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농촌문화 해설 >
겨리농경문화가 만들어내는 농심(農心)
소설가 석 도 익
홍천의 발원(發源)
이곳은 넓은 내가 흐른다 하여 지명이 홍천(洪 넓은 홍 川 내천)이라 하고 합니다. 이렇게 강 이름이 지명이 되고, 지명이 강 이름으로 불러지는 유일한 홍천 강은 백두대간 허리쯤인 청량봉미약골에서 발원한 물줄기가 홍천군의 9개면 1읍의 지천을 모두 모아가며 굽이쳐 400리를 흘러가 북한강에 합류하고 다시 한강이 되는 큰물길인 생명의 핏줄기자 살아가는 젖줄기인 것입니다. 아름다운 홍천을 이야기 하는데 여러 말이 필요 없이 홍천을 그림 그리듯이 잘 표현한 시 한편을 먼저 소개함으로서 이해를 돕겠습니다.
홍천의
강물은
넓지도 않고 좁지도 않고
깊지도 않고 얇지도 않으며
산은
위압적으로 높지도 않고 비굴할 정도로 낮지도 않았다.
들은
막막할 정도로 넓지 않고 궁색할 정도로 좁지 않으며
개 짖는 소리는 멀리 들리고 닭이 우는 소리는 한가했다.
이 글은 조선말 격동기에 선비의 상징적 인물로 철학자요 교육자 이신 화서 이항로 선생님의 글로서 화서집(華西集)에 기록된 것입니다.
화서 이항로 선생은 1792년 2월 13일 경기도 양평군 서종면 노문리 벽계마을에서 탄생하여 1868년 3월 18일 서거하기 까지 높은 관직이나 영화를 사양하고 백년대계를 위한 후학을 길러 나라에 근간을 세운분이입니다.
선생은 고향인 벽계를 떠나지 않고 오로지 학자와 학문을 위한 교류와 후학에 힘쓰다 잠시 금강산을 다녀오는 길에 홍천을 지나치다 산과 강에 매료되어 자신의 나이마저 잊고 이상형 마을을 만들기 위한 꿈을 펼치던 곳이 홍천군 화촌면 홍천 강 마지막 포구였던 삼포마을이다.
그는 이 꿈을 이루기 위하여 61세에 8년의 세월 동안 벽계를 떠나 홍천에서 이상형의 낙원을 만들어 가던 중 가정 사정으로 69세에 고향으로 다시 돌아가면서도 자꾸 뒤돌아보게 하던 곳이 홍천의 산하라고 했습니다.
홍천에 산은 높지도 험하지도 않으니 이곳 사람 또한 모나지 아니하고 온화하며, 강은 위협적으로 깊지도 갑갑하게 좁지도 아니하니 여기 터 잡아 사는 사람 또한 마음 넓고 정이 많아 홍천에는 다툼이 없으니 송사가 없고 평온하여 관리가 정사보기가 수월하기에 누워서도 정사를 볼 수있다하여 와치현(臥治懸) 이라는 말이 있던 곳이 홍천이라고 합니다.
홍천읍 시내 중심을 동서로 가로질러 흐르는 홍천강은 화양강이라고도 하지만, 전국에서도 유일하게 강 이름을 지역이름을 따서 홍천강이라고 부르고 있는 데는 나름대로의 특수한 환경이 이를 뒷받침하고 있습니다.
흐르는 강물은 각 지역 물이 모이고 모여 여러 지역을 거쳐 흐르기 때문에 지역이름을 붙인다는 것이 쉽지 않지만 홍천의 강물은 다른 지방에 물의 유입이 전혀 없이 홍천군관내 지천을 모두 거두어 홍천 땅으로만 흐르기 때문에 홍천의 지명을 그대로 따서 부른다고 한들 누가 뭐라 할 시비 거리가 없는 유일한 지명을 붙여 부르는 강이기도 합니다.
홍천은 사방이 산수화의 병풍으로 둘러친 듯이 크고 작은 산에 에워싸여 아늑하게 터 잡은 작은 분지인 홍천읍을 가운데 두고 9개면이 사방에서 변방을 지키는 형국입니다.
