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랑이가 자주 출몰하여 호망을 설치하고 살았다는 외진 곳 용호터에 도깨비 집을 복원하였다. 초가에서 기와집으로 바꾸었지만 나라 잃은
식민인이 조국을 찾기위해 항일운동 일환으로 위조지페를 만들었던 곳 이라고도 전해진다.
도깨비 집과 애국의사
소설가 석 도 익
지금같이 라디오 TV나 인터넷이 없었던 시절에 희미한 등잔(조그만 사기등잔에 석유를 넣고 꼭지에 심지를 넣어 불을 밝히는 도구) 불빛에 바느질을 하시던 어머니나 할머니가 가끔 들려주시던 옛날 아주옛날에 호랑이가 담배 피우던 시절, 옛날얘기 중에는 도깨비가 나왔다.
옛날이야기에 등장하는 도깨비는 일반 귀신하고는 차원이 달랐다. 도깨비를 이야기하는 그대로 마음속으로 그려보면, 그 형상부터 무섭긴 하지만 보면 볼수록 웃기는 얼굴에 머리에는 뿔이 하나 나있고, 날카로운 뿔이 박힌 쇠방망이를 들고 있으며, 장난 끼가 심해서 솥뚜껑을 그 솥 안에 처박아 넣는다든가 천정위에 붙어있게 하기도 한다.
도깨비는 못 된 사람을 혼내주는 일에는 심술을 엄청 부리며 못살게 했지만, 착한사람을 도와 줄때는 사람이 할 수없는 일도 뚝딱하면 해낸다.
어르신들의 도깨비 이야기를 들으면, 그 자리에서는 온몸이 오싹하면서도 무섭기 보다는 관심과 재미가 있었으나, 어두운 밤 밤똥이 마려워서 뒷간(화장실)에 가야할 때는 집과 멀리 떨어진 뒷간에서 그 도깨비가 나올까 무서워 잠들어 있는 형이라도 깨워서 동무해 가야 했다.
오늘날 아이들에게 도깨비 이야기는 그저 흥미진진한 이야기 거리지만 우리들 유년시절에는 성장드라마와 같은 수순이었다.
그런데 지금도 우리고장에는 도깨비 터가 있고, 그 빈터에 언제부터인가 도깨비집이 복원되어 그 옛날 도깨비가 살고 있는 듯하다.
이 야기는 1919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나라를 일본에 침탈당하고 식민으로 살아야 했던 울분과 한으로 자식들에게는, 나라마저 빼앗고 우리글과 말까지 못쓰게 하는가 하면 민족문화까지 말살하려는 일본인데 그 일본인이 세우고 가르치는 학교에 내 자식만큼은 안 보내겠다며, 아이들을 까막눈으로 만든 독립투사가 살았던 마을이 있다.
내촌면 동창리 동창기미만세운동을 주도하던 김덕원 장두는 나이 마흔이었다. 동학혁명 때에도 양반의 신분에도 불구하고 적극적으로 가담했던 그는 19세의 나이에 차기석 박종백 등과 함께 물걸리 동창을 습격해 동학혁명군의 군자금과 군수품을 확보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으며, 동학군의 마지막 항전지인 홍천 서석 자작고개 전투에 참여하기도 했다.
마침내 속내를 들어 낸 일본은 한일합방을 함으로서 나라를 송두리째 삼키고 식민을 만들고 민족성을 말살하려는 정책에 민족이 항거하여, 서울을 비롯한 각 지방에서의 만세운동 소식이 동창마을에 알려지자 김덕원 장주는 만세운동을 벌일 계획을 그가 운영하던 마방에서 추진했다.
이들은1919년 4월 1일 홍천읍에서 만세운동을 벌인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는 우리 마을에서는 4월 3일 날 궐기하기로 하고 이문순 등을 연락책으로 인근 지역에 계획을 전파했다.
연락책들은 와야리, 문현리 등 내촌면은 물론 화촌면 장평리, 서석면 수하리, 인제군 기린면 상남리, 내면 방내리 등에 사람을 보내 궐기계획을 알렸다.
