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삶」
내가 할 일은 다한 것 같다.
김 고 명
내 나이가 벌써 백수를 바라보고 있다. 구십 구세에 저승에서 데리러 오거든 “때를 보아 스스로 가겠다.”고 하라 하지만 그렇게 까지 이생에 미련이 있어 아등바등 하면서 살려고 한 건 아니다. 김해 김 씨로서 오라버니 두 분과 언니는 회갑도 못 넘기고 가셨나 하면 간신히 회갑 상 받고 모두 단명하신 집안인데 어쩌라고 나는 부주 없이 이리도 장수하는지 모르겠다. 어려서부터 너무 고생을 많이 하였으니 노후에는 즐기며 오래도록 여생을 보내라는 신의 후덕한 은혜를 받아서인지 아니면 자식들이 잘 보살펴주어서 죽을 고비를 여러 번 넘기면서도 살아있다.
내 뱃속에서 나온 자식들 그 자식들 속에서 나온 손자 손녀들 이제는 증손자까지 주렁주렁 달고 그런대로 말년에 호강하며 산다. 화살같이 지나가는 세월이지만 하루가 멀다 하고 변하는 세상이었다. 무명 열 두 폭 긴치마에서 신소재로 엉덩이까지, 올라간 짧은치마까지, 댕기 딴 긴 머리와 쪽진 머리에서, 지지고 뽁은 빨강 파랑머리까지, 나귀에서 택시 기차 비행기로, 집신에서 굽 높은 구두까지, 도토리 귀리 송기 옥수수에서, 중식 양식 일식 흰밥에 고깃국도 남겨서 버리는 세상이다. 날마다 정신없이 어지럽도록 발전해가는 현실에 허둥지둥 적응하며 사느라 바빴다. 날마다 살아온 길을 뒤돌아보면 후회도 많고 보람도 있었지만, 어쨌든 이제 내가해야 할 일은 다 한 것 같다.
고명딸로 태어나서
아버지는 힘이 장사이신 분이었으나 어머니는 중간에 병을 얻어서 반신불수로 누워서 평생을 사신 여인이었다. 건강하실 때 오라버니 두 분과 언니를 키워내셨지만 누워 계시게 된 어머니로서는 막내인 나를 키우기란 기가 막힐 노릇이였으리라. 그러나 계집아이라 누워있는 사람에게는 많은 도움이 될 것이라는 기대에서인지 아버지는 고명딸을 얻었다하여 내 이름을 고명이라 지으셨다 한다. 엎친 데 덮친다고 내가 박복해서인지 아버지가 내가 세 살 되던 해에 돌아가시고 두 오라버니의 손끝에서 보살펴 지고 어머니의 눈길에 자라난 나는 걸음마에서부터 어머니의 손발이 되어 자랐다.
솜씨 말씨 맵시를 모두 갖추셨던 어머니는 비록 움직이지는 못하시지만 누우셔서 바느질이며 할 수 있는 일을 다 하시고 일일이 어린 나에게 가르쳐서 다섯 살부터 밥하고 빨래하고 집안일을 하게 되었다. 내 나이 16세에 누워계시던 어머니마저 세상을 뜨시니 오라버니들이 나를 보호하기란 힘든 일일뿐 아니라 당시 상황으로는 여자아이가 나이 들면 정신대로 끌려가서 기도 망도 모르게 되는 수가 허다했음으로 누이를 잃는 것보다는 얼른 짝을 찾아 주는 게 급한 것이라 나보다 7살이나 많은 23살 떠꺼머리총각에게 시집보냈다. 시집이라고 입던 치마저고리를 보따리에 달랑 싸들고 오니 초가삼간 오막살이집에 송곳하나 찔러놓을 수 있는 땅 한 평 없는 소작농에 홀시아버지를 모시고 살아야 했다.
그러나 나이 많은 남편은 무던했고 건강하게 일 잘하는 분이고 시아버님 또한 나를 딸보다 더 애지중지하게 대해주어 오라버니처럼 일찍 돌아가신 친정아버지처럼 정붙이며 살았다. 당시 일제강점기의 농촌상황은 소작농사 지어봤자 지주에게 7할을 주고 일본 관아에 공출하고 나면 다음해 농사지을 때까지 먹을 양식이 없어 장리를 얻어먹으며 그야말로 초근목피로 연명하며 살았다. 옥수수나 감자로 등으로 영양을 보충하고 나물과 물로 배를 채우는 조반석죽으로 으로 연명하면서도 생의 위험을 느꼈던 본능에서인지 아이들은 넷이나 태어나서 키워야 했다. 열일곱에 첫아이로 딸을 낳고 이어서 큰아들 다음이 딸 다음 아들 순으로 터울 좋게 태어났는데 못 먹이고 못 입히는데도 잘 자라주었다.