태백준령자락인 서석의 생곡 미약골에서 발원한 홍천강은 내면 고원 뱃재에서 부터 계곡마다에서 시작되는 물줄기가 모이고 흘러내리는 물과 합쳐져 탄력을 받은 물줄기는 동학운동이 역사에 무덤을 남긴 풍암들과 3.1독립만세 운동의 장터였던 동창에서 용호강으로 이름하고, 다시 두촌면 등지의 물이 북창에서 합쳐지며, 순민들의 마음을 빚어 내리며 화촌면을 감싸고 흘러와 공작산 푸른 깃에서 빠져나온 덕치의 시린 물과 태학에서 합수되어 홍천시내를 가로질러 내려가니 이곳의 강언덕에는 선사시대부터 터 잡고 살았던 우리 조상들의 삶의 흔적을 간직하기도 했으며, 대룡산 물을 더하여 굽이쳐 흘러가다가 금학산 자락 마을 노일에다 산 태극(山太極) 수 태극(水太極)을 그려놓기도 합니다.
푸른 물살에 설악산 일부가 떠내려 온 것 아닌가 싶을 정도로 닮아 작은설악산이라 일컫는 팔봉산을 품어 안고 돌던 강물은 여유포구에서 잠시 숨을 고르다가 남면(금물산)에서 내려온 용수천을 더하여 듬직한 몸집으로 용트림하며, 무궁화로 민족의 얼을 찾아 조국을 수호하고자 무궁화 묘목을 심어 삼천리강산을 무궁화나라로 만들려했던 한서 남궁억 선생의 얼이 깃든 서면(감물악) 모곡 보리 울에서 홍천군의 10개 읍면의 모든 지천을 다 모았습니다.
홍천강의 맑고 푸른 물줄기는 거대한 청평댐 청평호에서 400리 긴 여정을 마치고 풍만한 댐에서 잠시 숨을 고르다가 전기 터빈을 돌리고 넘쳐흘러 북한강에 합류합니다. 북한강은 두 물머리 양수에서 남한강과 합류하여 수도서울의 생명수로 한강의 문화를 창출하고 있습니다.
이른 아침 물안개 피어오르는 홍천강을 바라보면 가슴 벅차게 떠오르는 마음속에 태양의 밝은 빛을 볼 수 있고, 하늘이 곱게 눈감는 일몰, 붉게 물 드는 강물에서 송사리 떼 높게 뛰어오를 때마다 반짝이는 고기비늘과 물방울이 함께 석양빛에 물들어 환상적인 아름다움을 연출하는 홍천강은
400리 물길 굽이쳐 흐르는 홍천강 언덕에는 선사시대부터 모여 살았던 선조들의 홍익(弘益)의 넋이 넓은 내를 수호하며 산맥(山脈)은 호상(虎狀)으로 용기 중천하고 수맥(水脈)은 용상(龍狀)으로 기상이 승천하니 인재 또한 출중한 무궁이요, 홍천은 무궁화의 고장으로 아름답게 피고 또 피어나고 있는 곳입니다.
이곳 홍천은 전형적인 농촌으로 소 키우고 농사 짖고 살아왔습니다. 우리들의 조상들도 성격이 온순하여 사냥을 하고 살지 못하고 농경사회를 이루고 서로 협동하여 두레로 힘을 모아 농사짓고 살아왔기에 그 품성으로 자연으로 융화되어 자연을 사랑하는 농심으로 이어져 삶을 살아왔습니다. 사냥을 하며 살았다면 품성이 잔악해야 약육강식에서 어쩔 수 없는 포악성을 지닌 모습으로 살았을 것입니다.
겨리농경문화가 꽃피운 농심
아지랑이가 지평선에 신기루같이 피어오르는 언덕, 사래긴 목화밭 겨우내 솜이불 같은 하얀 눈을 덮고 잠자던 땅이 우람한 황소 마라와 만삭인 암소 안야 가 하나의 멍에를 메고 끄는데 겨리쟁기탑손을 불끈한 손으로 잡고 흙을 깊이 파서 이랑을 만들고 나가는 쟁기꾼 밭갈이 소리가 큰골에 구성지게 울려 퍼집니다.
