는 전라도 태생이 되어 어렸을 때부터 무궁화를 많이 보아 왔다. 그러나, 그것이 우 리의

국화인 무궁화라는 것은 알지 못하였다. 그 역시 나와 마찬가지로 서울 와서 이 사실을 처음 알게 되었는데, 그 순간의

감명은 이러한 것이다. “게, 무강나무 아닌가, 우리 시골에 가면 집 울타리 하는 바루 그게 아닌가.”

<이양하>▶

 

윗글은 무궁화가 어딘지는 확실치 않으나 역시 전라도 지방에서‘무강나무’로 불려왔다는 사실을 밝혀 주고 있다. 더구나 그렇게 불러온

본인은 자신이‘무강나무’라고 불러 온 그 꽃이 바로 무궁화인 줄은 전혀 모르고 있었다. 이 말은 그가 무궁화라는 식물이 따로 있는줄

알고 있었고, 정작‘무강나무'가 무궁화 인줄은 몰랐다는 말이 된다. 즉, 발화자에게 있어 ‘무궁화'라는 명칭이 이 꽃을 대하는 데

선입견으로 작용치 않고 있었다는 것인데, 이는 곧‘무강나무'라는 명칭이 휠씬 이전부터 계속 이 꽃에 대해 불러 온 고유한 이름이었다는

분명한 방증이 된다. 이때 이‘무강'이란 이름은 앞서의‘무우게',‘무게'등의 이름과는 계열을 달리하는 것이다. 여기서 또한

앞서《산림경제》에서 무궁화를 두고‘舞官花 (무관화)'로 표기한 사실을 환기할 필요가 있다. 이때 ‘官(관)'을 흔히‘宮(궁)'을 잘못

쓴 것으로 보아왔는데,“이런 것은 지금은 분명히 알 수 없는 무궁화의 우리말 옛 이름을 모두 나름대로 한자로 음을 맞추어 쓴 것이라고

믿어진다”고 한 류달영(柳達永)의 견해에 동의한다. 특히 이‘무관화(舞官花)’의 표기를 무궁화꽃 이름의 당시적 발음형태를 반영한 데서

나온 것이라고 보고자하는 이유는 바로 위 이양하의 수필에 보이는‘무강'이란 방언 때문이다.‘무관'과 ‘무강' 사이에는 음운적으로 볼

때 매우 깊은 유사성 이 발견된다. 특히 일상 생활어에서 받침의‘o’과 ‘ㄴ’은 뚜렷이 변별되지 않는다. 또한‘ㅘ’모음과 ‘ㅏ’모음

사이에도 청각 인성에는 큰 차이가 없다. 요컨대‘무강’(혹은 이와 비슷한)이라는 순 우리말 이름을 한자로 반영하려고 한 데서 나온

표기가‘무관화(舞官花)’가 아닐까하는 짐작을 가능케 한다는 말이다. 지금까지 문헌자료의 보조적 도움을 받고, 현재까지 채집된 방언을

통해 유추한 결과,‘무궁화'의 우리말 뿌리는 크게 두 갈래가 있음을 알 수 있다.‘무우게',‘무게'가 그 하나라면,‘무강'은 다른

하나이다. 전자의 경우는 이 꽃의 일본 이름‘무쿠게'와의 근친성이 어학적으로 증명되며, 《왜어류해》등 문헌자료를 통한 방증도 있다.

그리고‘무강'이라는 이름의 경우《산림경제》에 기록된‘무관화(舞官花)'의 표기와 상관성을 찾아볼 수 있다. 이렇듯 이 꽃의 두 계열의

이름을 통해 우리는 오히려 분명하게 무궁화의 순수한 우리말이 있었다는 것을 인지할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은 어느 한 가지의 고정된

형태가 아닌 지방마다 얼마간의 차이를 지닌 것이었을 것이다. 그러다가 이것이‘無窮花(무궁화)’등의 한자로 표기되면서 오늘의 무궁화로

이름의 통일이 이루어진 듯 하다. 그러나 문헌에 의해 무궁화라는 명칭에 통일을 보았으면서도, 이전의 형태인‘무우게',

'무게',‘무강'등의 형태들은 별도로 잔존하여, 무궁화를 말로만 듣던 사로념은 마치‘무우게'나‘무강'등으로 불리는 나무와 무궁화가

별개의 식물인양 생각하는 결과에까지 이른 것이다. 논의를 처음으로 되돌아가서, 방언으로 채집된 ‘무우게',‘무게',‘무강’등의 이름의

시원(始元)이‘백채(白菜)'가‘배추’가 되고,‘척촉(  )'이‘철쭉'이 되어 별도의 우리말로 형성되듯이‘목근(木槿)'에서‘무궁'의

과정을 밟은 것으로 볼 것인지, 아니면 목근(木僅)과는 전혀 관계없이 별도로 형성된 우리말로 볼 것인지는 현재로서는 단정적으로 확언할

수는 없는 것이다. 요컨대 그것이 어느 경우에 속하든지‘무궁화'의 명칭은 우리말에 그 뿌리를 두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배추'나‘철쭉'이 우리말화되어 우리말이라는 사실에 우리가 이의를 달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다. 더구나‘무우게',‘무강'등의

이름은‘배추'나‘철쭉' 만큼 한자와의 뚜렷한 유사성도 박약하다.

출처 : 무궁화 대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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