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님의 시인

돌 박사 2022. 8. 27. 13:40


[ 한용운의 시와 민족 사랑 ]
                                          ◇ ' 님 '의  시인,  /한 용 운               
우리 근대 시사의 강물 위에
가장 세찬 민족혼의 물결을 일으켰던 대표적인 시인은
만해 한용운이 아닐까. 
김소월은 고향 근처 시골에 칩거했지만, 
만해는 
“중앙의 문단에서 올연히 서 있는
초대형의 시기(詩器)”(김병익, 『한국문단사』, 1973)였다니 말이다. 

두루 아는 바처럼
만해는 선각의 승려였고, 
불굴의 독립운동가였으며, 
그리고 뛰어난 시인이었다. 
이러한 만해의 세 가지 사회적 자아는
어떤 것도 따로 떼어 생각할 수 없는 삼위일체로서
이상적 인간 존재를 구성한다.
‘님’의 시인 만해라는 큰 빛을 따라
조어(釣魚)에 나서는 아침은, 
마음이 간절하면서도 설레고
설레면서도 경건하다.
 
우리가 만해 시를 이야기할 때, 
늘 먼저 나오는 질문은 
‘님’이 무엇을 가리키느냐 하는 것이다.
1926년에 나온 『님의 침묵』은
우리 근대 시사의 찬연한 금자탑으로서 
88편의 주옥같은 시가 실려 있는데, 
표제부터 모든 작품이 임과 관련된 것이며 
‘님’과 ‘당신’이 쓰이지 않은 시가 거의 없다시피 한 
‘님의 시인’ 한용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서 
‘님’이 무엇을 뜻하는지에 대한 대답을 똑떨어지게 말하기는 쉽지 않다. 
누구는
그 임을 연인이라고 해석하고, 
누구는
국가나 민족이라 하고, 
또 어떤 이는
부처나 불법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그 임이 
‘그리움’의 대상이라는 점이다. 

만해의 서정적 자아가
항상 그리워한 대상이 무엇이든
그것은 그리움의 지평에 나타나지 않는 ‘침묵’의 존재라는 점이 더욱 중요하다. 
인간이 원초적으로
고해(苦海)에 뜬 존재이지만
만해의 삶 또한 비극적 역경이 지속된 험로였음은 
‘님’이 취한 원망스러운 ‘침묵’의 결과가 아닐까.

1879년 8월 29일
충남 홍성군 결성면 용호리에서
아버지 한응준(韓應俊)과 어머니 온양 방씨의 차남으로 출생한 만해는 
6세에 『통감』을 읽었고, 7세에 『대학』을 자력으로 이해했으며, 8세에 『서경』에 통달한 천재라고 전한다. 
그리고 13세에
첫 부인 창성 방 씨와 결혼했고, 17세인 1896년 아버지와 함께 동학농민운동에 참가하여
홍성 호방(戶房)을 습격하여 군자금 일천 냥을 탈취했다. 

이러한 유소년기의 삶은
한 마디로 정규 교육을 받지 못하고
독학한 불우한 성장기였음을 뜻한다. 
어려서부터
그의 ‘님’은 부재했거나 침묵한 것이다.

동학혁명이 실패하자 만해는 
24세 되던 1903년
설악산 오세암에 들어가 불교 공부를 시작했다. 
그리고 1년여 만에 팔만대장경을 독파한 그는 
26세 되던 1905년 백담사에서 삭발하고 김연곡 화상(金連谷 和尙)에 의해 스님이 된다.
1908년에는
일본의 도쿄, 교토 등지를 돌며 신문물을 배웠다.
1909년에는 
『조선불교유신론』을 저술했고,

1911년
송광사, 범어사 등에서
승려궐기대회를 열어 민족불교를 일본불교에 예속시킨 것을 비판하고
조선 불교의 자존과 승려의 독립사상을 고취하는 등 불교개혁에 헌신했다. 

총독부가
이른바 내선불교정책을 세우고 31 본산을 결성하여
만해를 연사로 초청했을 때, 
그는 짧은 자문자답식 강연을 한 것으로 유명하다. 

―세상에서 제일 더러운 것은? 똥! 
똥보다 더 더러운 것은? 
썩고 있는 시체! 
그보다 더한 것은?
31 본산 주지 너희놈들이다!― 

1918년에는
잡지 『유심』을 발간하였으며, 1923년에는 
『불교대전을 국한문으로 편찬하기도 했다.
1930년에는 
『불교』 지를 인수했고, 
승려 독립 투쟁 비밀 결사인 ‘만당(卍黨)’의 영수로 활동했다. 

만해 선사는
한국 불교사에 뚜렷한 큰 업적을 남긴 것이다. 
이와 같은 그의 종교적 삶은 숭고한 것이지만, 
그것은 침묵하는 ‘님’에 대한 끝없는 그리움의 표현이 아니고 무엇이겠가.