“이랴 ~ 어~여 힘차게 당겨라~ 진달래피고 뻐꾸기 울기 전에 이 밭을 다 갈아보자~ 마라는 이랑을 밟지 말고 안소는 두렁을 타고가거라 ~ 어허 후후 ~ 마라는 부지런히 안쪽으로 돌고 안소는 제자리에서 천천히 돌아 주거라 어허 후후 ~”
겨리 소 쟁기꾼인 이장네 수양아들이 모는 두 마리의 소가 하나가 되어 끌고 당기며 앞으로 나가니 웅크렸던 겨울이 몸을 펴고 이랑이 생기며 포실한 봄이 널브러집니다.
봄이 되면 제일먼저 메아리로 울려 퍼지는 구성진 논밭갈이 소모는 노랫소리는 그 어떤 가사나 특별한 곡조는 없더라도 봄을 맞이하는 여인들의 설레는 마음의 흥분을 일으키기에는 충분합니다.
우리나라 중부이북지방은 산지가 많아 화전을 일구어 만든 밭은 경사가 심함으로 남쪽지방같이 소 한 마리로 논밭을 갈 수 있는 홀이 쟁기로는 소가 힘들어함을 배려하여 소 두 마리를 끄는 겨리농경문화입니다.
포용하는 땅의 마음에 순박한 사람의 마음을 심고, 넓은 하늘의 마음을 헤아리는 농부는 많은 생명을 키워내 공생 공존하며 살아가는 농경문화에 뿌리가 여기에 있습니다.
선사시대부터 한반도에 터 잡은 선조들은 짐승을 잡아먹는 수렵이나 방랑하는 유목을 하기 보다는 땅에서 얻어지는 농사를 택하여 힘든 일을 하는 농심의 삶이 이어져 왔습니다.
농심은 씨앗을 심을 때도 한 알이면 될 것이지만 굳이 셋을 심었으니 세 알 중에 하나는 새를 위해 하늘에 주는 것이요. 하나는 벌레를 위해 땅에 주는 것이며, 마지막 하나가 나의 것이라 하여 셋을 심었습니다. 농사는 씨앗부터 함께 나눔이 목적이었습니다.
창조주 말고는 귀중한 생명을 키워내는 것은 농부밖에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일중에서는 농사일이 가장 힘들고 어렵지만, 농사는 나눔이었고, 농사는 협동이었고, 그 협동에 겨리농경문화가 있다고 보아야 합니다.
예전에는 일가친척이 모여 한마을을 이루고 살던 씨족사회였기에 어쩌다 외지에서 새로 이사 온 사람이 살기가 서먹했고, 외롭게 살기 힘들 고 일가친척이 그리워 마을에 마음이 맞는 사람들끼리 서로 의형제를 맺어 형님동생 오빠 누이동생 하며 지냈는가 하면, 자식이 없는 집에서는 수양아들 딸을 맺어서 진짜 친척보다 더 친근하고 가깝게 함께 웃고 함께 울며 정을 나누며 남이지만 동기간을 만들어 피붙이같이 살았는데 이것을 이여동기간이라고 했습니다.
또한 힘든 농사일을 함께해주었던 농우는 농가에서는 없어서는 안 되는 식구이고 일꾼이자 친구였습니다. 논밭을 갈고 짐을 나르고 그 부산물로 농토를 살찌우기까지 했던 농부의 단짝이 소였고 재산목록 제 1호이기도 하였습니다.
가난한 농촌에서 누구나 소를 키울 수 없음으로 농사일을 하기 위해서 마을에 소 있는 두 집은 겨리 소 짝을 약속하고 소가 없는 사람들도 함께 두레패를 결성해서 서로 협동으로 농사를 짓게 됩니다.
