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일보
[역사속의 강원인물]`인재
한서 남궁억 선생' 전문가 지상좌담
한서 남궁억(1863~1939) 선생은 77세의 일기를 대한민국 자주독립에 대한 열망으로 온갖 고초를 당하면서도 올곧은 민족의 지도자로서의 삶을 살았다. 또 1918년 강원도 홍천으로 낙향해 교육운동과 무궁화 보급사업을 통해 민족혼을 바로잡기 위해 힘쓴 인물로 기억되고 있다.
한서 남궁억 선생의 생애와 선생이 일깨우려 한 무궁화의 의미, 향후 선양사업의 방안에 대해 각계 전문가들의 의견을 들었다.
허기영 “민족에 모든것 쏟았던 정치가이자 교육자·언론인”
석도익 “무궁화 보급·선양 통한 민족정신운동 최초로 시도”
연제춘 “나라꽃 무궁화 축제 매년 개최 선생 정신·업적 기려”
-남궁억 선생과 홍천의 인연에 대해서 말씀해 주세요
△허기영 홍천문화원장=문화는 그 나라의 역사 속에 뿌리를 두고 면면히 내려온 민족만의 자랑이며, 이를 바탕으로 창조적으로 계승 발전시켜 나감은 그 민족이 무한히 발전해 나갈 수 있는 활력의 원천이라 하겠다.
우리 후손들은 그런 문화 속에서 선현들의 지혜를 배우게 될 뿐만 아니라, 그 배움 속에서 가치관을 발견하게 되며 더욱 민족문화로 승화시키게 된다는 것이다.
우리 홍천은 한서 남궁억 선생의 숭고한 정신과 얼이 담겨 있는 역사의 고장, 충절의 고장이다.
한말의 풍우 속에서 선각의 정치가요, 교육자였으며 사상가로서 겨레의 주권을 옹호하였고 우리나라 최초의 언론인으로서 황성신문을 창간하여 민족의 정의와 주권회복, 조국의 미래를 위해 후세 교육에도 전념을 했다.
뿐만 아니라, 겨레의 꽃 무궁화 보급을 위해 일하다가 옥고를 치르는 등 77년이라는 세월을 오직 겨레를 위해 살다간 민족의 등불이었다.
`무궁화의 고장 홍천'이라는 무궁화 메카 도시로 거듭나게 된 것도 모두 한서 남궁억 선생의 얼을 이어가는 맥락이라고 아니할 수 없다.
우리 홍천군민의 헌장을 보면 한서 남궁억 선생의 애국정신을 바탕으로 새마을 운동이 불타오르고 있는 유서 깊은 고장이라고 서두에 기록되어 있다.
이렇게 훌륭한 한서 남궁억 선생의 선양사업을 위해 홍천군에서는 추념식을 비롯하여 지금의 나라꽃 무궁화 축제의 기반이 되었던 한서문화제, 학생백일장, 전국한시백일장, 무궁화 사진 공모전 등 다양한 사업을 펼치고 있으며 이 밖에도 한서 남궁억 선생을 소재로 한 선양사업을 연구하여 홍천을 찾는 분들의 마음속에 남궁억 선생의 얼을 심게 할 것이다.
2011년 신묘년이 되어 한서 남궁억 선생이 소천한 지 72주기가 되었다. 그때에 일본의 식민지였고 외세의 어려움을 겪었던 대한민국이 이렇게 부강한 나라로 우뚝 선 것은 바로 한서 남궁억 선생 같은 훌륭한 선열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앞으로도 우리 기성세대는 후손들에게 물려줄 아름다운 강산과 영광된 조국을 위하여 뼈를 깎는 정신으로 새 역사 창조에 함께 노력해야 할 것이다.
-남궁억선생이 우리에게 널리 알리려 했던 무궁화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석도익 홍천문인협회장=한서 남궁억 선생은 잃어가는 나라의 민족정신을 일깨우기 위한 정신적 운동으로 무궁화나무심기 운동을 대대적으로 펼치고 무궁화 묘목을 보급하기 시작하였으며, 무궁화로 노랫말을 만든 `무궁화 동산가'와 찬송가에 올린 `삼천리반도 금수강산' 이라는 노래로 민족혼을 일깨워 나갔다. 이를 보고만 있을 수 없었던 일제는 무궁화 묘목을 불태우고 이들을 구속하였으며 모곡학교는 공립학교로 강제 편입시켜 버렸다.
1935년 선생은 복역 중 병으로 석방되었으나 옥중에서의 여독으로 4년 뒤인 1939년에 순국하였다.
선생은 강원도와는 인연이 있어 양양군수로 재직 시 현산학교를 설립한 바 있다. 어디를 가나 교육을 우선하였으니 나라를 일으키는 길은 인재육성이 첫째라는 것을 일깨운 선각자다.
