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고장 넓은 내(洪川)이야기

넓은내( 홍천 ) 거인들

돌 박사 2024. 8. 31. 11:41

      
   넓은 내 거인들

       소설가  석   도   익

  우리나라의 현대사에 위대한 사람이나 존경받는 사람이 없다. 아니 존경해야할 사람을 만들지 못했다고 하는 편이 옳을 것이다. 자유민주주의 국가로 풀뿌리를 내리면서 법치를 넘어서려는 자유가 이기적인 개인주의로 심화되어 오면서, 정권을 잡지 못한 정치인은 집권자에게 장기집권이라는 죄명을 붙여가며, 정권을 잡지 못했던 분풀이로 전직지도자의 잘못된 부분만을 내세워 무자비하게 깎아내리기에 바빴다.  

미국의 꼭두각시니, 친일반민족자니, 장기집권독재자로, 또는 친북좌파로 몰아서, 아무리 훌륭한 정치를 했더라도 잘한 것은 묻어버리고 잘못된 얼룩만을 위에 덧칠해서 위대함을 가려놓았다.

뿐만이 아니라 훌륭한 학자나 사회의 저명인사 기업인등도 정치적으로 이용하고, 밑에서 밟고 올라서기 위한 자들이 자기위상을 더 높이기 위해서 존경해야할 분들을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흠집을 내놓았기 때문에 국민들이 존경해야할 위대한인물이 하나도 없게 만들어 버림으로서 보고배울 거울이 없고, 믿고 따를 믿음 있는 사람이 하나도 없는 비참한 나라에 국민이 되었다.

요즘 우리나라에는 서로가 잘났다고 자신을 홍보하고 자화자찬하는 사람들뿐이다.

그러나 필자는 대한민국에는 존경하고 위대한 분이 없다고 하더라도

내 고장에는 내가 존경하는 분들이 많다. 그러므로 존경하는 사람이 없는 사람보다는 내가 더 행복하다고 생각하며 그분들을 이 기회에 알려주고자 한다.

청소년 시절 강원도 농도원에서 교육을 2달간 받은 적이 있었는데 전임강사로 철학박사 이태영 교수님이 국가이념으로 철저한 정신교육을 실행하였는데, 기상에서 취침까지 군대보다 더한 기강을 세웠으며, 오로지 국민자각과 국가이념에 관한 교육을 합숙으로 외출 외박 없이 받았음으로 철저한 자각정신과 국가이념으로 살아가려고 노력하게 되었다.

  이승춘 의원은 1960년대 당시 홍천인제지역구국회의원으로  서울 갈현동에 거주했는데 재건국민운동종합지도자 교육을 받으러 갔다가 인사드리러 찾아가게 되었다.

의원님은 함께 자면서 밤늦게까지 나에게 젊은이들이 가져야할 국가관에 대하여 긴 시간 말씀하셨는데 그 무게가 가슴깊이 새겨졌다.

국가이념을 공부한 나는 재삼 실감나게 느끼며 아 ~ 국회의원이시니까 국가에 대한 생각도 가르침도 남다르다는 생각을 하며, 이분을 존경하게 되었다.

지금까지 많은 사람을 만나고 잊어가기도 하지만, 그 많은 분들 중에 본받고 싶고 존경하는 분들은 많았으나 오래 가까이 지내게 되면 대부분이 말과 행동이 다른 것을 보게 되어 존경하려던 마음이 사라지게 되여, 내가 그들보다 잘났다고 착각하며 살아왔다.

그러다가 뒤늦게 삶의 길목에서 스치는 인연같이 만난 어르신은 존경받아 마땅하고, 현시대에 이러한 위대한 분을 알게 되어 내 인생에 풍요를 느끼고 있다.

남강 김창묵 선생님은 홍천군 서석면 수하리가 고향이며 신라 경순왕의 마의태자 계손으로 경주를 피해 이곳까지 낙향해온 경주김씨 후손이며 낙향 2세 김군보는 동창에 보를 건설하고 바위벼랑을 깎아서 수로를 만들어 동창들을 옥토로 바꾸어 놓기도 했다.