잊을 수 없는 전란을 겪으며
여자는 시집이 제2의 고향이다. 내가 열여섯에 시집온 곳은 홍천에서 속초로 가는 44번국도의 첫 번째 높은 고개인 말 고개 밑에 화촌면 원평이라는 마을 냇가에 외딴 오두막집이었다. 이곳은 태백준령을 잇는 가리산 줄기라 남침 전쟁을 준비하던 북한군이 제일 먼저 남한의 전투력을 탐색하기 위해 자주 출몰해서 교전했던 곳이며 중부전선 주요 작전통로로 침략 때도 마지막 후퇴병력도 이곳을 많이 이용하였다. 그러므로 가장 많은 전투가 치열하게 벌어져 피아의 사상자 유골이 산적해 있었으며 적의 탱크를 맨몸으로 막아낸 곳으로 육탄용사위령비가 있는 곳이기도 하다.
당시 김일성은 남침을 준비를 끝내고 사전 탐색 및 정찰을 위하여 수시로 정찰 병력을 내려 보내 소규모 도발을 시도하던 때라 마을 청년들로 구성된 청년단에서 밤이면 마을 어귀에서 나무 몽둥이를 무기로 들고 보초를 서야 했는데 지난번에는 한꺼번에 아홉 명의 마을청년들이 이들에 의하여 무참히 살해되는 참극이 있었다. 이들 중에는 나의 언니의 첫째아들도 목총 들고 순번서다가 죽창에 찔려 희생되었다. 6월이라도 어수선한 분위기와 비가오지 않아 모내기도 못하고 전쟁이야기로 흉흉하기만 했다. 마을 사람들은 전쟁이 터져서 피난을 가야한다며 짐을 꾸려서 떠났지만 남편은 보국대에 징집되어 전선에 투입된지라 일곱 살배기 아들에게 이불보따리를 짊어 지키고 큰딸에게는 먹을 양식을 이키고 막내아들 업고 솥단지는 이고 둘째딸 손잡고 걸려서 피난민 대열에 서니 얼마를 가겠는가. 피난길을 떠나 하루 종일 걸어서 홍천 삼마치 고개 밑까지 왔으나 피난민 대열에 민간복장을 한 적군이 있다는 정보에 의하여 유엔군 폭격기가 무차별 폭격하여 많은 사상자가 났고 지금은 인도교로 쓰고 있는 홍천읍에 있는 화양교도 이때에 중간을 끊었다.
막힌 도로위에 피난민이 밀리는 인산인해의 북새통에 우리가족은 삼마치 고개를 넘지 못하고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죽기는 마찬가지인데 아이들 고생시키지 말고 집에 가서 앉아서 죽어도 죽는다고 다시 집으로 되돌아왔다. 갓 서른을 넘긴 여인이 혼자서 올망졸망한 네 명의 자식을 거느리고 전쟁터 외딴 오두막집에서 살기란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란 각오였다. 동란에는 중공군이 밀려와서 마을에 주둔을 하고 말고개 산에 진지를 구축하고 있었다. 그들은 제일 먼저 군량미확보를 위하여 피난 떠난 민가에서 감추어든 곡식을 찾아내는데 귀신같았다.
우리 집도 피난 떠날 때 쌀독을 마당 한쪽에 감쪽같이 묻었으나 그들의 탐지에 발견되어 사병들이 곡괭이로 파헤치려 할 때 내가 애들에게 시켜 사남매가 울며불며 곡괭이 자루에 매달려 못하게 울었다. 말도 잘 통하지 않는 중공군 장교(군복에 빨간 줄이 있었고 계급장이 요란하게 크고 구두가 긴 부츠같이 멋있어서 장교 같았다.)에게 몸짓손짓으로 저 아이들과 살아갈 양식이니 살려달라고 울며 애원하니 그 장교도 이 상황을 지켜보더니 어쩌지 못하고 이집에는 하지 말도록 지시하여 중단했으나 또 다시 아찔한 사건이 벌어졌다. 종이 태극기를 추녀 끝에 돌돌 말아 꽂아 놓은 것을 그들이 발견한 것이다. 장교는 화를 내며 죽일 것 같았는데 이때 마침 통역인 인민군이 와서 그에게 그 태극기는 국방군들의 것일 거다, 나는 잘 모르며 남편은 의용군에 입대하여 전선에 있고 우리는 남들은 다 간 피난도 가지 않고 남편과 인민군들이 이기고 돌아올 때까지 기다리기 위하여 위험을 무릅쓰고 간신히 목숨 부치고 살아가고 있는데 전쟁은 언제 끝나느냐고 말도 안되는 거짓말로 애원을 하니 그도 그것을 믿는 모양인지 중공군장교에게 통역을 해주어 그때부터 그들은 우리들을 각별한 보호해 주었다.