4월 3일 궐기대회 소식을 들은 인근 주민들은 지금 팔열각이 있는 곳을 중심으로 마을에 수천 명이 모여 만세를 불렀다. 그러나 사전에 정보를 입수하고 숨어있던 일본헌병들은 언덕에서 만세를 부르고 있는 군중을 향해 무차별 발포했다. 이 총탄에 8명이 그 자리에서 사망하고 20여명이 총상을 입었다. 이 때 사망한 8명을 팔열사라고 부른다. 팔열사의 애국혼을 숭모하고 이들의 3.1정신을 계승하기 위해 1963년 마을에는 팔렬각이 세워졌고, 학교법인 이화학원은 팔렬중학교를 세워 현재까지 운영하고 있다.
일제는 만세운동 후 김덕원을 비롯한 만세운동 참가자들에 대한 대대적인 체포령이 내려졌다.
김덕원 장두는 수배자가 되어서 낮에는 벼락구미산에 올라가 마을에 동태를 살피면서 몸을 피해 숲속에 숨어 있었고, 밤에는 옥수수나 콩 팥 낟가리 속에 숨어 한기와 이슬을 피하다가 마침, 용호터에 사는 연규한씨가 낟가리에서 자고 산으로 올라가던 그를 보고 자기 집으로 모시고 가서 밥을 주고 밤에는 자기네 집 고물다락(초가집 천정과 지붕사이의 삼각형의 공간, 부엌으로는 공간이 뚫려있어서 부엌 아궁이의 불기와 연기 김 등의 온기가 고물다락 공간으로 올라가서 고물다락 안은 매캐한 냄새는 나지만 아늑한 공간) 에 올라가서 자라고 해서 그로부터 3년가량을 이집 고물다락에 숨어살게 되었고, 연규환 씨의 부인은 매끼마다 식사를 챙겨주었다고 한다.
김덕원 장두는 숨어 다니면서도, 일본 경찰만 피해야 되는 게 아니었다.
일본경찰보다도 실은 마을사람들을 더 피해야 되었다. 김덕원 장두가 동창기미만세운동을 개최하면서 사람들에게 “나라를 다시 찾기 위해서는 모두들 나와서 만세를 불러야한다.” 고 독려했었기 때문에 이때 나가서 만세를 부르다가 총에 맞아 죽고 부상을 당한 사람들의 가족들은 김덕원을 곱게 보아줄리 없었다.
“왜 멀쩡한 사람을 나오라고 해서 남은 죽게 하고, 병신 만들어놓고, 그런 저는 뒤지지도 않고 살아있어?” “그래 그렇게 죽으면서 만세를 불렀는데 나라는 왜 못 찾았데?” “ 남은 죽게 만들어 놓고 저만 살겠다고 도망 다니면 되는 거여?” 라며 원망을 하였다고 한다.
이로 인해서 김덕원의 집에는 사람들의 발길이 끊어졌고, 집안은 풍지박살이 되었다고 한다.
나라를 위해 의로운 일에 앞장선 사람이 오히려 이런 원한에 사면초가가 되었으니 그의 실망은 어떠했으랴! 한편 그들의 입장에서 본다면 국가라는 개념이나 이념이 없던 시대, 그저 농사나 짓고 살아온 순민들이야 배부르고 등 따듯하면 그게 사는 건데, 굳이 위험을 건드려 못 살 필요는 없었기 때문이고, 하루아침에 생때같은 가족을 잃은 슬픔에 대한 역정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의인은 의인이 알아보는 법이다. 용호터에 사는 연규환씨는 사람들 눈에 띄면 신고할는지도 모를 김장두를 자신의집 부엌 고물다락에 숨어있게 하고 밥을 해주었으니 그것도 3년씩이나 가슴을 조이며 해왔으니, 애국자가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무엇보다도 연규환 씨의 부인이 대단하신 분이었다. 당시 여인들은 밖으로 나가려다가도 남정네가 있으면 다시 집안으로 들어갔다가 다 지나간 후에야 나와서 가던 때다. 그런 시대에 모두가 무서워하고 꺼리는 경찰이 잡으러 다니는 죄인을 자기가 자고 있는 방위 천정 고물다락에 숨기고 매식을 올려주며 보살펴 주었다는 것이다. 들키면 범인은익 죄로 온 가족이 처형을 면키 어려운 상황에, 하루 이틀도 아닌 3년이란 세월을 가족도 아닌 남에게 밥을 해대기란 여간해서는 하지 못할 일이다. 더욱이 가난했던 시절이었다. 한사람의 입이라도 덜려고 했던 때였으니 더 어려웠던 일이다.