또한 조부의 6촌 형제인 김덕원 의사는 동학교도로 3.1운동당시 장두로서 2개 군 8개면 주민 3천여 명이 함께하여, 내촌면 물걸리 동창이 있는 뜰에서 만세를 부르게 주도한 사람으로 일제경찰에 쫓기다 투옥되어 실명까지 당하고 순국한 사람이다,

김창묵 회장은 독립운동으로 가문이 멸문지화를 당하여 몰락한 집안이라 어려서부터 가난 때문에 고생하다가 선진농업개척단에 들어가 만주까지 가서 일하고 공부하다가 해방되어 고국에 돌아와 여의도에 전원농업낙원을 만들려하였으나 6.25전쟁으로 다시 폐허된 땅에서 남대문 시장에서 본인의 말로 장돌뱅이로 부를 일구어낸 분이다.

늦게나마 지금을 있게 해준 국가와 고향을 위해 일하고자 내려와서 이곳에 민족혼이 살아있는 애국충절의 흔적을 찾아 민족정기가 흐르는 곳으로 만들고자 온 재산과 힘을 쏟아 부으며 마지막 여생을 바치고 있다.

홍천군에서 조성한 동창만세기념공원을 함께 하기도 했으며 지역우선사업에 앞장서 지원했고 동창기미만세운동기념사업회를 설립하여 척야산수목원을 만드는데 심혈을 기울여 조성하여 전국에서 이 곳을 찾아오는 인파로 봄가을에는 인산인해를 이루게 되었다.

또한 충절의 고장 홍천을 널리 알리기 위해 홍천에 관한 노래 “홍천으로 오세요.”등 14곡을 작사 작곡하게 하였고, 이 노래를 주현미 설운도 조영남 나훈아 최진희 진송남 이미자 박진선 등의 유명가수가 불렀으며, 노래비를 세우기도 하였다.

특히 국립독립기념관 추모의 자리에 김덕원 의사 추모비를 세워 매년 현충일 날 홍천군민이 추모참배 할 수 있게 함으로서 애국정신을 고취하고 홍천의 위상을 알리는데 기여하고 있어, 일반인으로서는 엄두도 못 낼 일을 진행하여 왔다.

내가 존경하는 것은 이같이 위대한 일뿐만 아니라, 언제 어디서 만나더라도 하시는 말씀은 오로지 나라사랑뿐이었다. 그리고 30여 년 전에 수목원 토목공사를 위해서 가져다놓았을 것으로 추정되는, 여름에는 찌는 듯 덥고 겨울에는 차갑게 얼어 들어오는 컨테이너 박스가 지금까지 동창기미만세운동기념 사업회 김창묵 회장님의 유일한 사무실이며, 화장실조차 건설자재거푸집으로 막아놓은 야외화장실을 이용하며 매일같이 출근하여 일하시고 있는 모습을 보면. 수 백 억 원을 이곳에 아낌없이 투자하면서도 자신을 위해서는 지독하리만치 절약하는 분이이라는 것을 알 수 있어서다.

언제나 말과 행동이 일치하는 분이기에 존경 안 할 수가 없으며, 이러한 사람이 몇 분만 더 있었다면 홍천은 몰라보게 발전되었을 것인데, 참고로 홍천에는 도회로 나가서 재력가가 된 분들이나 권력을 가졌던 분들도 많았으나 고향을 위해서 힘이 되어주고 말 한마디 거들어준 분들이 많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다.

지금세상 어느 누가 돈 벌었다고 자신의 조상 일에 이렇게 까지 할 수 있겠는가? 어느 누구가 자기가 태어난 고향이라고 전 재산을 털어서 한 푼의 수입도 없는 장래의 지역을 위한 사업을 하겠는가? 묻고 싶다.

홍천은 궁핍하고 문화적 기반이 여리던 곳이다. 이곳에 위대한 역사를 조명하고, 아름다운 경관에 휴식공간을 만들어 후세에 길이 보존 기록될 가치를 높여준 분이 아닐까 생각된다.

“국가나 지방자치에서 모른 체하는 민족정신을 이렇게 해서라도 흔적을 남기고 전해 후세 국가 뿌리에 건강을 찾자“는 것이 그분의 지론이다.

한평생을 장돌뱅이가 되어 모아온 재산을 내 고장에 남기고 싶은 유산을 만들기 위해 남은생의 힘과 정열을 함께 투자하여, 홍천에 역사와 문화에 민족정기를 발현하는 척야산수목원을 조성하였고, 이를 홍천군에 자산으로 남길 것이니 지역발전의 동력과 값진 역사자산의 유산이 될 것이다.


