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꽃 무궁화방

무궁화 고장 홍천과 한서 남궁억

돌 박사 2021. 12. 18. 20:23

< 제 5회 한서 대상을 받으면서 > 

                                                             소설가  석 도 익
감사합니다.
넓은 내가 흐른다 하여 홍천이라는 지명을 가졌고 홍천에서 발원하여 홍천의 전 지역의 지천을 모아 흐르는 강이라 우리나라에서는 유일하게 지명을 강 이름으로 부르는 것은 홍천 강뿐이기에 큰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데 여기에다 더 뜻 깊은 나라꽃인 무궁화의 고장이 홍천이라 자랑스럽습니다.
홍천이 무궁화의 고장으로 자리매김한 것은 일제강점기에 언론인이고 교육자이신 한서남궁억 선생님이 독립을 위하여 민족정신을 고취하고자 서면 보리울에서 무궁화보급운동을 펼치셨음으로 무궁화의 역사의 발원지가 홍천이기 때문입니다.

나라사랑과 민족정신을 일깨우고자 독립운동을 하신 한서남궁억 선생님의 깊은 국가이념을 선양하기 위하여 한서 대상을 제정하고, 이끌어오고 있는 홍천군과 강원일보에 무궁화 고장에 한사람으로서 고마움을 표하며, 강원일보가 국가와 사회의 그늘진 곳에 어둠을 밝히는 등불이 되는 정론지로 원대하게 발전하기를 기원합니다.
이 뜻 깊은 상을 받으면서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했을 뿐인데 분에 넘친다는 생각에 어깨가 무겁습니다. 만 더 열심히 일하라는 격려로 받아들이겠습니다.
사람으로 태어나서 “내가 해야 할일들은 다하고 나서, 내가 하고 싶은 일도 할 수 있다”면 나는 행복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지금 내가하고 싶은 일을 하고 있습니다.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감사합니다.

 


2021년 홍천학(洪川學) 심포지엄 (원고)
소설가 석 도 익
한서 남궁억과 무궁화고장 홍천

 

< 발표자의 변 >
사람으로 태어나서 “내가 해야 할일들은 다하고 나서, 내가 하고 싶은 일도 할 수 있다”면 나는 행복한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저는 지금 내가하고 싶은 일을 하고 있습니다.
먼저 홍천무궁화농원을 만들고 무궁화나무를 키워 전국에 널리 보내기도 합니다. 학교나 단체에 강연도 다니고, 무궁화와 나라사랑에 대한 글도 지상에 많이 발표합니다.
한편 홍천에서 유일하게 한서선생님의 뜻을 이어가고자 설립한 한서장학회를 맡아서 40여년을 이끌어 오면서 큰 보람을 얻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무궁화 꽃이 예쁘다”고 하는 사람이 아름답게 보입니다.
“무궁화나무를 심겠다.” 는 사람이 멋지게 보였습니다.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는 잦은 왜적의 침략을 막아내기 위한 나라지킴이 놀이입니다.
“무궁화나무를 심는 것은 나라사랑하는 마음을 심는 것입니다.”
내 고장 홍천을 사랑하고 무궁화를 좋아하는 마음으로 한서남궁억과 무궁화의 고장 홍천을 둘러보는 소고(小考)를 올립니다.

 

 들머리에
홍천에서 태어나고 홍천에서 자랐습니다. 6,25전란은 어린나이에 악몽 같은 기억으로 남겨있고, 가난한 보릿고개를 허기지게 넘으며 청소년기에 재건국민운동에 몸담아 상급학교 진학하지 못한 청소년들에게 향토재건중학교를 설립하고 야간으로 가르쳤으며, 낮에는 농촌계몽운동을 하다가 군에 입대하여 복무를 마치고 와보니 무궁화 심기운동이 새마을 운동과 들불같이 번져갔고 한서문화제가 열리기 시작했으며 학교 교정마다 한서선생의 동상이 건립되었습니다. 이 모두를 들머리에서 둘러보기로 합니다.

 

