볕이 좋고 바람이 차지 않아 다행이었다.
처와 아들까지 나서서 처가에 모여 단체 김장을 하면서
이제 머리칼이 허전한 속머리가 비치는 내 식구를 본다.
연신 간이 짜냐 싱겁냐를 물으면서 입에 넣어주는 속쌈은
또 하나의 별미였다.
나보다 훌쩍 커버린 아들녀석은 날 대신하여 힘을 쓰고
제 외숙모들 신부름을 제법 하면서 남정네의 몫을 해 낸다.
병자리에 있는 장모는 손이 근질거리는지 자꾸만 참견을 하려하고
다리가 부어 약을 챙기는 장인 어른은 그것이 또 못마땅하여 한소릴 거든다.
빨간 고무장갑은 김장속이 어울어지면서 더욱 진한 색을 띄고
흰속살의 무며 배추는 빨간색으로 치장하여 원색을 잃어간다.
한겨울 양식이요 처가 식솔들 겨우살이가 이것으로 끝난다 싶은게 큰일을 치룬것 같았다.
김치 냉장고 덕에 아니 아파트란 고약한 놈 때문에 이젠 더이상 김장 구덩이를 파지 않아도 되지만
그래도 단독주택시절 맏사위는 구뎅이 하나만 파면 끝이었는데
이제 김장판에서도 내 할일이 없어졌다.
기본인 배추김치, 깍뚜기, 알타리총각김치, 동치미, 그리고 허연 백김치에 갓김치까지
맏딸인 안식구는 두 처남댁을 앞에두고 마치 야전사령관처럼 진두지휘를 하며 하나씩
김치들을 해치운다.
하기야 결혼살림이 강산을 두번이나 바꾸게 하였으니 이제 나름대로 전문가요 배테랑인 판국에
그 일이란 놈이 무섭기나 하겠냐만 서도 간혹 핝은 자세가 불편한지 추수리는 모습이 안쓰럽다.
논산에 살고있는 처제가 올려보낸 마늘과 고추가루와 인천 소래포구에서 사온 새우젓과 까나리액젓
그리고 농협 하나로 마트에서 사들인 쪽파며 대파 갓이며 등등 뭐가 그리도 많은지
소금에 절여진 배추를 씻어 엎어놓고 물이 빠진 다음 버무리고 사이사이 챙겨넣고 그러다 코잔등이 가려운지
장갑낀 손등으로 문질러도 콧등에 훈장처럼 달린 양념들...
겨우살이를 준비하는 그 모습이 바로 사랑이었다.
내 입에 들어갈 찬거리...내 새끼 입으로 들어갈 찬거리 내 부모 입으로 들어갈 찬거리.. 모두 소홀할 수 없는 그런
사람들에게 배추며 무를 입에 넣게 하는 것이아니라 보살의 손으로 사랑을 넣으려 차곡차곡 준비하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