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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7공화국

돌 박사 2020. 11. 14. 07:13

제 7 공화국- 23번 글


전태일을 누가?- - 비판은 제대로 알고


<시중에 나와있던 자료도 참조했음..
여기서의 주장은 제 7공화국을 추진하는 구국의 혁명위원회의 견해일 뿐........각자 개 개인의 이해와 해석, 보는 눈이 다를 수 있음........
예를들어
여기서 특정인이나 특정단체를 좌파 또는 좌익빨갱이라고 지칭해도, ‘당사자나 단체가
나는, 우리는
좌파 혹은 좌익빨갱이가 아니다.’ 고 하면 아닌 것으로 해석하면 됩니다.>



요즘 현대사<現代史>가 좌익이, 특히 좌익빨갱이 김대중- 노무현을 넘어,
특히 문재인 집권 기간때,

“대중<大衆>들이 몽매해야 좌파- 좌익빨갱이들이 권력을 잡기 쉽고, 또한 잡은 권력을 보다 용이하게 장기간 끌고 갈 수 있다”

판단하고
“적색<赤色>싸이코” 들이 주도하며 집필한 현대사<現代史> ‘곡해<曲解> 교과서’를
가치관이 채 성립되지 않은 청소년기 학생들에게 강제로 주입해

대한민국의 미래에 너무 큰 해독<害毒>을 끼치고 있다는 것을 알만한 사람들은 다 알고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포퓰리즘만 쏟아내며 나라를 병들고 쇠약하게 만드는 낙조<落照>인 서구식민주주의 현행 제 6공화국을 폐기하고,

대한민국을 살리는, “한국형민주주의” 제 7공화국을 추진하는 <구국의 혁명위원회의> 현대사관<現代史觀>은?

제 2차 세계대전 전서<戰書>를, 한국인에게 맞추어서, 독일 총통을 ‘히틀러’에서 <북진통-北進統> 총통으로 대체 개작<改作>한 미출간<未出刊> 가칭
<모순과 진리의 열국지<列國誌>에서,

한국 현대사의 1단계로 “전태일 노동자를 분석” <제 7공화국 23호, 25호 글>
2단계로 “대한민국은 부동산 공화국” 으로 <제 7공화국 19호, 50호, 65호 글>
3단계로 대한민국 현대사로

8, 15 해방 전후, 6, 25, 박정희, 전두환- 제 6공화국 일부의 내용을 제 7공화국 뜻으로 간주, <제 7공화국 3호, 4호, 12호, 20호 글>
3회로 나뉘어 공개하며 본편은 1편인 ‘전태일을 누가?’ 제 1호 글 입니다.



1, 하루 2끼 식사

1944년 11월의 어느날, 히틀러 본영<本營>으로 축조된 “이리의 소굴” 이라는 동프로이센의 라스텐부르크 총통 관저,

회의실에서 북진통 총통 주재하에, 내무상<內務相> 비츠레벤, 선전상 게르델라 박사,
총통 비서실장 할더가 참석하여 점령지역 행정문제와, 친독<親獨> 선전<宣傳> 역활에 대하여 회의를 하고 있었다.


이때 바로 총통 부관 쉬문트 소장<小將>이 집무실 책상에 올려진,
모 정보기관이 올린 이탈리아 금주의 정세동향<政勢動向> 보고서를 총통에게 가져왔다.

보고서를 간단히 훍어보던 총통은 말미에, 밀라노의 모 직물공장의, <군인용 피복도 일부 만들고 있음>
<토티>라는 이름의 노동자 한 명이 “노동자 권리를 보장하라”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외치며

<홍계천변> 거리에서 몸에 휘발유를 뿌리고 자살했다는 문구를 총통은 유심히 여러번 읽어 보다가,
비츠레벤을 바라보며 지금이 노동자 권리 운운하며 노동 3권을 요구할 시기입니까?

비츠레벤- 이탈리아의 노동자들도 지금 우리 독일 국민들과 똑같은 근무시간과 똑같은 격주 휴무인데,......
더군다나 지금은 평시도 아닌 전시<戰時>하에서........

그만큼 우리의 위수<衛戍>부대의 이탈리아의 군정<軍政>이 온건하다는 뜻입니다........

총통- 피복 노동자가 분신<焚身> 자살을 했다기에 생각나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과거, 박정희 대통령 통치 시대의 한국에서의 일인데,
1970년 한국에서
<전 태일>이라는 피복 노동자가 “정부는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정부는 노동 3권을 보장하라!” 외치며 청계천 거리에서 분신자살을 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이 노동자는 하루 12시간 노동, 주 1회 휴무가 아닌 격주 휴무였다고 합니다.

이 시기의 한국의 노동법은 물론 한국보다 수십배 잘사는, 선진국의 노동법과 다름없이 하루 8시간 노동, 주 1회 휴무였습니다.......

그리고
하루 8시간 노동을 넘어서는 노동시간은 초과근무 수당이라는 명칭으로, 8시간 노동 때보다 50% 더 임금을 얹어 주도록 되어있습니다.

그러나 이때 피복 공장 사업주들은 하루 12시간씩 노동을 시키면서 초과근무 수당도 전혀 없었다고 합니다.........
<대부분의 다른 산업의 민간 중, 소 사업장들도 마찬가지>


총통이 -게르델라 박사를 바라보며-
여기까지 들으면, 모두가 당시의 박정희 정부의 노동정책과 당시의 사업주들을 나쁘다고 하겠지요?

게르델라 선전상 - 그렇습니다. 법정 근무시간을 훨씬 초과하는 노동시간에, 초과근무 수당도 없이 장시간 노동 강요. 전시<戰時>도 아닌 평화시에 휴일도 2주일에 하루꼴.........