 하나. 한서 남궁억과 홍천
한서 남궁억 선생은1863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선생은 한말 격랑 기에 외교관으로 또는 통역관으로 나라 일을 하였는가 하면 궁내부 별군직, 칠곡부사 내부토목국장등 행정직으로도 봉직하였으며 영문법과 국사를 가르치는 교육자로 또는 독립협회에 가담 사회운동을 하여 투옥되기도 하였고, 황성신문사를 경영하는 언론인으로 국가와 민족을 위하여 열정적 인생을 사신분이다.
다만 이등방문 장례식에 장례위원으로 이름이 등재된바 있어서 후일에 친일파라는 오해가 있기도 했다.
그러나 을사보호조약이 강제 체결되고 1910년에는 마침내 한일합방이 되자. 관직을 버리고 1918년 강원도 홍천군 서면 모곡리(보리울)에 내려와 모곡감리교회를 세우고 전도사로 목회하면서 교회 내에 4년제 사립학교인 모곡보통학교를 설립하였다. 선생은 잃어가는 나라의 민족정신을 일깨우기 위한 정신적 운동으로 무궁화나무심기 운동을 대대적으로 펼치고 무궁화 묘목을 보급하기 시작하였으며, 무궁화로 노랫말을 만든“무궁화 동산가” 와 찬송가에 올린 “삼천리반도 금수강산“ 이라는 노래로 민족혼을 일깨워 나갔다. 이를 보고만 있을 수 없었던 일제는 무궁화묘목을 불태우고 이들을 구속하였으며 모곡학교는 공립학교로 강제 편입시켜 버렸다.
1935년 선생은 복역 중 병으로 석방되었으나 옥중에서의 여독으로 4년 뒤인 1939년에 순국하였다.
한서 남궁억 선생은 “나는 살아서 독립을 보지 못하더라도 너희들은 독립을 볼 것” 이라고 제자들에게 항상 독립심을 일깨워 주었고 “내가 죽거든 나무 밑에 묻어 거름이라도 되게 하라" 고 나라사랑의 길을 몸소 보이고자 했다.
선생은 강원도와는 인연이 있어 양양군수로 재직 시 현산학교를 설립한바 있다. 어디를 가나 교육을 우선하였으니 나라를 일으키는 길은 인재육성이 첫째라는 것을 일깨운 선각자다.
또한 나라 잃은 망국의 민족에게 우리나라의 상징인 무궁화를 보급하고 선양함으로서 민족정신운동을 최초로 시도한 민족지도자다.
일제의 한민족정신 말살정책으로 무궁화를 통한 국민정신운동을 송두리째 뽑아버리고 뭉개 버리기 위하여 전국의 무궁화를 멸종시키려 하였으며 무궁화는 사람에게 이롭지 못하며 좋은 나무나 꽃이 아니라는 편견을 주입시킨 정책이 오래도록 우리국민 정신 속에 남아있어 한서남궁억 선생의 큰 뜻에 부끄러울 뿐이다.
선생이 홍천에 내려와 무궁화의 씨앗을 뿌리셨기에 그 무궁화는 홍천에 뿌리를 내리고 꽃이 피기 까지는 많은 시간이 흘렀지만 결코 헛되지 않고 꽃이 피기 시작했으며 홍천이 무궁화고장으로 자리매김하고 새로운 무궁화 중심도시로 우뚝 서게 되었다.

 

 둘, 한서문화제와 무궁화 축제
사람이 만물에 영장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문화를 생성하고 그 문화를 영위하며 발전시켜왔기 때문이다. 식물이나 동물세계에는 문화가 없다. 오직 인간만이 문화를 창조하고 발전시킬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사람은 어떤 특정한 문화권내에 태어나 그 문화의 영향을 받으며 성장하고, 동시에 타문화와의 접촉을 통해 문화의 변동을 경험하기도 하고 신의 창조적 능력에 의해 우리의 고유문화를 변경시킬 수도 있다.
요컨대, 인간의 삶은 문화에 의해 특징 지워진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문화는 그 지역의 정체성을 지니고 있어 자연발생적으로 지방의 문화에 예술을 접목해서 문화제나 축제의 형식으로 지역문화를 알리고 발전시켜서 경제적 효과로 얻어내기도 한다.
특히 지방화 시대에 각 지방에서는 경쟁이라도 하듯이 10월은 문화의 달이라 문화제나 축제가 전국 곳곳에서 풍성하게 열린다.
강원도 시군만 보더라도, 춘천 소양제 / 원주 한지문화제 / 강릉에 단오제 / 삼척 죽서문화제 / 속초 설악문화제 / 양양 현산문화제 평창 효석문화제 / 영월 단종문화제 / 정선 아리랑제 / 철원 태봉제 / 화천 비목문화제 / 양구 양록제 / 고성 수성문화제 등이 열린다.

