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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방이 약하면 여인이 가장 치욕을 당한다.

돌 박사 2021. 12. 6. 15:29


이태원(異胎院 )과 환향녀(還鄕女)..그리고 그녀들의 호로(胡虜)자식..

때는 1592년 임진왜란 당시.
한양을 점령한 가토 기요마사라는 왜장은 인근 운종사(雲鐘寺) 라는 절에서 하룻밤을 묵는다.
그런데 잠자리에 여자 생각이 났다.
"어디 여자 없나? 장군님께서 찾으신다."
"전쟁 통에 기생들도 다 도망간 상황이라.."
그때 부관의 눈에 운종사의 여승들이 들어왔다.
"저기 승려들은 여자가 아니더냐?”
"하지만 그들은 비구니입니다.."
"당장 끌고와라!"

그래서 가토에게 운종사의 여승을 바치고.. 왜병들도 다른 여승들을 범했다.
그리고 다음날 왜병들은 운종사를 버리듯 떠나면서 절을 모두 불태워버렸다.
그러자 왜병들에게 겁탈 당한 운종사의 여승들은 하는 수 없이 인근 융경산 근처에 토막집을 짓고 살았는데
그들 중 몇몇의 배가 점점 불러오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융경산 밑 토막집을 '이방인의 아이를 밴 집'이라 하여
이태원(異胎院)이라 부르게 되었다.

여기까지는 운종사 여승들의 불행 정도로 끝날 얘기지만 그 다음이 문제였다.
전황이 바뀌어 왜군이 한양을 포기하고 후퇴하자 의주로 몽진 간 선조가 환도하면서 슬슬 문제가 불거지기 시작했다.


신하 : "전하! 왜놈들한테 겁탈당한 여자들을 어떻게 해야 할까요?"
선조 : "지번에 올라온 장계를 보니 경상도 어디선가는 왜놈들이 가슴을 만졌다고 자기 가슴을 잘라낸 다음에 자결한 훌륭한 여자도 있더구나!”
"그런 여자들한테는 열녀문을 세워줘라"

신하 : "하옵시면 수천, 수만명이나 되는 정절을 잃은 처자들에게는 어찌해야 하옵니까?"
선조 : "이혼을 허락하게 하면 어떨꼬?"
신하 : "전하, 이혼 당한 여인이 있는 집안을 생각하심이.. 만약 허락하게 되면 반대여론이 심할 것 같습니다.!”
선조 : "그래? 그럼 이혼금지령 내리도록 해라!"
그래서 이혼금지령이 내려졌다.


그러자 이제는 남편들이 불만이다.
비록 못난 남자들 때문에 일어난 전쟁이지만 당시 사대부들은 정절을 잃은 아내를 갖게된 것을 수치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첩을 맞아 아내에게 소박을 맞게 하던지..
아니면 갖은 핑계를 대며 아내를 내 쫓았다.
그래도 여기까지는 감당할 만한 문제였다.

1607년 사명대사가 일본에 가서 포로로 잡힌 조선인들을 데리고 오면서
이야기는 좀 더 복잡해진다.

선조 : "어허, 왜놈의 아이를 잉태한 환향녀와 이미 아이를 낳은 여인들은 어떻게 처리할꼬?"
신하 : "운종사의 여승들처럼 이태원에 모여 살라 하심이 어떨런지요!."
선조 : "그게 좋겠구나!"


그리하여 이후로 이태원은 왜인들에게 겁탈 당해 임신한 여자들이 모여 사는 동네가 되었다.

또 조선이 쇠망하던 1880년대 구식군대의 폭동으로 무능한 당시 조선조정은 중국의 청나라에 진압을 요청하여 중국에서 인천을 통해 상륙한 청나라 군사들은 용산 이태원일대에 주둔하며 대원군을 납치하여 중국으로 강제로 보냈는데, 당시 이 중국군들이 이태원에 주둔하며 우리나라 여자들을 납치,성폭행하였는데 그 악명이 자자했다.

그후 1910년 일본이 한국을 식민지배하며 용산 이태원일대에 일본군 조선주둔군 사령부가 있었고 해방후에는 주한미군사령부가 역시 그곳에 주둔했다.

고려중기때 몽고의 원(元)이 고려를 간섭할 때 몽고군이 역시 용산일대에 주둔했다.
오늘날 이태원에도 외국인들이 유난히 모여 살고 있는 걸 볼 수 있는데 바로 이런 역사들과 무관하지 않다고 본다.
...

연신내의 환향녀

때는 1627년 무섭게 성장한 만주족의 후금은 인조반정을 빌미로 조선을 덮쳤다.

당시 후금이 조선을 침략한 것은 크게 두가지 이유에서였다.

먼저 명나라 치기에 앞서,조선을 진압해서 뒷치기 위협을 사전에 방지하고자 했다.

그리고 인구가 적었기 때문에 포로를 붙잡아 인력을 확보하기 위함이었다.