총통 - 그러니까 사람들은 사물을 분석하는데 나무만 보지말고 숲을 봐야 한다고 했습니다.
이 당시의 한국의 경제 여건을 먼저 고려해야 할 것입니다.
이때는 한국의 박정희 대통령의 집권 약 9년차 정도 됐을때 입니다.

박정희 대통령이 구국<救國>의 5, 16혁명으로 정권을 잡았을때,
한국의 사정은 그야말로 초극빈 한마디로 “준 노숙자 신세” 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습니다.

아프리카의 가난한 나라들,
오늘도 원조가 절실히 필요한 그들과 다른점은 없었습니다.
중, 상류층외에
중, 하위권 일반 국민들은 너무 가난해서 가을 추수기때 외에는 하루 식사를 점심은 거르고, 아침 저녁으로 2끼밖에 못먹었습니다.........

봄이 지나 여름 문턱에 추수를 하는 보리. 보리를 추수하는 그때까지 식량이 남아있는 농가는 얼마되지 않았습니다.

절량<絶糧>농가들은 인근 산에 올라가, 초근목피 <풀뿌리>로 때우며 허기진 배를 움켜쥐고 하늘만 쳐다보는 실정이었습니다.

한국에선 옛부터 끼니를 조석<朝夕>으로 표현했듯이, 중 하위계층 즉 절대다수 한국인들은 하루 2끼 식사밖에 못했습니다. 그것도 수천년 동안 당연하듯이..........

이때 한국은 국민의 70%가 농업에 종사하는 농업국가이면서도, 자체 소비할 식량도 부족했다니 얼핏 들으면 이해가 잘 안될 것입니다.

한국은 인구에 비해 국토가 너무 협소해, 당시 농가당 경지 면적이 미국의 0.5%, 일본의 33%에 불과했는데,
이마저도 치산치수<治山治水>가 안되어 있어, 거의 대부분이 관개수로가 없어 하늘만 바라보는 천수답<天水畓>이었습니다.

그래서 비가 조금만 많이오면 홍수로, 비가 조금만 안오면 가뭄으로 농사를 망치는등 농사가 제대로 될 때가 매우 드물었습니다........

이런 낙후된 상황이니, 빈곤으로 국민들의 다수<多數>가 문맹이거나, 간신히 일부만 글만 깨우친 수준으로, ‘죽기전에 빨리 결혼하여 대<代>를 이어야 한다’

혹은 신부<新婦>측은
식량 한줌 절약하기 위한 즉 ‘입하나 덜어야 한다’ 는 취지로 대부분 16~18세 20세면 만혼<晩婚>일 정도로 일찍 결혼하는 관습이었습니다.

그것도 자식이 많으면 복<福>이라는 ‘고루한 의식’ 으로,
“지줌 먹을요는 다 타고난다” 며, 무조건 자식을 ‘펑펑 많이만 낳으면 좋다’ 는 ‘봉건의식’ 의,
모든 것이 낙후된 시대상황 이었으므로,
피임이나 가족계획은 개념 자체가 없던 시대였습니다.

때문에 대부분의 부부들은 자식들을 7~8남매, 많게는 10명 이상도 낳아 낳기는 잘 낳았는데,

워낙에
빈곤하고 못먹고 낙후된 위생환경으로 그들이 자라는 과정에서 2~3명외에는 대부분이 성장 과정에서 질병으로 죽어버려,
한국인 그들은 가난해서 주린배를 움켜쥐고 못먹어 한<恨>,

자식들이 질병으로 툭하면 죽어서 또 한. 외침<外侵>으로 타격을 받아 눈물,
눈물과 슬픔의 한을 끼고 사는 민족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습니다.

상황이 이럴진대 교육인들 제대로 되겠습니까? 어지간한 중, 상류 가정을 제외하고, 일반 가정의 여성들은 남존여비 <男尊女卑> 관습으로,

취학 연령이 되어도 가정의 남자들을 위해 학교도 못가고, 부모 일을 도와서 농사나 가사<家事>일에 종사해야 했고,
남자들만 학교에 다녔습니다. <하위 계층은 가난해서 남자들도 학교에 가지 못했다>

하지만 이렇게 어렵게 학교를 졸업해도, 워낙 한국이 낙후되어 있어서
그들을 받아줄 직장이 없었습니다.

오직 취직이 되는 길은 공무원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가난한 나라에서 공무원 수만 늘일수는 없고, 공무원마저
워낙의 박봉<薄俸>이라, 대부분의 공무원들이 월급으로는 한 달 생계를 이어가기 어려워 부정부패 비리를 통해서 생계를 이어가야 했습니다.

하지만, 박정희 정부는 1961년 5, 16 쿠데타 집권후 대한민국이 매년 7~10% 수준의 고도 경제성장을 계속하고 있다고, 국민들에게 강조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공분<公憤>속에 자살한 전태일 노동자는 대한민국이 매년 그렇게 성장했다고 하면서도,
가난한 서, 빈민들에게는 성장의 혜택이 하나도 없고, 일부 권력을 가진 고위층과 소수 부유층만
부정부패 혹은 가난한 사람들을 착취하여 호의호식 하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때 붉으스레한 먹물들은 <대학 졸업자나 대학생. 이때 한국의 수준으로 인텔리에 해당>
주로 좌익이거나 좌익 성향, 친북은 아니더라도 좌익과 유사한 사고를 지닌 포괄적 좌익 성향의

<대부분의 현명한 사람들은 나이들어 철이 들면 보수로 돌아선다.>

이들은 국회의원, 장군, 고위 공무원, 재벌, 사법부 등등의 여러 권력 집단을 꼬집으며 나라를 망치는 적<敵>이라고 까지 매도하며,
결과적으로 박정희 정권을
매우 부도덕한 정권, 타도해야 할 정권이라고 공격하고 있었습니다.