이와 같이 겨리 소 짝을 정하니 사람도 이여지고, 일가친척 없는 외로움도 이여동기간을 만들어 피를 덥히고, 두레로 힘을 합쳐 풍년을 만들어 내며, 마을에 인정의 샘터를 만들며, 천심(天心)과 지심(地心)을 경영하는 농심(農心)으로 살아왔음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홍천이 지켜온 겨리 소 농경문화
홍천군은 전국에서도 가장 큰 면적(1.818.68k㎡)을 자랑하지만 주로 산간으로 지난날에는 화전 밭이 주를 이루었다. 비탈지고 척박한 땅일지라도 포용하는 (地心)땅의 마음에 순박한 (人心)사람의 마음을 심고, 넓은 (天心)하늘의 마음을 헤아리는 농부는 많은 생명을 키워내 공생 공존하며 살아가는 농경문화에 뿌리가 여기에 있습니다.
굽이 도는 강변에 선사시대부터 터 잡은 선조들은 짐승을 잡아먹는 수렵이나 방랑하는 유목을 하기 보다는 땅에서 수십 배의 소득이 얻어지는 농사를 택하여 스스로 힘든 일을 하며 살아왔을 것이다.
농사를 지면서 지성(地性)을 알아가며 자연히 지고지순한 인성(人性)이 쌓이니 하늘에 천성을 숭배하게 되었다.
농심은 봄철이 되어 씨앗을 심을 때도 한 알이면 될 것이지만 굳이 셋을 심었으니 세 알 중에 하나는 새를 위해 하늘에 주는 것이요. 하나는 벌레를 위해 땅에 주는 것이며, 마지막 하나가 나의 것이라 하여 셋을 심었다. 씨앗부터 함께 나눔이 목적이었다.
농사는 씨앗을 뿌려 가꾸면 곱하기 수확을 할 수 있음으로 이를 다시 나누어 먹고사는 삶에 나눔의 미학이다.
창조주 말고는 귀중한 생명을 키워내는 것은 농부다. 그러므로 일중에서는 농사일이 가장 힘들고 어렵지만, 농사는 나눔이었고, 농사는 협동이었다. 그 협동에 겨리농경문화가 있다.
힘든 농부의 일을 함께해주었던 농우는 농가에서는 없어서는 안 되는 일꾼이자 친구다. 논밭을 갈고 짐을 나르고 그 부산물로 농토를 살찌우기까지 했던 농부의 단짝이 소였기에 소가 일을 그만두게 되고 단지 고기소로 키워지게 된 이금까지도 워낭소리 듣기를 끊지 못하고 끈질기게 쟁기를 손질하고 소 짝을 정하여 두레로 겨리쟁기를 메워 들녘에 봄의 교향곡 같은 밭갈이 소모는 소리가 울려 퍼지는 고향마을을 이어가려는 우직한 사람들의 뜻이 결실을 맸었습니다.
“지난 2021년 5월 강원도 무형문화재 제33호로 '홍천 겨리농경문화' 가 지정되었습니다.”
힘든 논밭갈이를 위하여 쟁기를 만들고 소를 이용하기 시작하면서 남부지방에는 소 한 마리로 논밭을 가는 것을 홀이라 하고 중부이북지방에서는 산간지역 경사진 땅이고 소의 힘을 나누어 주기위해 두 마리로 논밭을 가는 겨리를 이용하게 되었는데 이는 짐승에게도 배려하는 마음이 바탕이 되었을 것이다.
겨리농경문화는 두 마리 소를 잘 관찰하여 힘이 부족한 소를 행동반경이 적은 왼쪽에 쟁기를 메워 안소라 하였고 힘이 좋은 소를 오른쪽에 메워서 마라소라 부르며, 쟁기를 운전하며 가는 사람과 서로의 호흡을 맞추며 거칠고 굳은 땅을 일구어 농사를 지었습니다.
힘든 농사일을 도맡아 하는 소는 농가에서는 한식구로 인식하여 먹이고 보살피기에 정성을 다했으며 농사철 농우의 목덜미는 털이 벗겨지고 굳은살이 생기고 같이 논밭을 갈고 농사를 짓는 농부의 고단한 삶이 오롯이 담겨 있는 농경문화입니다.