당시 후금은 만주족 100만명과 내몽골을 점령하여 흡수한 몽골족 50만명 정도가 전부였다.
그런데 조선에는 1100만명 정도나 살고 있었다.

이중 후금이 특히 노렸던 것은 바로 조선의 젊은 여자들이었다.
만주족은 이들을 첩으로 삼아 자식도 낳게하고 농사기술도 활용해서
만주 벌판을 농토로 개간할 참이었다.

때문에 두 차례 호란으로 총 60여만명이 포로로 끌고 갔는데
이들 중 50만명 정도가 여자들이었다.
(젊은 여자들은 대략 5명 중 1명 꼴로 잡혀간 것이었다.)
이때 포로와 관련해서 삼전도에서 나눈 인조와 홍타이치(청태종) 간의 대화가 압권이다.

홍타이치 : "조선왕은 나에게 약속해라."
인조 : “예?”
홍타이치 : "내가 끌고가는 조선인 포로들 가운데 혹시라도 압록강을 건너기 전에 도망친 자가 있으면 붙잡지 않겠다."
"단 압록강을 건너 만주땅을 한 발자국이라도 밟은 조선인이 도망쳐 나온다면, 무조건 돌려줘야한다. "
인조 : “알겠습니다!”

그래서 데려간 포로들이었는데 이후 문제가 나타나기 시작한다.
조선의 포로 식구들이 몸 값을 지불하고 여자들을 하나 둘씩 데려가기 시작했던 것이다.
아울러 탈출하는 여인네들도 점차 늘어나기 시작했다.
이들은 목숨을 걸고 심양의 소현세자 처소로 가서 읍소 하든가, 압록강을 넘어 맨발로 고향에 돌아오기 시작했다.

나중에는 청나라(후금)에서도 도저히 막지 못하겠다는걸 직감하고 아예 포로들에게 '두당 은 몇냥'이라는 몸값을 제시하기에 이른다.

이것이 바로 '속환'이었다. '속환' 이후 청나라로 끌려간 포로들은 대거 고향으로 돌아오게 됐다.
그러자 인조는 골치가 아파진다.

인조 : "이번에도 이태원에 다 몰아넣어야 하는가?"
신하 : "지금은 왜란 때와는 상황이 다릅니다. 그때는 신분을 가리지 않고 끌려간 여자들이었습니다."

인조 : "지금은 뭐가 다른가?"
신하 : "이번에 돌아온 환향녀들의 대부분은 청나라가 요구하는 몸 값을 지불할 수 있는 양반 출신들입니다."
인조 : "뭐라? 양반놈들이 그렇게도 자기 부인들을 챙겼던가?"
신하 : "그럴리가 있겠습니까? 여자 쪽 식구들이 데려 온겁니다."
신하 : "지금 오고 있는 환향녀를 이태원게 가둬두면 여자 쪽 사대부가의 반발이 심할 듯 합니다.”
인조 : "그럼 어찌하면 졸겠소!"

신하 : "나라에서 환향녀들에게 면죄부를 내려주는겁니다."
인조 : "어떤 방법이 있을꼬?"
신하 : "일단 청나라에서 돌아온 여자들을 홍제원 냇물(연신내)에서 몸을 씻고 한양에 들어오게 하옵소서"

그리하여 '연신내 목욕 면죄부'가 시행됐다.
하지만 이러한 면죄부는 사대부들에게는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사대부들의 '이혼 허락' 상소는 끊이지 않았다.
결국 인조는 이러한 사대부들에게 이런 교지를 내린다.

인조 : "그럼 첩을 두도록 하라!”
당시 여인들에게 있어 남편이 첩을 둔다는 말은, 곧 "소박을 맞는다"와 동격의 의미였다.
때문에 당시 환향녀들은 시댁의 눈총 속에서 살아가거나 이런 저런 핑계로 이혼을 당해야만 했다.

급기야 주변의 손가락질에 목을 매거나 은둔하여 비구니로 사는 이들도 속출했다.

오늘날 '환향녀'라는 단어가 '화냥년'으로 바뀌면서 성적으로 문란한 여자를 빗대는 욕으로 발전하게 됐으니, 당시 '환향녀'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어찌했었는지 가히 짐작할 수 있다.
...

호로자식..!

환향녀와 관련해서 이런 문제도 있었다.
신하 : "전하 문제가 있사옵니다. 오랑캐의 아이를 밴 여자와 오랑캐의 자식을 데리고 온 여인들은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인조 : "뭣이라! 이런 호로(胡虜 : 오랑케의 포로) 자식 같은 경우가..!"

당시 환향녀에 대한 멸시는 그 자식들에게까지 이어져서 '오랑캐 포로의 자식'이라 하여 '호로자식'이라 불리웠고 평생 주변의 손가락질을 받으며 살아야 했다.

..
우리들 조상중에 그 호로자식이 있을수도 있다.^^
조선의 여자들의 운명은 무기력한 조선 남자들에 의해 지울수 없는 상처를 안고 살아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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