2, 세계 1위급 고도경제성장

루드비히 베크 국방상 - 매년 7~10% 경제성장을 9년 가까이 지속했다면, 박정희 정부 집권초에 비하면 국민소득이 2/3 안팍 늘어났다는 뜻인데,

성장의 과실 즉 파이<富>가 한쪽으로, 즉 소수 권력층과 일부 부유층에 쏠려서,
전체 국민들은
피부로 성장의 체감을 전혀 못하고 있다는 뜻이라고 해석해야 하나요?


총통 - 일부 국민들이 너무 성급해서 그렇습니다.
인간 세상은 세계 어느 나라나 마찬가지 빈부 차가 있습니다.
가난한 방글라데시나 부자인 미국이나 어느 나라든 빈부 차는 다 있기 마련입니다.

그리고 인간사회에 빈부차가 없다면 오늘날의 인류문명은 존재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창의력이나 열심히 공부함과 부지런함과 근검절약이 무능과 무식,
게으름과 차별적인 보상이 되지 않았다면,

인류문명은 아직도 석기<石器>시대에 머무르고 있을 것 입니다.

박정희 집권후, 그는 수천년간 한반도의 권력자들이 자신 무능의 면피용으로 상투적으로 사용해온 무책임한 용어인

“가난은 나라님도 구제 못한다.”는

말을 시중<市中>에 지속적으로 통용되도록 은근슬쩍 권장하며,
이에 안주하기를 단호히 거부하고,

“국민의 궁핍과 가난은 최고통치자 잘못” 이라고 스스로 재정립, 자신의 책임감을 자각하며,

'우리가 비롯 땅덩어리도 작고, 자원도 없고 인구도 적은 소국<小國>이지만, 우리 하기 나름에,
먼 미래에는 미국, 일본, 독일, 영국, 불란서 등등, 선진 강대국 못지않게 우리나라도 잘 살 수 있을 것이다.'

외국의 정치권과 언론들로부터 ‘한국은 국토 면적이 작고 자원이 없어서 경제발전은 쓰레기통에서 장미꽃이 피어나는 것처럼 불가능하다’ 는, 온통 부정적 평가로 얼룩진,

우리나라의 가능성을 스스로 재평가하며 자신을 채찍질하면서, 국민들을 번영으로 향도하려고 노심초사 부단히 노력하였다.

하지만, 그 어려운 여건속에서도 8년간 세계 1위급의 성과를 이룬 고도 경제성장의 혜택을 피부로 느끼지 못하고, 박정희 정권에 분노 비난하며 분신 자살한 전태일.
그렇다면 성장의 과실<果實>을 전태일 노동자가 모르게 누가 가져 갔는가를 여기서 대충 설명해 보겠습니다.

박정희 대통령이 5, 16 쿠데타로 집권할 그때만 해도, 한국은 너무나도 피페해서 정부 예산의 50% 국방비의 70% 안팍을 미국의 원조로 꾸려가야 했습니다.

한마디로
미국의 원조가 없으면,
정부는 공무원들의 급료도 제대로 지불할 수가 없었고, 경찰력 유지를 비롯해서, 장교나 부사관들 같은 직업군인들의 봉급도 제대로 줄 수가 없었고,

가솔린이나 경유등 연료도 미국이 제공하지 않으면,
차량 한 대도 움직일 수 없는, 그야말로 국가 안보를 위한 군대도 유지할 수 없는 국가생존 자체가 어려웠습니다.

하지만 미국은 미국이 상대해야 할 나라가 지구촌에 한국만 있는 것이 아니었으며,
한국민<韓國民>이 미국과 무슨 뗄레야 뗄수가 없는 인간의 예를들어 ‘부모 자식’ 같은 피붙이처럼 무슨 천혜적인 끈끈한 인과관계가 있는 것도 아니고,

한국이
미국 납세자들의 돈을 계속 빨아 먹게 할 수는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미국의 원조가 없으면,
즉각 국가 자체가 존재해갈 수 없을 정도로 가난하니, 한마디로 미국 정부는 울며 겨자먹기로 한국에 경제, 군사원조를 계속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원조경제가 풍족하겠습니까? 거리에는 빈곤으로 기, 아사자가 속출하고 있었고,
취학연령 아동들의 상당수가 빈곤으로 학교에도 못가고 있었습니다.

이때 등장한 것이 5, 16 쿠데타로 등장한 박정희 정권이었습니다. 그의 등장 초기에는 미국도 한국의 일부 국민들도 그를 아주 싫어했습니다.

<좌익빨갱이들은 일본이 식민지 시절 북한에 발전소, 제철소, 비료공장을 비롯한 대규모 공장을 많이 건설한 덕분에
"남한보다 3배 잘 살던 북한체제를 휠씬 뛰어넘는 ‘부흥’을 시켰다." 는 이유로,

덕분에 대한민국이 강력해져
적화통일이 휠씬 어려워졌다며, 박정희를 더욱 철천지원수 취급하며 싫어하고 있다.>

하지만 석유같은 자원이나, 아르헨티나의 <팜바>같은 광활한 대초원도 가지지 못한, 자본이나 기술,
성공해본 경험도 없는 나라에서, 그는 그의 대통령 재임기관 내내 세계 1위급 수준의 경제성장률을 달성했습니다.

그러나 한국이 예를들어 한해 8% 경제성장을 하면, 미국은 ‘옳거니 잘 됐구나’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즉각 대한<對韓> 경제와 군사 원조를 대충 그 비율만큼 줄여 왔습니다.

그러니 8%성장을 했다고 하더라도 실질적으로 국민들에게 돌아갈 파이는 미국의 계속된 원조 삭감으로 의외로 작았습니다.