지역특성과 정체성에서 생성된 문화를 발굴하고 보존하기 위하여, 스스로 참여하는 주민들은 화합과 소통을 이루니 마음에는 내 고장 사랑하는 마음이 생기게 되고, 그 결실은 당연하게 지역발전을 이루고 있다.
우리 홍천군에서도 일제강점기 홍천군 서면 보리울에 내려와서 무궁화를 보급시키고 노래를 만들어 민족정신을 일깨운 한서 남궁 억 선생의 애국전신을 선양하기 위하여 그의 호를 딴 한서문화제를 1977년 (10월 7일 ~ 7일)개최하여 2008년(10.10~10.12) 까지 30회를 이어 해마다 보완하고 발전시켜 왔으며 “무궁화의 고장”이라는 지역 별호(別號)까지 가지게 되었다.
한서문화제위원회라는 순수민간단체에서 주최하고 홍천군에서 후원하는 한서문화제는 중간에 축제위원회라는 기구를 만들어 모든 축제를 총괄하다가 근자에는 홍천문화재단을 설립하여 재단에서 직접 개최했다.
태동부터 홍천군민이 모두 참여하는 무궁화의 얼인 나라사랑의 민족정기 발현을 목적으로 하는 한서문화제는 고유문화 예술 체육이 어우러진 군민 화합의 한마당이었다.
한때는 남궁 억 선생에 대한 친일 논란으로 한서문화제에 대한 재고의 여론도 있었고, 마침 2008년에 홍천군이 산림청에서 공모한 무궁화 메카도시로 선정됨에 따라서 30년이라는 강산이 세 번 바뀌는 세월을 이어온 한서문화제를 폐지하고 2009(8.27~9.2)제1회 나라꽃 무궁화 축제로 개최하였다.
나라꽃 무궁화 축제는 주최나 주관 개최 내용 등이 한서문화제와 다름이 하나도 없이 그저 이름만 변경한 축제인 나라꽃 무궁화 축제를 10회(2017. 10.10~10.14) 까지 이어왔다.
축제가 지향하는 목적이 무궁화 얼인 만큼 굳이 역사성이 있는 회 수를 단절시키지 말고 이어갈 것과 무궁화 꽃이 없는 시기에 주인공이 없는 “무궁화 축제”라고 하는 것 보다는 무궁화 의 얼을 승화시키고자 하는 것이니 “무궁화문화제”로 수정할 것을 군민의 의견으로 수차 피력하여 결국 2018(10.6~10.9) 제 40회 나라꽃 무궁화 축제로 회수를 이어서 개최되었다..
한편 매년 산림청사업으로 공모하는 나라꽃 무궁화축제에 홍천군이 매년 공모에 선정되어 수 년 동안을 같은 이름으로 나라꽃 무궁화 축제를 매년 두 번을 개최하여 왔다.
산림청공모 선정 나라꽃 축제는 꽃이 피는 시기에 개최하게 되어있으니 먼저 개최하게 되어 자연 군민들의 관심도 적을 수밖에 없었으며, 그 뒤로 개최하는 축제에는 민관군이 함께 참여하는 행사로 개최해 왔으나 이를 잘 알지 못하는 군민들은 헷갈리는 행사였다.
어쨌거나 한서문화제로 30년 나라꽃 무궁화축제로 10년 과 회수복원 제 40회(2019.10.5.~10.9) 나라꽃 무궁화 축제를 끝으로 홍천의 문화제는 막을 내리지 않았나 싶다.
앞으로 홍천에서 치러지는 무궁화 축제는 산림청 공모로 개최하는 무궁화 축제만 개최하게 되며 해마다 공모에 선정되지 못하면 이마제도 개최할 수 없게 되니 무궁화의 고장임을 자처했던 홍천은 그 맥을 이어가지 못하게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또한 홍천의 축제는 홍천 한우산나물 축제 / 홍천 찰옥수수 축제 / 홍천강 별빛 음악맥주축제 / 홍천인삼 명품축제 / 홍천강 꽁꽁축제 로서, 먹고 마시고 노는 축제밖에는 없다.
문화예술은 최고의 산업기반이다. 그러나 천박한 경제논리로 잘못 접근하면 오히려 경제적 적자를 초래한다. 전국에서 1년에 벌어지는 축제는 1,000개가 넘는다.
강릉단오제 평창 효석문화제 정선아리랑제 등이 좋은 평가 받는 이유는 그 중심에 사람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역사가 함께 있기 때문이다.
축제나 문화제의 개최에는 경제논리도 적용되어야 마땅하다. 그러므로 당장 눈앞에 보이는 이익을 취하려고 좌판을 펼쳐놓고 장사하는 축제로 전락할 수 있다.
축제나 문화제는 어설픈 경제논리로 돈을 세듯 하는 잣대로 적용해서는 안 된다. 군에서는 축제나 문화제에 대한 예산은 낭비가 아니고 투자여야 하고 주민들이 경제활동을 통해서 수익을 얻어내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값진 부가가치는 지역주민들이 참여하여 화합하고 소통하여 얻어지는 풍요로운 정신문화의 경제적 가치는 돈으로 환가 할 수 없을 만치의 가치가 있는 것이며, 자연 발생되는 애향정신은 지방발전의 원동력이 되며, 우리의 자랑스러운 문화를 널리 알리고, 삶의 질을 높이는 일이다.
국가나 지방자치에서 주민이나 국민에게 신뢰를 받기위해서는 정책의 지속성이다. 이는 사회적 약속이다. 민관군이 함께할 수 있는 핵은 우리 지역의 정체성을 살리는 것이며 그 주체가 되는 중장기 발전계획을 만들어가야 할 것이다.
홍천의 큰 행사나 사업은 많은 군민의 의견을 참고하여 시행하고 있으나, 뒤 늦게 사실을 알고 뒷말이나 하는 글을 쓰는 필자도 군민의 한사람으로서 부끄러운 일이다.
가뜩이나 존경이나 역사인식이 희박해져가는 현실에서, 세월을 지나온 지역정체성에서 생성된 문화를 단절시키지 말아야 한다.