*주) (아래에 강원도민일보 지상에 실린 2019.2.23.일 특집기사를 옮긴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는 말은 김창묵(97) 동창만세운동기념사업회장의 좌우명과도 같다. 3·1운동 100주년을 맞는 고향 홍천군 내촌면 동창마을도 그에게는 민족정신을 이어갈 터전이다. 김창묵 회장은 “대한민국이 현재 번영을 누리는 데는 조상들의 희생이 있었다.”고 평소 신념을 강조했다.

홍천군 내촌면 동창마을에 들어서면 봄이면 꽃이 피고 여름이면 짙은 녹음이 우거지고 가을이면 물감을 뿌려 놓은 듯한 단풍으로 물들어 산책하기 좋은 척야산문화수목원’이 자리하고 있다. 나들이로 구경 왔던 사람들은 수려한 자연경관에 반하며 즐거워하기 마련이지만 곳곳에 세워진 안중근 의사와 이순신 장군의 국가안위를 걱정하는 조형물 등을 바라보면 하나하나 손때 묻어있는 ‘애국정신’을 깨닫게 되고 깊은 감동을 받는다.
이제 조성되기 시작한지 30여년을 바라보는 척야산문화수목원 속에는 김창묵 회장의 염원이 고스란히 배어있다.100년 전 이곳 홍천군 내촌면에서는 강원도 내에서 비극적이고 격렬한 3·1만세운동이 펼쳐졌다.

‘동창만세운동’은 동창마을에서 주민 3,000여명이 만세를 부르다 일제 경찰의 총탄에 ‘팔렬사’ 8명이 순국한 강원 최대의 만세운동이다. 시위를 이끈 독립투사 중 한명이 김덕원 의사(義士)며 김창묵 회장의 할아버지의 6촌 형제다.
김창묵 회장이 태어났을 때는 이미 김덕원 의사가 사망한 후였다. 마을에서 ‘천석꾼’으로 불렸던 그의 집안 재산도 김덕원을 체포하려는 일제에 의해 모두 사라졌고 김창묵 회장의 어린 시절은 배고픔과 가난의 연속이었다. 고단한 삶을 개척하기 위해 열여섯 나이에 농업개척단원으로 나 홀로 만주에 갔다가 몇 년 후 대한민국 광복을 맞고 다시 한국으로 귀국, 서울에 터를 잡고 가난과 싸우며 억척같이 삶을 살아왔다. 어느덧 ‘동찬기업’을 세우며 자수성가의 표본처럼 성공의 길을 걷게 됐다.