이러한 불리한 여건에서도, 성장으로 약간의 재정 여유가 생기면 국가의 지속적인 발전을 위해 공장 하나라도 더,
발전소 하나라도 더 건설하는 등등 국력증강을 위한 용도로 계속 투자 건설해 갔기 때문에
국민이 성장의 혜택을 살갖으로 느끼기에는 매우 더딜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의 집권 10년 차에는 미국의 원조가 한국 국방비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10% 수준으로 줄었고,
미국의 경제원조가 없어도 한국의 예산만으로도 100% 가까이 정부를 꾸려갈 수 있게 되었으며,
아니 꾸려가는 정도가 아니라, 풍족해진 <박정희 집권초에 비해>

정부 예산으로 신규 도로개설 및 도로 포장으로 도시 가로망 건설, 댐 건설, 항만이나 비행장 건설, 경지정리,
관계수로<水路>건설 추진으로 농토 서서히 천수답 탈피. 산림녹화, 낙농업 육성, 수산업 진흥. 전국 방방 곳곳에 학교 건설,

제 구실을 할 수 있는 보건소와 병원을 나라 구석구석에 건설, 고속도로, 정유공장, 시멘트 공장 건설, 한국 과학기술원 개원 등등의
경제부흥과 과학 기술 발전을 위한 그의 집념으로 국가 기간산업 육성과 민간기업 지원 등등,
헤아릴수 없는 많은 진전을 이루어나가고 있었습니다.

3, 고도 경제성장의 혜택

하지만 이런 발전과 건설도 한국이 그전에 너무나 가난했기 때문에, 전체 국민들에게 직접적으로 혜택이 풍족하게 돌아가게끔 하는데는 한계가 있었습니다.

가령 국민 소득이 30.000불 국가가 8% 경제성장을 몇 년간 지속했다면, 아니 2~3년만 해도 국민들은 호경기를 만끽하며, 풍족함을 느낄수가 있었겠지만,

준 노숙자나, “사글세 셋방살이 신세” 수준급에서 출발했던 한국으로선 8년 가까이 세계 경제성장 1위를 했는데도

일부 국민들이 고도 경제성장을 체감하지 못하고, 박정희 정부에 쉴새없이 불평불만을 늘어놓으며,
그의 정권을 타도하자고 외치고 있었던 것은,

근본적으로
김대중을 비롯한 좌익세력들의 선동때문이라고 하지만, 일부 한국인의 성급함도 한몫 했습니다.

전태일 그는 좌익성향의 정치가들이나 ‘붉은 먹물’ 들의 선동으로, 경제성장의 혜택을 일부 특권층과 부유층만 보고,
자신은 아니 자신과 같은 피복 공장의 노동자 더 나아가 전체 블루칼라 노동자들은 전혀 못보고 있다고 생각했겠지만,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도 고도 경제성장의 혜택을 상당히 많이 받았습니다.

게르델라 선전상 - 으외라는 표정으로 - 어떤 방식으로 받았습니까?

총통 - 첫째 한국의 영 유아 사망률이 급감했습니다. 박정희 집권전만 해도, 남 녀가 자연의 섭리대로 교합하면 자연의 섭리대로 아기들을 낳기는 “펑 펑” 잘 낳았지만,
비위생적인 여건과 가난으로 수반되는 영양부족과 의료시설 미비로 시도때도 없이 죽기도 잘 죽었습니다.

<의료시설이 일부 지역에 있었다 해도, 가난하여 병원비가 없어, 병원을 못가는 가정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하지만 박정희 집권 9 여년이 되자, 무의촌<無醫村> 일소정책 추진으로 전국에 농어촌까지 병, 의원들이 많이 늘어나고,
각 지역의 보건소의 인력과 장비를 대폭 확충하여 각종 예방주사 등 대민<對民> 의료지원과
현대적인 방역<防疫>실시로 전염병 창궐을 적극 저지 봉쇄하며,

전 국민들이 소득수준 향상으로 알게 모르게 영양섭취가 좋아져 질병 발병율이 낮아졌고,
교육을 받으므로서 위생관념도 높아지고

병, 의원 이용율도 높아져서 7~8 남매를 낳아 2/3가 중도 <청년 기준> 에서 죽고 2~3명만 건지는? 일은,
이제 대한민국에서 한국 사람들 누구도 전혀 의식도 못하는 사이에 어느새 먼 옛날 애기가 되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박정희 집권 9년이 되면서 이제는 대한민국 국민들의 먹는 문제도 풍족하지는 않지만 어느정도 해결되고 있었습니다.

이제는
대한민국 국민 누구라도 하루 식사 횟수는 당연히 3회로 알고, 가난한 사람들도 하루에 식사를 2번 하는 일은 거의 없어졌습니다.
하지만
개구리가 올챙이 시절을 모른다고, 국민 다수가 박정희 등장이전 하루 2끼 먹던 시절을 까맣득하게 잊고 있었습니다.

박정희 집권전 그렇게도 많았던, 거리의 거지, 넝마, 고아, 정신 이상자, 병든 사람 등등이 가족에게 버림받고 길거리를 “배회” 하다가 거리에서 굶어죽거나, 병들어 죽거나,

추위에 얼어 죽거나<凍死> 하였지만, 이젠 국가에서 재정을 투입하여 이들을 관리하게 되었고 그들은 발견되면 <관할 지, 파출소 경찰관이나 시 군 군 복지과 공무원들에게 >
즉시 수용시설에 데려다 수용하게 되었습니다.

물론 좌익세력들은 사람들을 강제로 잡아다가 가두어 놓는 것이 무슨 복지나? ‘자유를 박탈당하는 감금’ 이지 하겠지만,

일단 수용소에 수용되면, 이발 목욕과 깨끗한 옷이 제공되고, 건강검진을 받으며 기존의 질병이 치료되고,
비바람이 몰아쳐도 비를 맞지 않고, 폭풍한설<暴風寒雪>이 몰아치는 한 겨울에도 이부자리 밑이 따뜻해졌고,

풍족하지는 않지만 하루 3끼 식사가 제공된다.
그리고 취학 연령대는 학교에 취학시킨다. 이런 수용시설이 자활 근로의지가 있는 사람들을
불필요하게 오래 잡아두지 않았고, 오래잡아 둘 필요도 없는 일이었다.