 셋. 무궁화와 홍천
지나치게 화려하지 아니하여 뽐내지 아니하고 꾸민 듯 조잡하지 아니하여 자만하지 아니하고 가시나 독이 없어 남을 해하지 아니하며 넉넉함으로 평화스럽고 질긴 생명력으로 인내하며 강한 번식력으로 생존해온 무궁화! 피고 또 피어 삼천리를 화려강산으로 만든 무궁화. 마음 가는 곳에 그가 있음이니 하루아침에 나라꽃이 되어 진 것이 아닌 단군조선시대부터 반만년의 세월 속에 민족의 가슴에 씨앗이 떨어져 심어지고 싹이 자라나 꽃이 피고 또 피어나 누가 뭐라고 한 것이 아닌데 자연스럽게 당연한 자리를 차지하고 나라꽃으로 인지되어진 무궁화다.
구한말 정치가이며 언론인이고 교육자였던 한서 남궁억 선생이 1918년 홍천 서면의 보리울에 내려와 교회와 학교를 세우고 독립운동의 일환으로 민족정신을 고취하고자 무궁화 보급운동을 전개하였다.
역사적 인물인 선생을 추모하는 기념사업을 추진하면서 자연스럽게 무궁화선양사상이 홍천에 뿌리내려지게 되었고 지방문화행사로 30여년을 해마다 한서문화제를 개최함으로서 최근에는 무궁화 메카도시로 선정되어 나라꽃 무궁화 축제를 개최하기까지 이르렀다.
또한 범 군민운동으로 전국에 무궁화묘목 보급을 하였으며 가로수 공원 등에 무궁화나무를 식재하였는가 하면 홍천읍 연봉리에 무궁화 공원을 조성하였고 북방면 하화계리 송학정에 무궁화 테마공원을 조성하고 이어서 전국에서 처음으로 무궁화 수목원을 조성했다.
또한 무궁화 중심도시 무궁화의 고장답게 북방면 능평리 산 57번지 31만5935㎡규모로 조성된 홍천무궁화수목원은 지난 2008년 산림청으로부터 무궁화 중심도시로 선정된 이후 2011년부터 7년여에 걸쳐 80억원을 들여 16개 주제원,60여개 휴식시설, 한서 남궁억 광장, 무궁화 조형물, 유리온실 2동, 관리사무소 1동 등을 설치했다.
또한 소망의집의 등불을 밝혀 꿈을 이루게 하는 소망의집을 만들어 내방객들에게 별 같은 꿈을 그리게 하고 있고 숲속도서관을 건립하여 휴식과 마음에 양식을 담아가는 공간을 마련해 놓았다.
수목원 내에는 83종의 다양한 무궁화를 식재했고, 이밖에도 1300여종 13만800여점의 다양한 수목과 꽃 등을 심겨졌다.
내방객의 편의를 제공하기 위해 각종 쉼터 등 총 60여개의 휴식 시설을 설치했으며 숲속 산책로는 자연환경을 최대한 보존해 친환경적인 아름다움을 만끽할 수 있도록 했다.
또한 무궁화를 소재로 한 포토죤 체험, 퍼즐놀이 등 다양한 프로그램도 마련했으며 중앙광장에 위치한 무궁화 조형물은 무궁화의 위상과 아름다움을 보여주고 있어 홍천의 새로운 랜드 마크로 자리 잡을 것으로 기대된다.
우리나라의 꽃이라는 이유 때문에 식물인 무궁화가 세계역사상에도 식물도감에도 없는 수난을 당하기까지 하였으니, 일제의 무궁화 말살에 관한 혹독한 탄압 속에서도 굳은 의지로 무궁화를 재인식시키는 일을 시작한 애국지사들이 있었다.
이 모든 역사를 하나로 결집하고 홍천군민의 충절을 새겨 홍천무궁화 수목원을 조성하게 된 것이다.
무궁화수목원은 만남의 장, 체험의 장, 관찰의 장, 화합의 장 등으로 이뤄지며, 무궁화를 중심으로 수목유전자원을 수집ㆍ증식ㆍ보존ㆍ관리 및 전시하고 나아가 그 자원화를 위한 연구기반시설을 확보하는 등 스토리 테마 형 수목원으로 조성했다.
무궁화 수목원은 굽이쳐 흐르는 홍천 강과 수려한 산세가 어우러진 아름다운 자연경관을 자랑하고 있다.
홍천은 오지가 많은 고장이기도 했지만 대한민국의 상징인 무궁화로 '무궁화의 고장'으로 각광받고 있으며, 나아가서 나라사랑에 샘물이 솟아나는 발원지가 될 수 있도록 군민모두가 관심과 애정으로 마음을 모아나가야 하겠다.
또한 홍천무궁화 수목원을 한국을 대표하는 곳으로 발전시키고 단순한 볼거리를 제공하는 것에 만족하지 말고 민족의 얼을 무궁화 이야기에 담아 해설함으로서 찾아오는 모든 분들이 가슴에 담아가도록 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 넷. 한서장학회 소고
예로부터 우리 민족의 사랑을 받아온 무궁화(無窮花)는 우리나라를 상징하는 꽃으로 ‘영원히 피고 또 피어서 지지 않는 꽃’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이처럼 오랜 세월 동안 우리 민족과 함께해 온 무궁화는 조선 말 개화기를 거치면서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이란 노랫말이 애국가에 삽입된 이후 더욱 국민들의 사랑을 받아왔다. 이 같은 무궁화에 대한 우리 민족의 한결같은 사랑은 일제 강점기에도 계속되었고, 광복 후에 무궁화를 자연스럽게 나라꽃[國花]으로 자리 잡게 하였다.
국화로 제정되지는 않았지만 민족의 가슴에 피어나는 무궁화다. 우리 민족과 함께 영광과 수난을 같이해 온 무궁화는 홍천이 고향이다.
“무궁화의 고장 홍천”이 되기까지에는 한서 남궁억 선생님의 나라사랑 운동이 자양분이 되었다.
한말에 항일투사이며 교육 언론인으로서 조국과 민족을 위하여 평생을 바친 한서 남궁억 선생은 일제강점침탈에 맞서 선친의 고향인 홍천서면 보리울에 낙향하여 대한독립을 위한 민족정신고취운동의 일환으로 학교설립과 무궁화 보급운동을 하면서 뿌리를 내려졌다.
또한 홍천군에서는 한서 남궁 억 선생의 사상과 발자취를 기리고 홍천출신 선열의 충절과 숭고한 애국충정을 후세에 널리 선양하기 위해 지난 1977년부터 한서문화제를 개최해오다가 현재는 나라꽃 무궁화 축제로 이어가고 있다.
한편 한서 남궁 억 선생 기념 사업회 제2기 정기총회에서(1978.4.28.) 한서장학 회 설립하기에 이르렀다

