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창호지
노란 병아리의 솜털 같은 햇살이 개나리꽃 울타리 사이로 기어 들어와 엄동설한 긴긴밤 견디어낸 쌍바라지 문 찌든 창호지에 볼을 부비고 있을 때면 우리네는 새로운 마음으로 집 단장을 했다.
그을린 벽에 황토 물로 맥질을 해서 해맑게 칠하면 상큼한 흙냄새가 방안을 가득 메우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문짝과 창문을 떼어내 햇빛 널린 앞마당에 가지런히 모아 세우고 묵은 창호지를 깨끗이 거두어내고 한지에 풀을 매겨 새로 바른다.
실바람에 창호지는 어느 결에 마르고 곱디고운 마음 같은 순백의 한지는 팽팽하게 당기어지며 미음자 시옷자 문살에 곱게 안긴다.
거기다 더 멋스럽게 치장하는 것이 있으니 사람의 손이 가장 많이 닿는 동그란 문고리가 매달린 부분에 갓 올라오는 쑥 잎이나 클로버 잎 개나리꽃 등으로 수를 놓고 그 위에 적당하게 묘기 부려 자른 한지를 다시 바르면 한 폭의 자연 그대로의 생화그림 액자가 된다.
이렇게 새로 바른 문과 창문을 돌쩌귀에 들기름 약간 치고 끼워 달고 나면 마음도 집도 따듯함과 설레는 가슴이 되여 무엇인지도 모를 아련한 기다림으로 가득 차곤 한다.
나른하게 감겨오는 잠을 쫓으며 문살로 기어들던 햇살도 추녀 끝으로 물러나고 밤나무 그늘에서 시원스레 울던 매미소리가 갑자기 소나기를 몰고 오는가 하면 눅눅하게 젖던 문창호지가 늙어가는 색으로 변하는 지리한 장마가 퇴군하고 나면 어느 결에 더위도 한풀 꺾인다.
개똥벌레가 엉덩이에 딸린 경광 등이 유죄가 되어 호박꽃 속에 감금돼 개구쟁이 놈 영철이 방에서 깜박이고 고추잠자리는 파랗게 치솟은 하늘에서 편대비행을 한다. 코스모스는 꽃이 무거워 긴 목에 힘겨워 하면서도 바람을 유혹할 즈음이면 또다시 겨울을 따듯하게 나기 위해 문창호지를 새로 바르는 일을 하게 된다.
이때의 문창호지 바르는 것은 조금 다르다. 문설주 생화액자에는 코스모스나 맨드라미 꽃잎이 들어가는 것은 당연하고 바늘구멍으로 황소바람이 들어온다는 삭풍을 대비하여 문틀사이에 문풍지를 꼼꼼하게 붙이는 일이다.
언제부터인지는 모르지만 우리네 조상님들은 문과 창문에는 닥나무껍데기로 만든 한지로 곱게 발라 멋과 실속을 함께 하며 긴 역사에 삶을 같이 해왔다.
물질문명이 발달하고 생활은 편리를 극대화하는 변화 속에 한옥이 줄어들고 서구화된 양옥과 고층 아파트가 숲을 이루며 모든 문과 창문은 단단한 유리로 막아져 사람과 사람사이를 단절시켜놓고 있다.
투명한 유리의 완전노출이 아니면 색유리 장막으로 바람 한점 소음 한줌도 허용되지 않는 밀폐된 공간을 만들어 놓고 우리는 알지 못하는 고독을 질근질근 씹으며 살고 있지 않은가 하고 느껴진다.
더구나 안에서는 밖을 훤하게 바라볼 수 있으나 밖에서 안은 보이지 않는 가증스런 유리창을 우리는 선호한다는 사실이다,
지난날 우리네 문과 창문은 한지로 발라서 유랑하는 나그네바람의 넋두리도 간간이 들을 수 있었고 이슬비 송알대는 속삭임을 귓가에 담아보며 밤새 싸락눈 내리는 소리가 임의 발자국 소리 같아 마음 설레는 깊은 밤도 지새우기도 했다.
동장군 칼바람 휘몰아쳐 문풍지 서럽게 울리는 소리에 사람 그리움도 살 겹게 느끼며 내 집의 소중함을 다시 생각해보는 행복감에 더없이 가슴 따듯하던 지난 일들이 그리워진다.
불 켜진 방안에 다정스런 가족들의 그림자가 비춰 행복스럽게 보이고 도란도란 말소리도 고느적하게 들려와 정감을 느끼게 하던 이웃의 풍경이다. 대문 앞에서 큰기침만 두어 번 하여도 알아차리고 반기던 우리네가 아니던가, 지금에 생각하니 이게 다 한지로 문창호 바르고 살았던 때문이 아니었나 싶다.
우리의 창문은 갈수록 더욱 두터운 이중유리 색유리로 단단하고 안보이게 꼭꼭 닫아걸어 조그만 공기마저 들고나지 못 하게 된 공간으로 모두 숨어들어 가슴의 대화를 잃어가고 있는 것들이 유배지의 우리를 슬프게 한다.
혼례 치루고 첫날밤 신방을 지키려는 젊은 여인들이 짓궂은 장난으로 손가락 끝에 침 발라 뚫어놓은 문창호지의 멋스런 옛이야기를 먼 훗날 어느 할머니 할아버지가 손자손녀 들에게 이야기 해줄 것인가?
문살 촘촘한 쌍바라지 문에 어른거리는 달그림자 벗 삼아 담돌 밑에서 울어대는 이름도 제대로 다 모를 가을의 풀 벌래 울음소리를 밤새워 듣고 싶다.
찬바람을 살짝 바꾸어 온화한 공기로 받아들여 놓는 한지의 멋을 잃어 가는 세월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