홍천 겨리농경문화가 강원도 무형문화재로 지정되기까지 기계문명의 발달로 사라져가는 문화의 명맥을 이어온 소중한 이들이 있었고 이들은 ‘홍천 겨리농경문화 전승회’로 인정되어 소중한 문화재를 전승해 갈 것이라고 합니다.
우리나라의 농경문화는 전 세계어디에도 없는 아름다운 인성을 담아내고 있습니다.
한국인은 원래 선한 품성을 가진 백의민족으로 우리 조상들은 작은 벌레의 생명조차도 가볍게 여기지 않았습니다.
뜨거운 개숫물을 마당에 버릴 때에는 이렇게 외쳤다고 합니다.
“워이 워이!”
물이 뜨거워 벌레들이 다칠 수 있으니 어서 피하라고 소리친 것이랍니다.
봄에 먼 길을 떠날 때에는 오합혜(五合鞋)와 십합혜(十合鞋), 두 종류의 짚신을 봇짐에 넣고 다녔는데, 십합혜는 씨줄 열 개로 촘촘하게 짠 짚신이고 오합혜는 다섯 개의 씨줄로 엉성하게 짠 짚신을 가리키는데, 행인들은 마을길을 걸을 땐 십합혜를 신고 걷다 산길이 나오면 오합혜로 바꾸어 신곤 했다고 합니다.
벌레가 알을 까고 나오는 봄철에 벌레들이 발에 깔려 죽지 않도록 듬성듬성 엮은 짚신을 신은 것입니다.
오합혜는 십합혜보다 신발의 수명이 짧았으나 그 만큼 벌레가 밟혀죽는 숫자가 적게 되기를 기원하는 것입니다.
또한 농부들은 동물의 끼니까지 살뜰히 챙겼습니다.
곡식을 심을 때엔 세 알씩 심었는데, 한 알은 땅 속에 있는 벌레의 몫으로, 또 하나는 새와 짐승의 몫으로, 마지막 하나는 사람의 몫으로 생각한 것이랍니다.
한편 감나무 감을 모두 따지 않고 꼭대기에 몇 개는 ‘까치밥’으로 남겨놓았고, 들녘에서 음식을 먹을 때에도 제일먼저 음식을 먹게 해준 신에게 바친다하여 "고수레" 하면서 멀리 던지는데 실은 풀벌레들에게 음식을 나누어주는 의식이 있습니다.
이러한 미덕(美德)은 우리의 식문화에도 그대로 배어있습니다. 여인들은 3덕(三德)이라고 해서 식구 수에 세 명의 몫을 더해 밥을 짓는 것을 부덕(婦德) 으로 여겼습니다.
이 또한 걸인이나 가난한 이웃들에게 나누어 먹을 수 있도록 하려는 것 이었습니다.
홍천은 농경문화의 산실
장편소설 '대지'로 1933년 노벨 문학상을 받은 '펄 벅' 여사의 한국사랑은 유명합니다. 그녀는 중국에서 선교 활동을 했던 부모님을 따라 약 40년을 중국에서 보냈음에도 평생 한국을 가슴 깊이 사랑했습니다.
그녀는 자신의 작품 '살아 있는 갈대'에서 다음과 같이 한국에 대해서 예찬했습니다.
'한국은 고상한 민족이 사는 보석 같은 나라다.'
또 그녀가 남긴 유서에는
'내가 가장 사랑한 나라는 미국이며, 다음으로 사랑한 나라는 한국'이라고 쓰여 있을 정도입니다.
그녀의 극찬은 한국에서 겪었던 특별한 체험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1960년 펄 벅이 소설을 구상하기 위해 한국을 찾아왔는데, 여사는 늦가을에 군용 지프를 개조한 차를 타고 경주를 향해 달렸습니다.
차가 경주 안강 부근을 지날 무렵, 볏단을 가득 실은 소달구지가 보였고, 그 옆에는 지게에 볏짐을 짊어진 농부가 소와 함께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여사는 차에서 내려 신기한 장면을 카메라에 담다가 여사가 길을 안내하는 통역에게 물었습니다.
