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 씨와 이 씨의 자식 명판결?
오 씨와 이 씨는 앞뒷집에 사는 데다 동갑이라 어릴 때부터 네 집 내 집이 따로 없이 형제처럼 함께 뒹굴며 자랐다.
둘 다 비슷한 시기에 장가를 들었지만 오 씨 마누라는 가을 무 뽑듯이 아들을 쑥쑥 뽑아내는데 뒷집 이 씨네는 아들이고 딸이고 감감무소식이다. 의원을 찾아 온갖 약을 지어 먹었지만 백약이 무효다.
설이 다가와 두 사람은 대목장을 보러갔다. 오 씨가 아이들 신발도 사고, 아이들이 뚫어놓은 문에 새로 바를 창호지 사는 걸 이 씨는 부럽게 바라봤다.
대목장을 다 본 두 사람은 대폿집에 들러 거하게 뚝배기 잔을 나누고 집으로 돌아왔다.
앞집 오 씨네 아들 셋은 동구 밖까지 나와 아버지 보따리를 나눠들고 집으로 들어가 떠들썩하게 자기 신발을 신어보고 야단인데 뒷집 이 씨네는 적막강산이다.
제수를 부엌에 던진 이 씨는 창호를 손으로 뜯으며
"이놈의 문은 3년이 가도 5년이 가도 구멍 하나 안나니"라고 소리치다 발을 뻗치고 울었다.
이 씨 마누라도 부엌에서 앞치마를 흠씬 적셨다.
설날은 여자들이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날이다.
그믐날 밤에도 한두 시간 눈을 붙일까말까 한데다 설날은 꼭두새벽부터 차례상 차린다, 세배꾼들 상 차린다, 친척들 술상 차린다 정신이 없다.
설날 저녁, 주막에서는 동네 남정네들의 윷판이 벌어졌다.
이 씨는 오 씨를 뒷방으로 끌고 가 호젓이 단둘이서 술상을 마주했다.
이 씨가 오 씨의 손을 두 손으로 덥석 잡고 애원했다.
"내 청을 뿌리치지 말게."
"무슨 일인가? 자네를 위한 일이라면 살인 빼고는 무엇이든 하겠네!"
이 씨가 오 씨의 귀에 대고 소곤거리자 오 씨는 화들짝 놀라 손을 저으며 말했다.
"그건 안 돼, 그건 안 되네!"
이 씨는 울상이 돼 말했다.
"이 사람아! 하루 이틀에 나온 생각이 아닐세. 천지신명과 자네와 나, 이렇게 셋만이 아는 일 내가 불쌍하지도 않은가?"
이 씨는 통사정을 하고 오 씨는 고개를 푹 숙이고 있다가, 연거푸 동동주 석 잔을 들이켰다.
밤은 깊어 삼경인데 피곤에 절어 이 씨 마누라는 안방에서 곯아 떨어졌다.
안방 문을 열고 슬며시 들어와 옷을 벗고 이 씨 마누라를 껴안은 사람은 이 씨가 아니라 오 씨였다.
확 풍기는 술 냄새에 고개를 돌리고 잠에 취해 고쟁이도 안 벗은 채 이 씨 마누라는 비몽사몽간에 일을 평상시처럼 치루고 말았다.
이 씨 마누라가 다시 깊은 잠 속으로 빠진 걸 보고 오 씨는 슬며시 안방에서 빠져나오고 이 씨가 들어갔다.
모심을 무렵 이 씨 마누라는 입덧을 하더니 추수가 끝나자 달덩이 같은 아들을 낳았다.
이 씨 마누라는 감격에 겨워 흐느껴 울었다.
요 녀석이 자라면서 신언서판이 뛰어났다.
오 씨는 틈만 나면 담 너머로 이 씨 아들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오 씨가 어느 날 서당에 들렀더니 훈장은 출타하고 일곱 살 난 이 씨 아들이 훈장을 대신해 학동들에게 소학을 가르치고 있었다.
학동들 사이에 열 살, 열두 살, 열다섯 살인 오 씨 아들 셋도 끼어 있었다.
어느 날 이 씨와 오 씨가 장에 가는데, 길에서 만난 훈장이 이 씨를 보고
"아들이 천재요. 내년엔 초시를 보도록 합시다."
오 씨는 속이 뒤집혔다.
며칠 후 오 씨가 이 씨를 데리고 주막에 가서 벌컥벌컥 술을 마시더니 느닷없이 말했다.
"내 아들, 돌려주게."
단호하게 쏜 한마디가 비수처럼 이 씨의 가슴에 꽂혔다.
몇날 며칠을 두고 둘은 멱살잡이를 하다가 술잔을 놓고 밤새도록 말다툼을 하다가 마침내 사또 앞까지 가는 송사가 됐다.
오 씨는 천륜을 앞세우고 이 씨는 약조를 앞세우며 서로 한 치도 물러서지 않았다.
사또도 선뜻 결정할 수가 없었다.
사또가 이 씨 아들을 데려오게 했다. 자초지종을 다 얘기하고 나서 사또가 물었다.
"네 생각은 어떠냐?"
일곱 살 그 녀석은 하늘을 쳐다보고 눈물을 훔치더니 말했다.
"지난봄에 모심기 할 때 앞집에서 모가 모자라, 우리 집 남는 모를 얻어가 심었습니다. 가을 추수할 때 우리 집에서는 앞집에 대고 우리 모를 심어 추수한 나락을 내 놓으라 하지 않았습니다."
아이의 말이 끝나자마자 사또는 큰소리로 말했다.
"재판 끝! 쾅~"
"오 씨는 듣거라! 앞으로 두 번 다시 그런 헛소리를 할 땐 곤장을 각오하라."
"아버지, 집으로 갑시다.”
아들의 손을 잡고 집으로 가며 이 씨는 눈물이 앞을 가려 몇 번이나 걸음을 멈췄다.
정말 기가 막힌 명 판결이네요. 씨앗만 제공했다고 내 곡식이 아니죠.
(받은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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