박정희 집권 9년차, 이제는 한국의 취학 연령대에 이르면 누구나 학교에 당연하듯이 갈 수 있게 되었다.
과거에도 초등학교는 의무교육이라고 했지만, 가난하여 유명무실했었다.

이제는 6년제 초등학교는 당연히 모두가 가게 되었고, 중등 3년제도 대다수가 진학하게 되었고,
고등 3년, 대학 2~4년제 입학도 폭발적으로 늘어나고 있었다........

박정희 시대에 고등학교, 대학 나온 사람들의 일부는 박정희 대통령의 훌륭한 고도 경제성장 덕택인줄 모르고
거의 전부가 자기 자신이 잘 났거나 공부 잘 했기 때문이라고 ...... <학력 낮은 사람들 모두가 공부 못해서 상급 학교 진학 못한 것도 아닌데............ >

혹은 부모님 덕분이라고 한다.
<부모님에게 감사하는 마음은 당연하다. 고도 경제성장이라 해도 누구나 대학 간 것이 아니기 때문에........ >


4, 한국의 여성 해방은 누가?

그리고 솔직히 말한다. 한국의 “여성 해방” 은 박정희가 시켰다. 박정희 등장전에는 한국이 너무 가난해서,
어지간한 가정외에는 여자들은 취학 연령이 되어도 학교에 보내지를 못했다.

가사일이나 하며, 남자들을 뒤바라지 해야만 했다.
<남자중에서도 장남<長男>우선>

<2012년 기준> 70대~80~90대 여성들의 상당수가 안타깝게도 빈곤으로 학교에 가지를 못했다.
여성들의 상당수가 한 평생을 문맹으로 보내거나, 간신히 초등학교 수료 수준인데, 무슨 남녀 평등 여성 해방이겠는가? 한마디로 남녀 간의 권리는 완전히 “수직적 관계”였다.

예를들어.........직장에서 퇴근한, 혹은 일터에서 돌아온 남편이, 마누라를 하인 다루듯이,
“물 떠와 발 씻어라!” 하면, 군소리없이 아니 당연하듯이 세숫대야에 물을 알맞은 온도로 맞쳐서 떠와 다소곳이 앉아 남편의 발을 정성껏 씻어야 했다.

<박정희 후임으로 대통령이 된 전두환 대통령. 그의 가정도 전형적인 한국의 농촌 가정으로 가난하여.
오빠들이 학교에 다닐때에도 누이동생은 집안일을 하며 학교에도 못다녔다.

그러나 다행히 오빠 한명이 대통령이 되는 바람에, 형편이 피어 나이 50줄에 검정고시 학원에 다니게 되어,
글을 깨치는 초등학교 과정을 거쳐 나아가 중졸 과정을 지나 고졸 자격증까지 취득해, 오빠인 대통령으로부터

저승에 계시는 아버님- 어머님이 얼마나 기뻐하실까?
'의지의 한국인’ 인 네가 진정으로 “가문의 영광을 꽃피웠다” 고 칭송하였다.>

박정희 집권 10여년차 되자, 여성들도 교육을 받고, 국민소득이 늘어나자, 자연스럽게 ‘남녀평등’ 이라는 용어가 시중에 등장하게 되었고,
심지어는 “여성 상위시대” 라는 말까지 유행하게 되었다.

5, 16혁명 이전에는 감히 상상도 못하던 상황 변화인 것이다.

오늘날에는 한국도 '세계 최고'라는 미국처럼 대학진학률이 남성들보다 여성들이 더 높다. 사법고시 연수원 상위 성적으로 판사직에 임용되는 여성들도 남성들과 숫자상으로 비슷하다.

물론 다 내 잘나서, 부모 잘 만나서 이유지만, 크게 따져 보면 아니 정확하게 따져 본다면
5, 16혁명으로 등장한 박정희의 탁월한 치적 덕분이었다는 것을 한국인들, 아니 여성들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이다.

<빈곤한 저개발 국가들의 남녀 평등도, 법조문 속에서는 선진국들과 대부분 비슷하다.
그러나 천마디 만마디 입으로 아무리 떠들어 봐야, 경제성장이 수반되지 않으면,여성들이 교육에서 소외되어 대남<對男>대항력이 미비하고,

법조문속에서나 형식상으로 존재할뿐이다. 일선의 경찰관이나 공무원, 판, 검사들의 사고<思考>에도
양성평등의 개념 자체가 거의 존재하지 않는데, 일반 대중들에게는 더 말해본들........>

한국을 부흥시킨 박정희 시대를 거치면서, 이제 한국에서 고학력자가 많아져서 초등학교 학력이란 주로 사회의 밑바닥층을 형성하며, 고달프게 살아가야 할 팔자라
<꼭 학력이 낮다고 100% 가난한 것은 아니라고 하지만.......>

전태일 그는 세상 살 맛 별로였을지도 모르지만, 인간은 가끔은 아래도 내려다보며 살아야 삶의 위안이 된다. 문맹자도 생각해보라,

박정희 집권 이전의 한국과 수준이 비슷했던 주로 아시아 아프리카 저개발국 이야기지만
어느 나라는 문맹률이 몇십 %고, 하는 이야기를.......문맹자에 비하면 글을 읽고, 쓰고 셈<산수> 을 할 수 있는 초등학력 보유가 그나마 얼마나 다행이고 행복한가?

그리고 전태일은 나이를 보면, 그의 초등학교 학력이 1961년 5, 16혁명으로 집권한 박정희 때문이 결코 아니다.