한서장학회 설립취지
한말의 항일투사이며, 교육언론인으로서 조국과 민족을 위하여 평생을 바친 한서 남궁 억 선생의 유덕을 받들어 본군 출신의 가난한 수재를 널리 찾아 장학금을 지급하여 홍천군 발전에 기수적 역군을 확보함은 물론 조국 근대화의 지상과업을 선봉적으로 촉진해 나갈 중추적 인물을 배출하기 위하여 한서장학회 를 설립 운영하기로 함.

한서장학회 정관 (총 6장 30조 부칙)제정 하였으며 홍천군수를 당연직 이사장으로 하였으며 전 군민의 성금으로 기금을 마련하기로 하고 한서기념사업회가 모금운동을 하였으며, 이후 1980. 4. 25. 정관 개정 (행정기관 주관에서 민간기구로 개정 운영체제 보완 및 임원진의 호선, 임원 임기 2년)하였고 1981. 7. 6 개정 정관에 의거 제 2 대(민간기구 구성) 임원 선출을 하여 제 2 대 고 일 혁 이사장이 선임되었고 1981. 6. 25. 홍천군으로 부터 업무 인수인계 인수 장학기금 20,396,710원 이었다.
당시 필자 석도익은 홍천상호신용금고에 근무하면서 한서장학회 업무를 이어받아 지금까지 관리하여 왔으며 덕망 높으신 분들이 두루 이사장을 맡아 홍천인재육성에 이바지 해왔다.

역대 이사장
1978. 4. 28. 제1대 이사장 홍천군수
1981. 6. 25 (민간이양) 제2대 이사장 고 일 혁
1983. 7.1 제 3 ~5 대 이사장 허 만 목
1990. 7. 1. 제 6 ~7 대 이사장 신 두 식
1995. 2. 17. 제 8~10 대 이사장 엄 경 식
2002. 2. 27 제 11대 이사장 최 재 선
2004. 2. 25 제 12~14 대 이사장 : 정 홍 기 (임기 2년1회 4년)
2013. 2. 27 제 15 ~ 현재 이사장 신 태 호

장학기금은 회비로 유지하였으며 예나 지금이나 재정 빈약으로 어려움이 많았으나, 다행히 예금금리가 좋았던 시절이었으니 정기예금과 그 이자로 정기적금을 이용하여 해마다 적립되었으며 장학기금으로는 회의식대나 사무비에도 한 푼 쓰지 않고 모아서 기금을 증가시켜 오면서도, 매년 장학생을 선발하여 폭넓게 수혜하여 오다가 1993년부터는 양보다 질을 택하여 우수한 학생을 선발 4학년 졸업 시까지 학비 전액을 지급하는 방법으로 하여 전국에서도 보기 드문 인재육성을 지속해왔다.
그리하여 장기장학생 중에는 포항공대를 나와 서독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현재 미국주립대학에 교수로 있기도 하고, 대기업 연구원 또는 국가공무원 등으로 나라에 기둥으로 일하고 있음이 한서장학회에 보람이다.
현재까지 장학금 지급총액 131명 170,994,700원 중 장기장학생 12명을 4년 전액 지급하여 왔다. 그러나 은행 금리가 하락하여 2019 학년도부터는 장학생을 선발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어서 특단에 결정을 내려 건물은 매입 부동산 임대수입으로 장학 사업을 다각적으로 전개하여 홍천인재를 육성하고자 하였다.
한서장학회는 홍천군민의 성금으로 지금까지 관리해 왔음에 자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또한 홍천군민 모두가 회원이 되어 함께했으면 하는 바람이 이루어지길 기대하고, 지금까지 어렵게 이끌어온 한서장학회의 작은 역사를 군민께 보고 드리며, 한서 남궁억 선생의 뜻을 이어가는 한서장학회가 홍천지역 인재육성에 산실로서의 큰 역할을 담당할 것입니다.