성공한 그의 앞에 1991년 고향인 홍천군에서 기미만세공원 조성을 도와달라는 부탁이 전해져왔다. 흔쾌히 수락하고 찾아온 고향은 자신이 할머니로부터 듣고 자라온 기억과 그 당시 모습과는 사뭇 달랐다. 어느덧 자신의 종(從)조부의 독립운동 사실은 잊혀져가고 있었고 동창마을 곳곳에 남겨진 선열들의 애국정신도 흐려지는 듯 했다.김 회장은 자신이 나서야겠다는 생각을 갖고 독립투사들의 애국정신을 기리는 기념사업을 묵묵히 시작하게 됐다. 김 회장은 “일제 탄압이 두려워 할머니는 가족의 독립운동 사실도 숨겼고 나조차도 힘든 생활에 고난의 세월을 원망하기도 했다”며 “하지만 내 후손들이, 이 땅의 민족이 대한민국 국민으로 살아가려면 민족정신을 이어나가는 역할을 누군가 해야 한다고 생각했고 그것을 내가 해보자고 결심하게 됐다”고 말했다.
자신만만하게 시작된 기념사업은 처음부터 난관이었다. 김덕원 의사가 만세운동 이후 동창마을 일대에서 일본 경찰의 눈을 피해 3년이나 숨어 살았고 무덤은커녕 사망 일시나 이유에 관한 기록도 찾기 어려웠다.
김 회장이 직접 자료를 수집하고 주변 사학자들에게 자문을 구하며 동창마을 애국의 역사를 고증하는 데만 수 십 년의 세월이 흘렀다. 김 회장은 “기념사업을 위해서는 서울의 집에서 출퇴근해서는 안 되겠다. 는 생각에 이곳 척야산 근처에 거처를 마련해 며칠 밤을 새우며 일을 해야 했다.”며 “사재로 척야산 일대 땅을 구입하고 직접 공원을 설계했다. 선양사업을 너무 강조하면 안 되겠다. 는 생각에 수목원처럼 친숙하게 꾸며 많은 사람들이 동창마을을 찾을 수 있도록 했다”고 말했다.
그는 또 단순히 수목원을 조성하고 조상의 독립운동 역사를 고증하는 데만 몰두하지 않았다. 동창마을 곳곳에 새겨진 독립투사들의 애국정신을 기리기 위해 다양한 기념사업들을 추진해왔다. 이달에는 홍천 곳곳에 ‘밸런타인보다 올바른 역사 알자’배너를 설치하며 캠페인을 벌이기도 했다. 김 회장은 “일제강점기가 36년이 아닌 72년이었다면 그 이후 2세대,3세대는 우리말과 역사를 잊어버리고 민족성을 잃어버렸을 것”이라며 “그만큼 역사는, 민족정신은 꼭 후세에 남겨야할 우리시대의 사명과도 같다”고 말했다.
또 최근에는 홍천군 서석면 수하2리 용호터 마을 앞 강가 바위에 새겨진 ‘대한민국 만세’라는 글자를 발견, 이 바위에 담긴 역사적 진실과 애국정신을 고증해 기념사업화 하는 것을 추진하고 있다. 김 회장은 “내가 어렸을 때만해도 여기 강가가 이 바위보다 한참 높게 수위가 유지되고 있었다.” 며 “항일 운동을 하던 이 지역 의사들이 광복을 기원하며 일제의 눈을 피해 물속의 바위에 새긴 것으로 추정한다.” 고 말했다. 이어 “우리나라 사학자들과 국민들이 이 같은 독립운동의 흔적들에 많은 관심을 갖고 역사화해 후손들에게 전달해줬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김 회장의 꿈은 보다 많은 사람들이 독립투사들에게 관심을 갖고 숨겨져 있던, 잊혀가는 독립투사들의 역사가 명명백백 밝혀지는 것이다. 김 회장은 “일제의 탄압에 독립운동가 후손은 선진지식과 지혜를 배우지 못했고 그러다보니 가난에 빠지고 힘든 세월을 보내왔다”며 “독립운동가 뿐만 아니라 그들을 숨겨주고 지켜주고 보살펴준 모든 사람들도 넓게 보면 독립투사와 마찬가지다. 이들 모두가 행복해지고 또 우리 후손들이 감사해하는 마음을 갖게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우사(尤史) 김규식(金奎植)은 1881년 1월 29일)은 우리고장 출생으로 신한청년당의 대표로 1919년 파리강화회의에 참석하여 대한민국임시정부 대표 명의의 탄원서를 제출했고, 임시정부의 초대 외무총장·부주석을 역임했다. 해방 후에는 좌우세력을 규합하기 위해 좌우합작운동을 전개했고, 민족의 분단을 막기 위해 남북협상에 참여했다.

그는 미국 북장로파 선교사 H.G. 언더우드의 고아원에서 성장했다. 언더우드 학당을 마치고 서재필이 경영하는 〈독립신문〉에 잠시 근무하다가, 서재필의 권유로 1896년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해방 후 민족의 단합을 위해 노력했다. 6·25전쟁 때 납북되어 1950년 12월 10일 평안북도 만포진 근처에서 죽었다.
족보에 의하면 조선경상남도동래부사 종사관인 아버지 김지성(金智性)(김용원)과 어머니 경주 이씨(慶州李氏)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태어나자마자 아버지 김지성(김용원)을 따라 그는 본가가 있는 강원도홍천으로 갔다. 따라서 그를 강원도 출신으로도 간주하기도 한다. 강원도 홍천군 화촌면 구성포리에는 아버지 김지성(김용원)과 할아버지 김동선 내외의 묘소가 소재하고 있다.

홍천출신은 아니라도 홍천에 와서 살면서 홍천에 지대한 족적을 남긴 분들도 있다.

화서 이항로(華西 李恒老, 1792년~1868년)는 조선의 유학자이자 문신이다. 자는 이술(而述), 호는 화서(華西), 본관은 벽진(碧珍)이며 경기도포천 출신이다.

3세 때《천자문》을 떼고, 6세 때 《십팔사략》을 배웠다고 한다. 1840년헌종 때 경사(經史)에 밝은 선비로 천거되어 휘경원 참봉에 임명되었으나, 벼슬을 단념하고 고향 벽계에서 후진을 양성하였다. 1864년고종 때 좌의정조두순의 추천으로 장원서 별제·전라도 도사를 거쳐 공조참판에 이르렀다. 특히 성리학에 밝았으며, 저서로 《화동역사 합편강목》 60권과 《벽계아언》 12권, 《주자대전 잡의집보》 등이 있다. 최익현에게 유교를 가르쳤다.