낮이면 그들은 전투준비를 하는데 우리 집이 그들의 취사장으로 이용되었다. 우선 식량을 산의 진지로 만들어 올리는데 제일 많이 하는 게 김치 주먹밥이다. 우선 쌀과 김치를 넣고 밥을 해서 주먹만 하게 뭉쳐가지고 가마솥을 달군 뒤 거기다 살짝 구워서 자루에 담아가지고 산의 진지로 가지고 간다. 어쩌다 그들 꽁무니를 졸졸 따라다니던 우리 아이들에게 한 덩어리씩 주면 애들은 게 눈 감추듯 하는 것을 보며 뜻 없는 한숨을 토하기도 했다. 아이들이 더 좋아하는 것은 늙은 장교가 주머니를 비집고 꺼내주던 하얀 알사탕은 아이들을 녹여주는 듯했다.
낮에 정찰기가 우리 마을을 한 바퀴 돌아보고 가는 날이면 밤에 어김없이 전투기가 날아와 폭격을 하는데 저녁이 되면 논두렁에 의지해 만든 움막으로 아이들을 데리고 나가서 밤을 보냈다. 전투기 소리가 나면 우리는 움막에서 나와 높은 논두렁 밑에 납작 엎드려서 올려다보면 비행기에서 떨어지는 커다란 불덩어리는 애들 위에 떨어질 것 같아 소스라치면 앞마을 집이 폭격에 맞아 불탔고 중공군들이 어지럽게 뛰어다니는 모습들이 불빛에 보이기도 했다. 이 아수라장 속에서 가끔 우리 움막으로 피신해오는 중공군에게 나가라고 소리치며 손을 내저으면 그들은 별 반항 없이 다른 곳으로 뛰어갔는데 냇가에 즐비하게 서있는 커다란 밤나무마다 올라가 주렁주렁 매달려 있는 것을 폭탄 터지는 순간의 섬광에 볼 수 있었다.
그들은 어린이와 부녀자들을 각별하게 보호를 하였다, 전쟁이 있을 것 같은 날이면 우리더러 어서 피하라고 알려주기도 했으며 그들의 밥하는 것을 도와주려하면 한사코 못하게 한 것이 자기들을 위해하려한다는 의심에서였는지 모르지만 전장에서도 민간인들에게는 조금도 피해를 주지 않는다는 군율이 있었던 모택동 군이 전 중국을 승리로 이끌었던 원인이 되었을 것이다. 비행기 공격으로 어지간히 기선을 제압하고 멀리서 대포사격으로 적진지를 초토화 시키고 난 뒤 유엔 지상군이 올라와 마을 뒷산에 진지를 구축하였고 전세에 밀린 중공군은 앞산 말고개를 퇴로 겸 진지로 마지막 백병전이 벌어진 장소가 바로 우리 집이 있는 말고개 밑 원평 들판이었다.
밤새도록 콩 볶듯 하던 총소리가 그친 아침에 움막에서 나와 보면 쌍방의 시체들이 널부러져 있는 것을 보면 소름이 끼쳤고 전장에 나간 남편 걱정에 눈물 그칠 날이 없었다. 중공군도 후퇴하고 유엔군은 진격 한 뒤 초토화된 마을에는 화화약냄새만 바람타고 돌아다니는 무섭도록 고요한 어느 날, 저녁 중공군 패잔 장교 한 명이 비틀거리며 우리 집으로 들어왔다. 화약과 사람 썩는 냄새로 진동한 전시에 무서운 전염병이 나돌고 있어 아이들 때문에 기겁을 하며 나가라고 소리 쳤으나 그는 막무가내로 안방에 들어와 누워버렸다. 아이들을 윗방으로 보내놓고 쓰러져 누워있는 그 장교를 보니 전염병인 염병에 걸린 것이 분명한 것 같았다. 금방이라도 죽을 것 같은 그를 보며 한참을 망설였으나 그냥 내버려 둘 수가 없었다. 나는 그가 깔고 누워있는 왕골자리를 잡아당기며 계속 나가라고 소리치자 그는 간신히 일어나더니 권총을 꺼내 들이댔다. 그래도 어쩔 수 없었다. 잡아당기던 돗자리에 힘을 놓지 않고 있자니 한참을 쏘아보던 그도 어쩌지 못하고 비틀거리며 방을 나가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이튿날 마을사람들의 말에 의하면 중공군 장교 하나가 옥수수 짚가리 옆에 쓰러져 죽어있더라고 했다. 이런 와중에서도 하늘에 복이었는지 아이들은 상처하나 없이 전염병이 창궐하여 온 집안이 몰살되는 틈에서도 몸 성하게 전쟁을 견디어 냈고 남편도 돌아와서 새로운 날을 맞이했다.