  다섯. 홍천무궁화 농원을 가꾸면서
무궁화 무궁화 우리나라 꽃 / 삼천리강산에 우리나라 꽃피었네 피었네 우리나라 꽃 / 삼천리강산에 우리나라 꽃 동요로 널리 불려왔던 무궁화 노래다. 무궁화가 법으로는 국화로 제정되어있지는 않지만 우리나라국민 모두의 가슴속에서 반만년 피고 또 피어나서 나라꽃으로 인식되어져 있다. 일제강점기 우리 민족성을 닮은 무궁화로 결집하여 국권을 회복하려는 항일운동이 두려운 일본은 민족정신과 문화를 말살하려는 식민정책에 의하여 무궁화나무를 멸종시키려함과 동시에 무궁화에 대한 민족의식을 없애기 위해 .무궁화는 하루만 피고 지는 꽃이며 벌레가 많아 집안에 심으면 이롭지 못하고 액운이 꼬인다. 등 좋지 않은 누명을 씌워 교육홍보하기에 혈안이 되었었다. 나라가 망하면 나라 없는 국민들은 개밥에 도토리가 되는 것은 당연하겠지만, 애꿎은 무궁화나무까지도 핍박을 받았다. 일본은 연합군에 패망하고 우리는 대한민국으로 세계 속에 우뚝 선지가 언제인데 아직까지 말도 안 되는 무궁화에 씌워진 누명을 벗겨주지는 못할망정 잘못된 인식을 그대로 가지고 있다는 게 부끄럽기 한없다. 필자는 무궁화에 매료되어 본인의 밭1,800여 평에 무궁화 묘목을 심고 30여년을 키우고 연구하여 육묘하여 전국에 보급하면서, 우리나라 사람들이 무궁화에 대한 인식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직접체험하고 이를 널리 널리 알리는 일에 힘을 쓰고 있으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지금까지도 무궁화나무에 대한 안 좋은 인식을 가지고 있어서 집안에 아름다운 꽃이 100여일을 피어나는 나라꽃 무궁화나무를 심은 집이 별로 없다는 것을 알았다. 해마다 봄이나 가을에는 무궁화에 대하여 구입과 관리 식재 상담을 요청하는 전화나 메일을 많이 받아왔는데, 그중에서 가장 많이 하는 질문이 무궁화는 벌레가 많이 꼬이고 하루만 피고 지는 꽃이라서 집안에 심으면 좋지 않다 는 데요? 한다. 나는 그때마다 잘못알고 계시는 것이니 한번 심고 가꾸어 보라로 권한다. 직접 심고 키워보아야 무궁화에 진실을 알 수 있을 것이고 가까이 하다보면 왜 나라꽃이 되었는지도 깨달을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무궁화를 가슴에 심었으면서도 직접 집안에 심어서 가꾸어 보지도 않은 사람들이 무궁화에 대한 폄하를 많이 하는 까닭에 나라꽃인 무궁화가 집안정원에도 없음으로 꽃 중에 꽃 무궁화와 친근해질 수 없었다. 지금까지 수 만 그루의 무궁화나무를 키워서 전국에 보냈다. 나는 공짜로 주지는 않는다. 무궁화는 나라꽃이기 때문이며, 무상으로 가져가면 나라꽃의 가치가 없어지고 관심과 애정이 퇴색될 것이기 때문이다. 나라꽃무궁화에 대한 존귀함을 알아야하고, 그 가치만큼 사랑과 관심을 받게 될 것이라는 게 나의 지론이다. 그래도 봄이면 전국에서 전화나 메일로 무궁화에 대한 문의전화가 쇄도해서 상담을 하고나면 마음이 흐뭇했는데 근래 몇 년 동안은 뜸해지더니 올 해는 봄이 다 지나가는데도 전화마저 별로 없고, 무궁화나무를 심겠다는 사람도 없다. 우리나라 수난기에는 민족정신에 버팀목이었던 무궁화였는데, 이러한 현실이 나라꽃이 국민에게 받는 대우다.