화서는 벽계에서 제자들을 가르칠 때 생가 동쪽 느티나무 밑에 축대를 쌓고 강학의 터로 삼았다. 제월대(비 갠 하늘의 티 한 점 없는 달빛)다. 표지석에는 이런 시가 새겨져 있다. <작은 구름이라도 보내어/ 맑은 빛에 얼룩지우지 마라/ 지극히 맑고 지극히 밝은 이/ 태양과 짝하리라.> 그 역시 부단히 민생 개혁을 추진했다. 정전제는 그 일환이었다. 나라에서 외면하자, 그는 나이 예순에 홍천으로 옮겨 정전제를 직접 실천했다. 벽계의 토지를 팔아 삼포와 철정에 땅을 사들이고, 자신은 맏아들과 함께 삼포에서, 막내아들은 철정에서 농민들과 함께 정전제를 실시했다. 당시 조선은 토지 겸병의 확대로, 세금을 내지 않는 양반 대지주의 증가로 국가의 조세 수입은 날로 줄어들어 재정난은 심화되고 민생은 피폐해졌다. 양민 수탈이 가혹해져, 소규모 자영농들은 농지를 포기하고 스스로 소작이 되었다. 화서는 69살이 되어서야 농장을 둘째사위에게 맡기고 벽계로 돌아갔다. 지금도 삼포에는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한서남궁억(翰西 南宮檍)선생 또한 한말의 격랑 속에 사신 분으로 일정의 녹을 받으며 관직에 있었음으로 안중근의사가 사살한 이토 히로부미 장례위원 등으로 친일파라는 원망을 받으나, 이후 관직을 버리고 홍천서면 보리 울에 낙향하여 학교를 세우고 무궁화를 보급하여 민족정신을 고취하는데 앞장섰으며, 나라사랑의 노랫말을 만들어 찬송가 등을 보급하면서 구국 바라기를 한사람이다,

  한서남궁억은 1863년(철종 14년) 12월 27일, 한성부 종로방 정동 왜송골(倭松洞)에서 중추부도사(都事)를 지낸 남궁영(南宮泳)과 덕수 이씨의 아들로 태어났다. 유년 시절에는 정식으로 수학하지 못하고 한문 공부를 하다가 1883년(고종 20년) 미국인이 경영하는 영어 학교에 다녔다.

1884년(고종 21)에는 영어 학교 1학년 재학 중 해관(海關) 묄렌도르프(P.G. Von Möllendorff)의 견습생이 되었고, 1886년 내부주사(內部主事)로 특채되었다. 1887년 초 영어 학교를 졸업하고 고종의 어전통역관이 되었으며, 칠곡군수, 내부토목국장, 독립협회 중앙위원, 황성신문 사장, 대한협회 회장, 배화학당 교사 양양군수 등을 역임했다.

한서 남궁억 1910년 8월 일본이 강점하자 새 세대 교육현장에 뛰어들어야 한다고 생각, 그 해 10월 배화학당(培花學堂) 교사가 되었다. 1912년에는 상동청년학원(尙洞靑年學院) 원장을 겸하면서 독립사상 고취, 애국가사 보급, 한글서체 창안 및 보급에 힘썼다.

1918년 건강이 악화되어 친지들의 권고에 따라 선조의 고향인 강원도 홍천군 서면 보리울[牟谷]로 낙향하였다. 1919년 9월 모곡학교(牟谷學校)를 설립한 뒤 학교 안에 무궁화 묘포를 만들어 나라꽃인 무궁화를 전국에 보급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또한, 애국적 찬송가를 만들어 전국의 교회와 기독교계 학교들에 보급하였다.

1933년 11월 기독교 계열 독립운동 비밀결사인 십자당(十字黨)을 조직, 활동하다 일본 경찰에 붙잡혀 8개월간 투옥되었다. 노령이 참작되어 석방되었으나 일본 경찰로부터 받은 잔혹한 고문의 여독으로 사망하였다.


동은 이재학 ( 東恩 李在鶴)은 제헌국회의원으로 부의장까지 지낸 분으로 홍천에 교육과 농촌에 많은 발전을 가져온 정치인이다. 역사적으로도 전무후무한 옥중당선을 할만치 지역민의 사랑을 받았다,

홍천군서면에서 1904년 출생했으며. 1924년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 1929년 경성제국대학을 졸업했다. 1938년부터 충청북도 학무과 촉탁, 시학, 속으로 근무하다 1944년 군수로 승진해 충청북도 단양군수를 지냈다.