또한 나라 잃은 망국의 민족에게 우리나라의 상징인 무궁화를 보급하고 선양함으로써 민족정신운동을 최초로 시도한 민족지도자다.
일제의 한민족정신 말살정책으로 무궁화를 통한 국민정신운동을 송두리째 뽑아버리고 뭉개버리기 위하여 전국의 무궁화를 멸종시키려 하였으며 무궁화는 사람에게 이롭지 못하며 좋은 나무나 꽃이 아니라는 편견을 주입한 정책이 오래도록 우리 국민 정신 속에 남아 있어 한서 남궁억 선생의 큰 뜻에 부끄러울 뿐이다.
선생이 홍천에 내려와 무궁화의 씨앗을 뿌렸기에 그 무궁화는 홍천에 뿌리를 내리고 꽃이 피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흘렀지만 결코 헛되지 않고 꽃이 피기 시작했다.
1977년 홍천군민은 한서남궁억선생기념사업회를 창립하고 선생의 나라사랑 얼을 선양하기 위한 한서문화제를 개최하기 시작하였다.
우리 민족의 정서와 심성을 닮아 가슴에 피어나는 꽃 무궁화는 나라꽃이라 지정되지 않았어도 나라꽃으로 자리매김한 무궁화는 민족지도자 한서 남궁억 선생의 얼이 깃든 홍천에서 더욱 아름답게 피어나고 있다.
선생의 얼을 이어받은 홍천군은 이로 인하여 무궁화 메카도시로 선정되었다. 홍천군민은 한서남궁억선생의 유지를 받들고 무궁화의 아름다운 역사를 써나가고자 한다. 또한 온 국민의 이름으로 정부와 국회에서는 무궁화가 나라꽃임을 공식 지정하여 공포하도록 촉구하는 바다.
-한서 남궁억선생 선양사업에 대해 말씀해 주세요
△연제춘 홍천군문화체육과장=홍천이 무궁화의 고장이 되고 한서 남궁억 선생을 기리는 고장이 된 것은 홍천군 서면 모곡리(일명 보리울)에서 남궁억 선생이 민족정신의 부활과 대한독립을 위해 왜경의 감시를 피해 뽕밭으로 위장한 무궁화 묘포장을 만들어 전국 방방곡곡에 무궁화묘목보내기 운동을 펼친 곳이기 때문이다.
홍천군에서는 한서 남궁억선생에게 1977년 정부로부터 건국훈장국민장이 추서된 이후 1979년까지 홍천군 서면 모곡리에 선생의 묘역을 정비했다. 2000년에 이르러서는 강원도지정문화재(기념물 77호)로 지정됐다.
1977년부터 매년 4월5일 남궁억선생 추모제를 거행하고 있는 `한서문화제'는 2008년 30회까지 치르다 2009년부터는 `나라꽃 무궁화축제'로 명칭을 바꾸어 매년 개최하고 있다.
또 2001년에는 충렬탑, 남궁억 동상, 3·1운동 만세비, 전몰군경위령탑 등이 있었던 홍천읍 연봉리 무궁화공원에 무궁화를 수종별로 식재하고 분수대 광장, 야외 공연장을 새롭게 조성한 무궁화 테마공원을 개장해 주민들에게 개방했다.
홍천군 서면 모곡2리 387번지 7,477㎡부지에는 2001년부터 2003년까지의 공사로 328㎡ 면적의 한서남궁억기념관을 건립해 한서 남궁억선생의 유품과 무궁화 관련자료 등을 전시하고 있다.
한서 남궁억선생은 1863년(철종14)부터 1939년까지 구한말과 일제강점기를 살아온 신문화 운동의 선각자이자 독립운동가이다.
한서 남궁억선생은 1863년 12월 27일 서울 정동 양반 가문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한학을 배웠고 외국어학교를 졸업한 후 1886년에 어전통역관으로 관직에 입문하여 칠곡부사, 내무부토목국장, 성주목사, 양양군수를 역임했다.
매관매직에 관여하지 않고 청렴한 관리로 본분을 다하였고 민족의 독립과 국권 회복이라는 대의를 실현하기 위하여 민중계몽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고 언론인·교육자·종교인으로 민중계몽과 구국교육에 선각자로서 활동한 분이다.
특히 서재필, 이상재 등과 함께 독립협회를 창립하고 황성신문 사장과 대한협회 회장직을 역임하면서 독립신문, 황성신문, 교육월보 등 언론을 통한 민중계몽에 앞장섰으며 양양에 현산학교, 홍천군 서면 모곡에 모곡학교를 설립하여 구국교육에 열정을 다했다. 이러한 업적을 남긴 남궁억 선생을 홍천군에서 선양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라고 하겠다.
정리=오석기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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