전 세계가 코로나로 전쟁 중인데 그까짓 무궁화가 무슨 대수겠냐? 할지도 모르지마는 나라가 있고 국민이 있으니 민족정기의 구심점이 되는 국가관이 투철해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 여섯, 무궁화 그 아름다움의 씨앗
가뭄과 뙤약볕이 공존하는 6월의 끝자락 잿빛하늘아래, 이른 봄부터 바쁘게 설쳐대며 꽃을 피우기 분주했던 초목들은 온 힘을 다했던 꽃피우기를 더워지기 전에 씨앗생산을 마무리 하고, 자신의 성장에만 몰두하려 한다.
무궁화는 꽃나무다. 해당화 무화과 등과같이 꽃 이름으로 나무를 대신한다. 그러므로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라고 해도 틀리다고 할 수 없다. 나무를 말할 때는 무궁화나무라고 해야 된다.
봄에 꽃을 피우지 않은 초목들은 힘겨운 여름을 피해 시원한 바람 불 때 부지런히 꽃 피우리라며 뒤로 미루고 다 같이 키 크기로 경쟁하는 “열매가 열린다하여 여름이라고 하는 더위로 헉헉할 때라도 급하지 않은 듯 뒤늦게 싹을 틔워낸 무궁화나무는 자라 오르는 여린 새순에 꽃 봉을 연신 달아 올린다.
모두가 힘들어 꽃피우기를 멈추어 버린 무더운 한여름 오직 무궁화만이 일편단심으로 강인함을 과시하며 그 아름다운 열정으로 100여일 긴 여름에 씨앗을 생산하기 위한 꽃 중에 꽃 무궁화를 피고 또 피운다.
태어난 한곳에서 일생을 살아야 하는 식물에게 소원이 있다면 꿈에서라도 한번 움직였으면 하는 것이리라. 땅에 뿌리를 내리고 살아가는 식물은 자신의 소원을 이룰 수 없음으로 그 원을 자신의 씨앗에게 풀어주려고 씨앗을 진화시켜왔을 것이다.
바람에 잘 날려 멀리멀리 날아 좋은 곳에가 잘 살라 하고 날개나 털을 달아주고 물에 잘 떠내려가게 만든 씨앗이며, 잘 굴러가게 한 둥근 씨앗이며, 새들이나 짐승들이 잘 먹고 가서 배설해주도록 맛있는 씨앗이며 가지가지의 방법과 묘기와 자연을 이용하여, 자신이 움직일 수 없음을 대신하여 씨앗에게 멀리 떠나가서 잘살게 하려고 한다.
피고 또 피어나는 무궁화 역시 그 씨앗은 꽃잎이 다시 오므려져 꽃 봉우리로 낙화하고 난 씨방은 다시 씨앗봉우리로 커지며 녹색의 씨앗봉우리 안에서 부지런히 씨앗은 영글어 간다.
푸르던 잎이 소임을 다하고 하나둘 낙엽지고 성성한 가지 끝에는 갈색씨앗봉우리 만이 소담하게 매달려 씨앗의 분가를 시작한다.
늦가을에 메마른 바람에 씨앗봉우리가 서서히 말라 5쪽으로 갈라지며 안에는 한쪽에 두 개의 씨방에는 5~8개 씨앗이 나란히 누워 밖에 세상을 구경하고 있다. 씨앗은 타원형으로 모서리 부분에 짧은 털이 돋아있다. 아마도 조금이라도 멀리 날아가서 살아보라는 모성의 염원으로 붙여진 날개일 것이다.
메마른 날씨에 바람이 불면 씨방에 나란히 누어있던 씨앗은 하나둘 날려 그리 멀리 못가고 떨어지고 비 내리는 날은 씨앗봉우리는 다시 불어서 오므리려 자동으로 씨앗은 안에 갗이게 됨으로 다시 맑은 날을 기다리기를 오래함으로 무궁화 씨앗봉우리는 다음해 새 꽃이 필 때까지 나무에 오래 매달려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은근과 끈기로 대표되는 무궁화는 씨앗의 발아율이 숲에서는 약하며 다행하게 풀이 없는 땅이라서 씨앗이 발아되어 자란다고 하더라도 생명역리 강한 잡초나 나무들과는 자라는 경쟁에서 뒤짐으로 스스로 자생할 수 있는 능력이 모자라므로 그 많은 꽃을 피워 엄청난 씨앗을 날렸음에도 번식력이 약해서 사람의 손길이 필요한 사랑받아야 하고 사랑해야할 무궁화나무라고 할 수 있다.