무엇보다도 더욱 가슴 조이게 한 것은 당시에 일본경찰지시로 마을청년들이 방범대를 조직해서 야경을 돌때다. 야경꾼들이 매일 모이는 집이 바로 연씨네 바깥방이었다고 한다. 바깥방에는 동네 청년들이 많이 모여 있다가 순번에 의해서 마을을 순찰 돌고 있는 터에 다락에 숨죽이고 있던 김 장두는 소변이라도 보아야 할 때면, 부엌 공간으로 내려와야 하는데 어두운 밤에 다락에서 부엌부뚜막이 닫는 벽이니 아무리 날랜 장정이라도 더듬어 내려오다가 그릇이라도 건드리면 소리가 요란하게 나곤했다고 한다.
그때마다 야경 방 젊은이들이 부엌에서 무슨 소리가 난다며 주인에게 말하면 연씨의 아내는 슬기롭게 “우리 집에는 도깨비가 있는지 밤에는 저렇게 난리를 피울 때가 있다” 며 “그러나 걱정 말라고 도깨비가 착해서 절대 해치거나 그릇도 깨치지 않고 그러니 우리는 그러려니 하고 내버려 둔다“고 했다. 이렇게 말은 했으면서도, 임기응변으로 돌려 뎄지만 간은 콩알만 해지고 진땀을 뺏을 것이다.
이런 일이 자주 있고 부터는 그 집을 도깨비 집이라고 했고, 그 집이 헐리자 그곳을 지금도 이 마을 사람들은 도깨비 터라고 부르고 있다.
당시에 이곳에 도깨비가 되어 숨어있던 김덕원 장두와 동창 만세 운동은 1970년대 이후에야 증언을 통해 비로소 세상에 알려지게 됐다.
해방 전에는 동창 만세 운동과 김덕원 장두에 대한 기록이 알려지지 않고 다만 구전에 의해 전해지다가, 해방 후 독립운동 연구자들에 의해 단편적인 내용이 발표되기 시작했고 1970년대 이후에 본격적으로 연구가 진행됐다
이에 정부는 팔열사의 공훈을 기려 1990년 일제히 건국훈장 애국장을 수여했다. 또 만세운동을 주도한 김덕원 의사에게는 1992년 건국포장을 수여했다. 대한독립 만세의 함성이 시작된 동창마을에는 1963년 팔열사의 뜻을 기린 팔열각이 세워졌으며 1991년 기미만세 공원건립위원회에서 동창마을 만세운동과 순국한 팔열사의 뜻을 기리기 위해 동창마을에 기미만세공원을 건립했다.
김덕원 의사를 도깨비로 만든 의인내외분도 돌아가셔서 도깨비 집마저 헐려버린 도깨비 터에 1997년 도깨비집이 복원되었다. 그리고 감은비(感恩碑)가 세워져있다.
이 도깨비 터를 복원한 분은 “이제 독립을 외치던 홍천의 애국열사 의사들의 행적이 세월에 묻힐 뻔 했는데 다행하게도 빛을 보게 되어 구천에 떠돌던 영령이 동창만세공원에 편히 잠들게 된 것이 다행이다. 그러나 김덕원 의사를 구원하고자 자신을 희생했던 의인들의 행적은 그 어느 곳에도 새기지 못하고 묻혀 가는 것이 안타까워서, 도깨비 터에 도깨비 집을 복원하고 주위를 저정리하여 감은비(感恩碑)에 비문을 직접 써서 헌서(獻書)를 했다.”
“이런 의인은 살아계신다면 존경해야 하고, 돌아가셨더라도 공을 새기고 본이 되게 하는 것이 국가와 사회가 해야 할 일인데, 그러지 못하고 있으니 나라도 그분들의 의로운 행적에 감사드리는 게 도리인 것 같아서 이 터와 집을 복원하고 그분들이 발휘했던 민족정기를 살려보고자 한다.“ 며 이곳을 배움의 터로 만들어 실종되어가는 애국애족과 불신의 시대에 의(義)와 정(情)을 함양하는 도깨비 터로 만들고 싶다는 동창만세운동기념사업회 김창묵 회장님의 말이었다.
오늘도 이 도깨비 집에사는 의로운 도깨비들이 좋은일을 하기위해 모일 것을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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