그리고 박정희 정권의 일자리 창출은 빼놓을 수 없는 박정희 정권의 최대의 업적이다.
세계 1위급의 고도 경제성장을 지속하고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박정희 집권전에는, 한국의 일자리가 없었다.
극소수가 대학을 나와도 직업을 구할 수가 없었고, 무학<無學>이나 초등학력 수준의 저학력이 대부분인 한국인들을 받아줄 직장이 없었다.

앞에서 지적한 한국인 가정에서 7~8 남매를 낳아 중도에 하나도 죽지 않고 다들 잘 커도 문제였다.
그들이 먹어야 할 식량을 그 가정의 쪼막만한 농토에선 댈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때에는 각 가정의 장정<壯丁>들의 품삯도 거의 없다시피, 자신의 입<入>만 먹여주는 댓가로 다른 집에서 일을 했고,
대부분의 농가에서는 입하나 덜기 위해, 즉 식량 몇톨 소비를 덜기위해, 딸들을 무작정 조기<早期> 시집 보내었고, 심지어는 첩으로 보내기도 했다.

농촌만 그런 것이 아니었다. 박정희 집권 전에는 식당이나 그와 유사한 서어비스업같은데서 일하면,
입만 먹여주고 월급이 없는 경우가 허다했다.......성실히 일하면 명절 <설, 추석 1년에 두 번> 때, 옷 한 벌 사주고, 고향 다녀 올 여비를 주는 수준의 근로계약 <구두<口頭>계약> 이었다.

정유공장, 발전소, 비료공장을 비롯한 각종 국가 기간산업들이 속속 건설되면서 “선진국형 중산층급” 고급일자리가 많이 생겨나기 시작했고, 중소 규모의 각종 공장들도 대거 창업되면서 생산직 일자리도 급증했다.

박정희 집권 10년차 정도되자, 이제 한국에서는 무슨일을 시키든 한 달에 한번씩 월급을 주어야 하고,
주지 않을 경우 법에 저촉된다는 사실을 알게 됐고, 과거처럼 월급이 아예 없거나 임금이 지나치게 적으면, 필요한 사람을 구할 수 없음도 알게됐다.

5, 박정희 국민들의 인사말까지 변경시켰다.

전태일 그는 박정희 집권후 그 이전에 비해, 다음과 같이 달라졌다.

1- 7~10남매들 중에서 2~3명만 살고 나머진 빈곤과 낙후로 성장과정 중도에서 죽는 일을, 그나 그의 가족들, 또는 주변사람들이 다시 안겪게 되었다.

2- 빈곤으로 굶어죽는 사람이 거의 없게 되었고, 가난한 사람들도 당연하듯이 비롯 양<量>은 적지만 하루 ‘3끼’ 먹을 수 있게 되었고,
가정에서 버림받고 길거리를 배회하다가 거지꼴로 죽어가는 사람들도 국가재정<國家財政>으로 간수 할 수 있게 되었다.

<박정희 등장하는 5, 16 혁명때만 해도, 한국인들은 이웃 상호간에 인사말은 ”진지 드셨습니까?” 했다.........
1년중 가을걷이 직후 외에는, 권력층이나 상류층 소수 부자<富者>들외에는 굶겨나
하루 2끼밖에 못먹던 시절이라, 제대로 밥을 드셨는지 그것이 궁금하고 염려스러워서........

박정희 집권 10여년차 되자, 인사말은 자연스럽게 “안녕 하세요” 로 바뀌었다. 누구나 하루 3끼 다 먹으니,
수천년 사용해오던 ‘진지 드셨습니까?’ 는 어느새 시대상황에 안맞게 되어, 국민들 사이에 자신들도 모르게 자연스럽게 용도폐기 되어버린 것이다. >


3- 취학 연령이 되어도, 빈곤한 가정은 특히 여성들은 가난 때문에 학교를 못갔었지만, 지금은 취학 연령 아동들 전원이 취학하고 있고, 상급학교 진학률도 매년 비약적으로 급증하고 있었다.


4- 대학졸업자들은 그들 수준에 맞는 일자리가 자신도 모르게 제공되고 있었고. 저학력자들은 그들 수준대로 근로를 할 수 있는 청소년기가 되니 일자리가 마련되었다.
블루노동자들, 비롯 화이트칼라 일자리 하곤 격과 미래가 달랐지만, 하루 3끼 끼니를 거르는 일 없고 매월 월급이 있었으며, 박봉이라고 하지만,

미혼으로 가장<家長>이 아니므로
여기저기 왔다갔다<移職> 안하고 한 직장에서 꾸준히 있었다면 월급의 25~50% 까지 저축할 수 있었을 것이다.


5-장시간 노동에 고작 월 2회 휴무, 이것이 인간다운 삶인가 의문시 되었겠지만, 전태일 그는 틈틈이 책을 읽고 있었다.



아시아, 아프리카를 비롯해서, 식민지 출신 신생 독립국들이 헌법이나 노동법을 비롯한 각종 법을 초안할 때 어떻게 하겠습니까?
당연히 초 극빈 자신의 나라, 현실에 전혀 맞지 않아도, 형식상으로 선진국법을 그대로 빼껴 놓습니다.