 

 무궁화 국화 법제정 청원 서명운동
“‘무궁화=국화’ 법률제정을”
바르게살기운동 홍천군협의회 1만人 서명운동 전개

[홍천]오늘 한 가족 등반대회


2014-9-15 (월) 19면 - 이무헌 기자

【홍천】바르게살기운동 홍천군협의회(회장:석도익)는 15일 홍천군 서석면 검산리 마리소리골 악기박물관에서 `바른 마음 한 가족 등반대회'를 개최한다. 군·읍·면 위원회 지도자 200여명이 참여하는 이날 행사는 나라꽃 무궁화 법 제정 청원을 위한 서명운동 발대식을 겸해 열린다. 이날 대회에서는 바르게살기운동 군협의회 지도자들이 함께 등반하며 환경정화활동도 펼친다.석도익 회장은 “나라꽃 무궁화를 더욱 사랑하고 바른 사회를 만들기 위한 다짐을 견고히 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무헌기자
나라를 빼앗긴 민족이 암울하게 살아가던 시대 민족혼마저 말살하려는 일본에 맞서 민족의 얼이 담긴 무궁화 묘목을 전국에 보급하며 민족혼을 일깨우시던 한서 남궁억 선생이 있었기에 무궁화는 우리나라 방방곳곳에서 아름답게 피어난다. 한서 남궁억 선생이 몸 바쳐 애국의 씨앗으로 심은 무궁화는 홍천을 무궁화의 고장으로 만들어 놓은 것과 같이. 무궁화는 나라꽃이라고 온 국민은 알고 있어 이미 성문화 되지 않은 관습법으로 인지할 뿐 법으로는 국화를 무궁화로 제정하지 못하고 있다.
국회의원의 금배지를 얻으려고 싸워가며 어렵게 달은 배지가 무궁화 문양인지는 알고나 있는지, 아직 호적(법)에도 올리지 않고 내버려 둔 채 이권과 밥그릇 권력 다툼만 하느라 혈안이 되어있다.

국가를 바로세우고 지방을 발전시키며 주민들을 위해서 이 한목숨 바치겠노라고 애국투사로 출전하더니 막상 금배지를 달고 나면 일부이겠지마는 많이 달라진다.
자신들 받는 세비 올리는 건 여야가 따로 없이 쥐도 새도 모르게 잘들 통과시키고 국리민복의 법안들은 서로 밀고 당기다 챙겨 논 법안을 조건부로 통과시키니 이건 과연 누구를 위한 법안들이며 무엇을 위해 일하는 의원들인가 묻고 싶다.
나라꽃을 제정하는 일은 표도 안 되고 콩고물도 없고 인기도 나지 않고 정당에도 미치는 영향이 없고 해달라는 데도 없는데 누가 발 벗고 나서겠는가? 자기들이나 정당에 영양가 없는 법안들은 발의를 한다 해도 수북하게 쌓여 있다가 기간이 지나면 자연 페기 되는 게 부지기수란다.
오죽하면 어린이들이 나라꽃 무궁화의 날을 만들어 달라고 서면운동을 했겠는가? 어린이들에게 밀려 2007년에 비로소 8월 8일을 무궁화의 날로 제정한 바 있다.
입법기관이 있고 국회의원이 있는 나라에서 국민의 관습법으로 내버려둔 채 무궁화를 나라꽃이라고 가슴에 달고 다니며 애국을 말하려는가? 하긴 누워서 침 뱉기지 국민들이 뽑아 올린 대표자니 누구를 탓하겠는가?
홍천군은 일찍이 선각자 한서 남궁억 선생이 무궁화의 뿌리를 내리게 한 무궁화의 고장이다. 우리 군민의 염원으로 서명을 해서라도 무궁화는 나라꽃이라는 법을 제정해 달라는 청원을 해야겠다고 뜻을 모아 서명운동을 펼쳐서 그 결실인 법제정 청원서명부를 우리 지역 국회의원에게 제출하고 무궁화를 국화로 제정하는데 힘을 실어 주고자 했으나 현재까지 아무런 답이 없다.
홍천은 무궁화의 뿌리가 내려진 역사가 있고, 무궁화나무를 전국에 보급한 무궁화선양에 본향이다. 무궁화가 국화로 제정되어 나라꽃으로 위상을 정립하고 민족정신을 일깨워 무궁화의 단심(丹心)같이 국론을 통일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홍천군이 무궁화 국화법제정을 하도록 촉구하는 국민운동에 앞장서야 할 것이다.

 

 마무리 하면서
꽃이 나무를 대신하는 무궁화! 단심에서 붉게 뿜어 꽃잎 갈피마다 번져 퍼지는 일편단심 무궁화입니다.
씨앗을 많이 뿌리나 가꾸지 않으면 자생하기 힘든 무궁화이기에 우리가 가꾸어야하는 나라꽃 무궁화입니다.
한서 남궁억선생이 무궁화나무 보급운동을 하며 민족정신을 일깨우던 무궁화가 침략자에게는 적이 되어 수난을 당해야 했던 무궁화다. 국민이 나라를 사랑하지 않는다면 나라가 존재할 수 없는 것과 같기에 나라사랑하는 마음으로 무궁화를 가꾸어야 할 것입니다.

 

한서 남궁억 선생이 뿌리내려준 무궁화의 고장 홍천! 나라꽃 무궁화는 홍천에 자랑이고 자존심이다. 무궁화 씨앗이 심겨지고 뿌리가 깊게 내려져 무궁화의 역사가 있는 홍천이 무궁화의 단심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화서 이항로 선생이 아름다운 홍천을 표현한 글로 마무리 합니다.

 

홍천의
강물은 / 넓지도 않고 좁지도 않고 / 깊지도 않고 얇지도 않으며

산은 / 위압적으로 높지도 않고 / 비굴할 정도로 낮지도 않았다.

들은 / 막막할 정도로 넓지 않고 / 궁색할 정도로 좁지 않으며
개 짖는 소리는 멀리 들리고 / 닭이 우는 소리는 한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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