17세에 동학농민운동에 나섰던 만해는 
1910년 나라를 빼앗긴 설움과 분노로 해서 중국의 동북 3성으로 망명한다. 
이때 이시영 등의 독립운동가와 만나 광복운동의 하나로 의병학교를 세웠다.

1919년에는
기미독립운동 33인의 한 사람으로 참여하여 독립선언서의 ‘공약3장’을 추가하는 등 주동적인 역할을 했다. 
거사 후 체포되어 3년간 투옥되는데,
“조선 사람이 조선 독립을 했는데
어찌 일본 관헌이 재판할 권리가 있겠는가?”라며
독립운동에 대한 답변을 직접 하지 않고 
「조선독립의 서」를 집필하여 제출했다. 

그는 잡혀 들어가기 전 이미, 
①변호사를 대지 말 것, 
②사식을 넣지 말 것, 
③보석을 요구하지 말 것 등을 정하고
주위 사람들에게도 이를 명심하도록 당부하는 결기를 보였다.
1927년에는
신간회 설립에 주력하여 중앙집행위원, 경성지회 회장 등으로 활약했다.
1935년
성북동 심우장을 지을 때는
남쪽의 총독부 꼴이 보기 싫어 주춧돌을 반대 방향으로 돌려 지었다. 
독립군 지휘자 김동삼 열사가
옥사해서 시체로 나왔을 때
아무도 돌볼 용기를 내지 못했으나
만해는 후히 장례를 치러 주었다. 1942년에는
일제의 한인 학생 출정 및 창씨개명 회유를 단호히 거절했다. 
이와 같은 만해의 애국애족에 관한 사건이나 일화는 수없이 많다. 
이러한 조국 독립을 위한 만해의 역정은
한 마디로 
‘님’의 부재 또는 침묵에서 오는 부조리한 현실에 대한 결연한 투쟁이 왜 아니겠는가.

이상과 같이 만해의 생애를 요약해 볼 때, 
그가 남긴 시집 『님의 침묵』은
그의 삶이요, 사상이요, 
그의 조국이요, 
그의 종교요, 
그의 사랑이요, 
이것들이 융합된 예술적 응집체였다.

( 이  글은
서 범 석의  칼럼에서  옮겨  왔습니다 )

             *************

     ◇ 님 의    침 묵  ◇
                 /   한   용   운

님은 갔습니다.
아아 사랑하는 나의 님은 갔습니다.
푸른 산빛을 깨치고 단풍나무 숲을 향하야 난 적은 길을 걸어서 참어 떨치고 갔습니다.
황금의 꽃같이 굳고 빛나든 옛 맹서는 차디찬 띠끌이 되야서, 한숨의 미풍에 날어갔습니다.
날카로운 첫 '키쓰'의 추억은 나의, 운명의 지침(指針)을 돌려 놓고, 뒷걸음쳐서, 사러졌습니다.
나는 향기로운 님의 말소리에 귀먹고, 꽃다운 님의 얼골에 눈멀었습니다.
사랑도 사람의 일이라, 만날 때에 미리 떠날 것을 염려하고 경계하지 아니한 것은 아니지만, 이별은 뜻밖의 일이 되고 놀란 가슴은 새로운 슬픔에 터집니다.
그러나 이별을 쓸데없는 눈물의 원천을 만들고 마는 것은 스스로 사랑을 깨치는 것인 줄 아는 까닭에, 걷잡을 수 없는 슬픔의 힘을 옮겨서 새 희망의 정수박이에 들어부었습니다.
우리는 만날 때에 떠날 것을 염려하는 것과 같이, 떠날 때에 다시 만날 것을 믿습니다.
아아 님은 갔지마는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얏습니다.
제 곡조를 못 이기는 사랑의 노래는 님의 침묵을 휩싸고 돕니다.
            ---------
만해(萬海) 한용운(1879~1944)은 식민지 시대를 살다 간 혁명가요, 시인이요, 수행자였다.
'님의 침묵'은 1926년에 펴낸
그의 유일한 시집 '님의 침묵'의 표제시이자 서시이다.
이 시는 님과의 이별과 이별의 슬픔을 재회(再會)로 역동적으로 바꿔놓는다. 이런 극적 구성은
불교 특유의 유심적 상상력 때문에 가능했을 것이다.
마음의 중심을 돌이키는 것으로써
만해는
있음과 없음,
좋음과 그렇지 못한 것, 가능한 것과 가능하지 않은 것, 만남과 이별의 경계를 무너뜨렸다.
아마도
만해의 시를 올연히 뛰어나게 하는 힘은 한쪽 극단으로 치우치려는 마음의 편당(偏黨)과 굴복을 받아들이지 않으려 한
그의 수행자적 기풍에 있지 않을까 싶다. 그리고 그 지점에서 역설의 화법이 생겨났을 것이다.( 이하  생략 )

  ( 문 태 준  /  시 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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