전태일이 ‘근로기준법’ 운운 할 그 시점에 대한민국은 신생 “초기 개발 도상국”으로서 자본, 기술, 자원등 세계 경쟁력 관점에서 무엇하나 유리한 것 하나없는 열악한 조건이었습니다,

대한민국은 세계 수십개 저<低>개발국들과 경쟁하면서, 한국이 열심히 노력하면 해낼 수 있는 분야를 하나 둘 찾아내어, 즉 봉제, 가발, 신발, 합판등 노동집약적 경공업을 일으켜,

<고도정밀 산업및 중화학 공업 추진은, 자본이나 기술이 부족한 저개발국들의 공업화 초기에는 매우 힘든 프로젝트며 투입자본 대비 고용 효율성도 고려해야 한다.>


오직 하루 한 두시간이라도, 주 몇시간이라도 그들보다 더 일하고, 그들보다 덜 먹고, 근검절약 저축하면서,
저렴한 가격과 고품질로 시장을 선점하며, 비롯 선진국 관점에서 보면 ‘푼돈’ 에 불과한 돈이지만,

거기에서 번 돈을 낭비하지 않고 근검절약 저축으로 자본을 축적하여, 점점 고도기술과 보다 많은 자본재가 투입되는 부가가치가 높아지는 업종에 하나 둘 재투자 신규 진입하며,

하나라도 더 많은 공장을 건설하여, 매년 초등학교에서부터 대학 졸업반까지 한 해 40만명 안팍에
이르는 신규로 취업시장에 뛰어드는 사람들에게 일자리를 창출 제공하여 먹여 살려야 하는 절박한 시절이었으며,

이런 일은 세계 어느 나라나 국가 지도자의 우선적 과제였지만, 당시 저개발국 지도자들이라고 해서 누구나 해낼 수 있는 쉬운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과거 7~10남매중 2~3명만이 생존하던 것이, 박정희 치세<治世> 덕분에 거의 전원이 생존하여
매년 노동시장에 파도처럼 거세게 쉴새없이 새로 진입해 오고 있었다.>

루드비히 베크- 결국 박정희 대통령이 전태일 노동자를 죽인 것이 아니군요?

총통- 결국 인류문명의 파괴자들인 김대중을 비롯한 좌익빨갱이들이나 좌익 얼간이들이 죽인셈이지요.

이 시기에 자가용을 타는 사람들은 부유층으로 좌익빨갱이들의 선도 <先導>하에 “가난한 사람들을 착취하여 호위호식” 한다며 “질시와 타도”의 대상이었습니다.

그러나 박정희 정권은 대한민국이 워낙 가난한 상태에서 출발해서 그러니, 좀더 참고 있으면,
노동자들도 번듯한 내집에 해외여행을 하고 자가용을 굴릴수 있는 시대가 열린다고 했지만,
중, 하위계층 그들은 좌익성향 불순분자들의 선동<煽動>에 속아 누구나 콧방귀나 뀌며 박정희 정부를 불신했지요.

전태일 그는 그 어려운 시기에도 활자를 <책, 신문> 가까이 하고 있었는 것을 고려하면, 그가 죽지 않고 계속 살았으면,
자가 아파트에 자가용을 굴리며 자식을 대학에 분명히 보냈을 것임을 본인은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현재 대한민국의 의사, 공학박사, 교사, 판, 검사, 대기업 직원, 금융기관 종사자 그들의 상당수는 부모가 학력이 낮은 농부이거나 블루 노동자 영세민 가족 출신들입니다.

결국 연륜이 짧아 세상물정 모르는 순진한 노동자에게 종속이론, 사회주의 사상이나 노동자 해방, 가진자들의 착취구조, ‘노동 3권’ 운운의 ‘붉은 독극물. 같은

즉 “가난한 노동자들은 뼈골 빠지게 일해봤자 영원히 노예인생으로 살아야 한다” 는 비관론,
정부<政府>와 자본가들을 증오<憎惡>로 몰아가는 카알 마르크스의 공산주의식 노동자 계급론, 같은 것을
주입시킨 “붉은 먹물들의 “붉은 좌익 독서<毒書>“들이 전태일을 죽음으로 몰아간 것이지요.

그리고 서구식민주주의체제의 노동법도 지금은 칼 마르크스 시대와는 시대가 다르며
그 좋다는 서구식민주주의체제 빨리 내 던지고, 한국형민주주의 제 7공화국체제로 변신하지 않으면, 그 나라의 장래는 모두가 비관적일뿐 입니다.

<구국의 혁명위원회는,
좌익빨갱이들에 의해 청계천 6가에 설치되어있는 “전태일 노동열사비”를 정권획득 즉시 부셔서 철거하기로 했으나,

좌익빨갱이들이 이를 곡해 선전선동으로 이용하면, 몽매한 대중들은 또 “그런갑다.” 할 것이므로,
독일의 북진통 총통이 분석한 전태일 죽음의 일면을 새긴 설명 동판<銅版>을 전태일 열사 기념비 옆에 나란히 세워놓아,

국민들이 좌익빨갱이들의 선전술에만 일방적으로 놀아나지 않고, 스스로 비교해 누가 진실인지 판단할 수 있도록 했다.>

6, 카알 마르크스는 적그리스도급

할더- 카알 마르크스는 인류문명의 파괴자이며 성서적으로 보자면 ‘적그리스도’의 일종이라고 보면 되겠습니다.

총통- 고개를 끄떡이며....... 히틀러가 유대인들을 사시<斜視>로 보게 된, 매우 싫어한 이유도 거기에 있었습니다. 언젠가는 이 부분 다시 논할 필요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서
옆 방에서 대기중인......... 쉬문트 부관을 불러, 중앙정보부, SS사령부, 게쉬타포 본부에 연락하여, 이탈리아의 밀라노에서 분신자살한 <토티>의 거주지를 <자취방이나 기숙사>
수색하여 칼 마르크스니, 자본론이니, 사회주의니, 노동자 해방이나 착취론 같은 류의 책들을 찾아내어
저자<著者>나 역자<譯者>들을 모두 구속하라는 훈령을 보내라고 지시했다.

그리고 총통은 게르델라 선전상<宣傳相>을 바라보며,
오늘날 1인 GDP 30,000달러에 육박하는 한국의 정유공장들의 하루 석유 정제 용량은 약 300만 배럴에 육박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박정희 집권때, 한국은 휘발유 한 방울 생산할 수 없었습니다.
북한의 남침을 대비해 60만명의 <1960년대 중 후반> 지상군 병력을 보유하고도, 미<美> 8군<軍>이
유류 공급을 끊어버리면, 한국군은 사흘도 못 버티고 그냥 앉으뱅이처럼 주저앉아야 하는 신세였습니다.

