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또 하나의 얼굴
월간 문학 3월호를 받자마자 거기에 실린 수필들을 살펴보았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이 수필들은 지금까지 보아오던 수필들 하고는 성격이 틀렸다. 이의 공통점은 재미가 하나도 없고 사건 위주의 수필이 아니라 논문을 읽는 것 같은 정형수필들이었기 때문이다. 사건이 들어있더라도 그 사건에 대한 이야기는 가볍게 지나가고 주제에 대하여 집중적으로 파고들고 있었다. 예를 들어 ‘바둑과 탁구’ 의 경우 “바둑을 잘 두기 위한 열 가지 비결”(김종훤 2007)을 첫째, 둘째 이런 식으로 나열하고 있었다. 특히 ‘여자라는 이름’ 이란 작품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모습, 모성 본능으로, 홀로서기 위하여” (석도익 2007) 등 소제목을 넣어가며 2페이지 반의 분량으로 써 내려갔다.
서양에서의 고전 수필은 정형수필들 이라는 내용을 읽은 기억이 있다. 즉 어떤 주제에 대하여 자기의 의견을 써 내려간 수필 형식이다. 호주의 대학생들이 해 가는 숙제의 제목이 Essay 이다. 이들이 해 가는 숙제가 정형수필이 아닌가 생각한다. 어떤 주제에 대한 자기의 주장을 써 가는 숙제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서 자기의 주장을 쓰되 반드시 근거를 바탕으로 아니면 과학적으로 증명된 사실들을 토대로 자기의 논리를 펴야 한다. 즉 검증도 되지 않은 상상의 이야기를 써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런 글들은 재미가 있을 수 없다. 그런데 이런 종류의 수필들이 ‘월간 문학 3월호’엔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아직까지 한 권 밖에는 책을 읽어보지 않았기 때문에 뭐라 말할 수는 없지만 3월호에 실린 수필들은 나에겐 신선한 충격이었다. 사람들의 얼굴이 모두 다르지만 그들 나름대로 개성이 있듯 거기에 실린 수필들 또한 나름대로의 색깔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를 계기로 나는 수필을 그냥 있는 대로 바라보아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자기의 마음에 들지 않는 수필이라고 하여 잘못된 수필이라는 생각을 갖기 보다는 다른 사람들은 저렇게 생각하고 저렇게 느끼고 있구나 하는 것을 느끼는 것, 그것이 수필을 읽는 마음의 자세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다른 사람의 수필을 가지고 내 잣대로 이것은 이래서 안 되고 저것은 저래서 고쳐야 된다고 하는 것은 어쩌면 내가 좋아하는 방법으로 고치지 않으면 좋은 수필이 아니라는 지극히 편협적인 발상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해 보았다. 그런 것은 나를 닮으라고 강요하는 것 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붕어빵 찍어내듯 수필들이 모두 비슷비슷한 모양에 비슷비슷한 맛이라면 누가 그 수필들을 읽겠는가? 남과 다른 것, 그리고 다른 것을 인정하는 것, 그것이 수필을 대하는 자세가 아닐까? 월간문학 3월호에 실린 수필들을 읽고 재미없었다는 나의 주관적인 생각을 피력했지만 이제 부터는 그런 말 자체도 하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한 수필들이었다. 내가 재미있지 않다고 해서 다른 사람들에게도 재미 없으리란 법이 없기 때문이다.
김종훤 (2007), 바둑과 탁구, 월간문학 3월호, 서울시 종로구 동숭동 1-117
석도익 (2007), 여자라는 이름, 월간문학 3월호, 서울시 종로구 동숭동 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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