해방 후 강원도지사 서리와 강원도 춘천농업대학 학장 등을 지내다 1948년 강원도 홍천에서 무소속으로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해 제헌국회의원에 당선했다. 1950년 제2대 민의원 선거에 독립촉성회(獨立促成會) 소속으로 당선했으며, 1954년 제3대 민의원 선거와 1958년 제4대 민의원 선거에는 자유당 소속으로 출마해 당선했다. 자유당 원내총무, 자유당 조직부장, 제3대 민의원 부의장, 제4대 민의원 부의장 등을 지냈다. 1960년 3·15부정선거에 관련되어 체포·구속되면서 민의원 의원직을 사임했다. 1960년 7월 실시된 제5대 민의원 선거에 강원도 홍천에서 무소속으로 옥중 출마하여 당선했으나, 1961년 2월 의원 자격을 상실했다. 1973년 11월 23일 사망했다.

이어서 아들인 이교선은 5대 8대 국회의원에 당선되었으며 홍천의 젊은이들을 자신과 관계된 회사인 제일모직에 대거 취직시켜준 일도 있었으며 동생인 이응선도 13대 15대 국회의원을 지낸 국회의원 집안이었다.

최승희(崔承喜, 1911년11월 24일 ~ 1969년8월 8일)는 강원도 홍천군 남면에서 출생하고 서울에서 성장하였으며 숙명여자고등보통학교를 졸업했다. 1926년 일본에 유학하여 현대무용가 이시이 바쿠를 사사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무용가이다. 본관은 해주(海州)이다. 남편은 좌파 문학평론가 안막이다

일제 강점기 말기에 일본군 위문 공연에 참여하고 여러 차례 거액의 국방헌금을 내는 등 일제에 협조한 행적이 있어 친일 논란이 계속되었다. 1941년에는 군국주의를 선전하는 영화 《그대와 나》에서 무용 공연을 펼쳤고 1943년에는 75,000원이 넘는 거액의 국방헌금을 기부했다. 그 외에 중국에서 열린 황군 위문 공연에 참여했고 국민총력문화표창을 받은 일본풍 창작 무용 《무혼》(武魂) 제작에 참여했다. 이러한 행적으로 인해 2008년민족문제연구소가 친일인명사전에 수록하기 위해 정리한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에 포함되었다.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에서도 최승희를《일제강점하 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에 명시된 친일반민족행위 결정 심의 대상자 명단에 올렸지만 그의 친일 행위와 관련된 논란이 많다는 사실, 일제 강점기 당시의 사회적 분위기에서 드물게 조선 문화를 세계에 알린 사실이 인정되어 기각했다.

최승희의 국방헌금 헌납은 강요된 것이었으리라는 추측이나, 설혹 친일행위가 사실이더라도 이로 인해 그의 춤에 대한 역사적 평가가 폄하되어서는 안 된다는 주장 등 일제 강점기의 행적에 문제가 없었으리라는 주장도 있다.

또한 광복 후 남편인 안막을 따라 월북해서 최승희 무용연구소(평양특별시)를 세워 소장에 취임하고 공훈배우. 인민배우 칭호를 받은 뒤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선출되기도 했다. 1958년 안막이 숙청되면서 연금 당했다는 설이 나돈 이래, 행적이 거의 알려지지 않아 숙청된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사후 34년 뒤인 2003년 2월 한설야와 함께 복권되었고, 같은 해 묘지는 애국렬사릉으로 이장되었다고 한다.

한때는 홍천군에서 최승희의 춤 축제와 사업 등을 고려하였으나 친일과 월북에 따른 반대여론으로 중단되었다.

예술은 이념과 사상이나 정치를 초월해 창작되는 것임으로 정치적 목적으로 예술인을 가장 많이 이용하려하기 때문에 교묘하게 이용당하고 처절하게 버림받기도 하여 때로는 불행한 역사에 제물이 되기도 했다.

'내고장 넓은 내(洪川)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넓은 내 이야기  (12) 2024.09.18
남강 김창묵 선생 숭모비  (0) 2024.09.15
아동청소년의 꿈이음  (0) 2024.07.22
홍천기미만세운동대회  (1) 2024.04.03
바르게살기운동  (0) 2024.03.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