강낭콩 같은 내 여덟 자식들
열일곱에 낳은 딸이 지금은 나와 같이 늙어간다. 남편은 한학을 배운 선비로서 가세가 넉넉한 집안이었다면 한자리 했을 위인이나 일제 강점기 경찰시험에 합격했으나 시아버지가 일본 놈 앞잡이 하려느냐,는 호령 한마디에 농사꾼이 되었다. 과묵하여 아이들에게조차 큰소리 한번 치지 않았던 분이라 늦게까지 낳은 팔남매를 키우면서 내 악다구니만 늘었다.
일제 강점기를 거치고 전쟁을 치른 잿더미 속에 땅 한 뼘 없는 소작인으로서 살아가기란 산에 사는 야생짐승보다 힘든 시대였다. 그 혼란기 기아의 시대에 그래도 명이 붙어서 살아준 아이들이 대견하다. 감자밭에 주렁주렁 매달린 강낭콩 꼬투리 안에 예쁜 콩알 같은 내 새끼들, 한 놈도 어디 부족하거나 더하거나 덜한 곳 없이 태어난 자식들이 고마웠다. 다만 빌기 먹은 아이들에게 먹일 것 제대로 먹이지 못하고 한창 가르쳐야할 아이들에게 집안일 농사일이나 거들게 했으니 부모로서 얼마나 미안하고 두고두고 후회하며 가슴을 쥐어뜯어야 했다. 세상에서 가장 즐거운 일은 자식들 입에 밥 들어가는 일이요 내 논에 물들어 가는 거라 했다. 그래서 그런지 지금도 자식들을 보면 무언가라도 먹이고 싶고 애들이 혹시나 배가 고프지 않나하는 걱정이 제일 먼저라 "밥 먹었니?“ ”밥 먹어라" 가 내 첫말이 되고 말았다. 이런 나에게 “싫어요.” “안 먹어요.” “요즘 배고파 다니는 사람 어디 있어요?” 하고 귀찮다는 듯 말하는 자식들이 오히려 야속하고 이상하다.
가슴에 묻고 가야할 자식들
살아있는 모든 생물은 언젠가는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태어나고 죽는 연속이 이 세상을 이어가는 것이리라. 이제 오래도록 써먹은 몸이라 낡아서 내 맘대로 움직일 수 없게 되어가고 있다. 자식들에게 짐 안 될 때 조용히 가고 싶은데 태어남도 죽음도 자기 몸이라고 내 맘대로 되는 건 아니니 기다리는 수밖에는 없는 일이다. 이제 내가 해야 할 일은 다한 것 같다. 다만 가슴에 묻은 큰아들과 둘째딸이 걸려서 만족하게 눈을 감을 수 없을 것 같다. 불효막심한 녀석들, 어쩌자고 어미 두고 먼저들 갔는가? 지금은 의술이 좋아서 나도 몇 번 죽을 고비를 자식들이 고쳐주어 살아 있거늘, 큰아들은 회갑을 넘기고 얼마 지나지 않아 뇌출혈로 쓰러져 7년을 넘게 고생만하다 끝내 일어나지 못하고 내 곁을 떠났고 둘째딸은 회갑상도 못 받고 암이란 병을 얻어 수술하였으나 회복하지 못하고 서둘러 가버렸으니 생떼 같은 자식들 먼저 앞세운 어미 가슴은 자식들을 묻은 무덤이 되었다.
사람이 행복하게 잘 살았다 함은 내가 할 일 다 하고, 내가 하고 싶은 일하며 자식들 잘 키워서 짝 지워주면 행복한 가정 만들어 오순도순 잘사는 것 보다가 자식들이 지켜보는 자리에서 숨을 거두는 것이다. 사랑하는 내 효자 자식들 너희들이 잘해주어서 이렇게 부주 없이 장수하며 살았다. 어미의 소원이 또 있다면 자식들이 건강하고 단란하게 사는 것을 저승에서도 바라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
'자료실' 카테고리의 다른 글
가정본가 관계호칭 (0) | 2024.08.21 |
---|---|
석도익 이력서 (0) | 2024.08.21 |
위대한 대한민국 (2) | 2024.08.18 |
오림픽 메달 보상금 (0) | 2024.08.11 |
파리는 불타고 있는가? (0) | 2024.08.0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