“아니, 저 농부는 왜 힘들게 볏단을 지고 갑니까? 달구지에 싣고 가면 되잖아요?”
“소가 너무 힘들까 봐 농부가 짐을 나누어지는 것입니다. 우리나라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이지요.”
여사는 그때의 충격을 글로 옮겼다고 합니다.
“이제 한국의 나머지 다른 것은 더 보지 않아도 알겠다. 볏짐을 지고 가는 저 농부의 마음이 바로 한국인의 마음이자, 오늘 인류가 되찾아야 할 인간의 원초적인 마음이다.
내 조국, 내 고향, 미국의 농부라먼 저렇게 힘들게 짐을 나누어 지지 않고, 온 가족이 달구지 위에 올라타고 채찍질하면서 노래를 부르며 갔을 것이다.
그런데 한국의 농부는 짐승과도 짐을 나누어지고 한 식구처럼 살아가지 않는가.”
그리고 또 다른 이야기가 있는데 '까치밥'에 얽힌 일화입니다.
어느 날 그녀는 따지 않은 감이 감나무에 달린 것을 보고는 통역을 통해 근처에 있던 사람에게 물었습니다.
"저 높이 있는 감은 따기 힘들어서 그냥 남긴 건가요?"
"아닙니다. 이건 까치밥이라고 합니다. 추운겨울 새들을 위해 남겨 둔 거지요."
그녀는 그 사람의 말에 너무도 감동하여 탄성을 지르며 말했습니다.
"내가 한국에 와서 보고자 했던 것은 고적이나 왕릉이 아니었어요.
이것 하나만으로도 나는 한국에 잘 왔다고 생각해요!"
감이나 대추를 따더라도 까치밥은 겨울새들을 위해 남겨 두는 마음.
지극히 작은 생명 하나도 배려하는 고상한 민족이 바로 우리
한민족이었습니다.
구한말 개화기에 한 선교사가 자동차를 몰고 시골길을 가고 있었다.
그는 커다란 짐을 머리에 이고 가는 할머니를 보고 차에 태워드렸다.
저절로 바퀴가 굴러가는 신기한 집에 올라탄 할머니는 눈이 휘둥그레졌습니다.
뒷자리에 앉은 할머니는 짐을 머리에 계속 이고 있었습니다.
“할머니, 이제 그만 내려놓으시지요?"
선교사의 말에 할머니는 순박한 웃음을 지으며 대답했습니다.
“아이고, 늙은이를 태워준 것만 해도 고마운데, 어떻게 염치없이 짐까지 태워달라고 할 수 있겠소?”
차를 얻어 타고서 차마 머리에 인 짐을 내려놓지 못하는 선한 마음이 우리의 모습이었다.
양은냄비보단 투박한 질그릇을 사용했고 동적인 사랑보다는 정적인 정을 주었던 민족입니다.
홍천군에서 처음으로 지정된 무형문화재 “홍천 겨리농경문화”는 홍천, 더 나아가 강원의 대표 문화재로 전승 발전시킬 계획이라고 합니다.
농자천하지대본 [農者天下之大本]이라고 했습니다. 산업사회 문명의 첨단에서 원시적인 농업으로 회향하려는 것이 아니라, 지고지순한 농심에서 지성을 배우고 인성을 쌓고 천성을 터득하는 일입니다. 단순 겨리농경문화를 보존하고 체험하는 곳이 아니라 나누는 농심에서 힘들어하는 소를 아껴서 둘이 끌게 하는 겨리와 짐도 소와 나누어지고 가고, 사람들도 서로 이어져 소 짝을 하고, 품앗이로 두레로 협동하여 자연을 가꾸고 심고 키우면 땅과 하늘이 내어주는 먹거리를 서로 나누며 살아가는 인심과 인성을 보고 느끼고 배울 수 있는 농심도장을 만들어 우리의 아름다운 농경문화를 보존하고 이어서 인본(人性)의 농심(農心)을 가꾸어 널리 심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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