그 어려운 처지에서 돈을 백방으로 끌어모아, 썩은 정치인들의 민생우선 복지 타령하는 것을 일소에 붙이고,
일산 35,000배럴의 정유공장을 건설했습니다.

완공과 동시에 벌어드리는 돈은 한푼도 낭비하지 않고 모아서 1차 55,000배렬,
2차로 85,000배럴등 일로 생산시설을 확장하는데 전액 투자하여, 이것이 종자<種子>가 되어,
오늘날의 한국이 석유 한방울 안나오면서도 세계에 손꼽히는 석유화학 5대 강국<强國>이 된 것입니다.


오늘날 박정희 대통령은 집권 10여년 차에 이미 외세<外勢>의 원조가 없어도 대한민국이 붕괴해 가지 않고,
한국의 자체 재정<財政>으로 공무원 봉급도 전부 충당하며, 국가 기간산업이나 댐건설, 고속도로 건설등 국가 발전을 위한 동력<動力>을 자체적으로 확보해 갈 수 있게 되었으며,

군대 또한 박정희 집권 10여년 되자, 드디어 ‘자유 급식제‘가 실현되었다. 군인 1명이 하루에 얼마의 칼로리를 섭취해야만 할까?

제 2차 세계대전때, 미군은 하루 3600~3800칼로리까지 섭취하였고, 모든 물자가 부족했던 독일군도 3000칼로리에 이르렀고,
평소에도 육체노동하는 사람과 정신노동하는 사람들의 섭취하는 칼로리의 양은 달라도,
오늘날 한국 군인들은 2700칼로리 안팍은 섭취할 것이다.

그러나 5, 16 혁명 이전에는, 나라가 너무 피페해서, 군인들은 언제나 배가 고퍘다.
징집<徵集>기간도 오늘날같이 21개월이 아닌 36개월 이상이었고, 군인들이 항상 배고프다는 것을 국민들은 알고 있기에,
그나마 형편이 되는 부잣집 부모들은 자식 면회하러 군에 갈때에는, 보자기에 떡을 한아름 싸가지고 갔다.

그도 그럴 것이, 나라가 워낙 가난해서, 원래부터 군인 급식비가 적적량에서 일부 부족하게 책정되어 있는데,
사단장이 1차로 실례하고, 2차로 연대장이 3차로 대대장이........... 여기에 보급부대 위관 장교들까지 군인들의 급식물을 빼돌렸다.

군인들이 빼돌린 장병용 된장 간장이 군부대 주위 시장에 심상찮게 대량으로 나돌기도 했다.
전시<戰時>에 군량미<軍糧米> 절취는, 즉시 즉결처분 총살형에 처해지지만, 5, 16 혁명이후에도 군량미 절취는 지속적으로 이루어졌다.

박정희는 앞 뒤가 꽉 막힌 사람이 아니었다. 자신이 군인이었기에 안다. 직업군인들이 봉급만으로 자식들 교육도 못시킨다는 것을........

그래서 어떻게 해서라도 국력 증강의 가속도을 높이기 위해 노심초사하였고,
경제성장율을 1%라도 아니 0,1%라도 더 끌어 올리기위해 밤잠을 못자며 고민하고 노력한 것이다.


때문인지 5, 16 집권이후, 공무원, 경찰, 군인들의 봉급이 매년 물가상승율을 훨씬 뛰어넘고 있었고,
매년 인상율 누증에 따라 중앙정보부, 보안사령부 등등의 군 감찰기관의 부패의 감시도 증가하고 있었다.

드디어 박정희 집권 10여년 되자, 이제는 부식비 빼돌리는 것, 엄정한 범죄행위라는 인식이 확산되어, 더는 하기 어렵게 되었고,

이때를 맞추어 박정희는 밥을 먹고픈만큼, 한끼에 2그릇을 먹던, 3그릇을 먹던, 양의 제한이 없는 <자유 급식제>를 실시하여
군인들이 수천년간 굶주림에 시달리는 배고픔에서 드디어 해방된 것이다.

지난 수천년간 한반도에서의 군인의 배고픔이란 일상사이었기에 너도나도 군인되기 싫어했다.
그래서인지 한반도는 그렇잖아도 소국<小國>인데다 국방력이 약해서 외부의 침략에 취약했다.

한반도를 통째로 말아먹은 소위말해 “얼간이 3인방” 인, 고종, 민비, 대원군은 한반도가 분단되기전이었는데도 군데 1만명은커녕 연대병력 규모인 3,000명도 제대로 상비할 수 없었고,

국고<國庫>가 텅비어 군인들의 봉급도 제대로 줄 수 없어, 돌<石>이 잔뜩 섞인 쌀로 봉급을 주다가 군란<軍亂>을 자초하기도 했다.

5, 16 혁명이전에는, 예를들어 해군<海軍>이 전력증강이 시급해, 구축함 한척이라도 마련하기 위해서는,
미국에 별의별 형태로 머리를 조아리며 애걸복걸 구걸하여,

제 2차 세계대전때 활동하던 선령<船齡>이 오래되어 곧 고철 용도로 폐기할 ‘구식 구축함’ 같은 것을 원조로 받아내지 못하면,
한국 자체 역량으로는 구축함 한척 확보할 방법이 없었으나, 박정희 집권 10여년차 되자,

조금 부족했지만 외세의 원조가 아닌 한국 자체 재정<財政>만으로도 최신예 전투기, 최신예 구축함을 해외에서 현금으로 당당하게 구매할 역량을 확보하면서도, 그는,
“수 천년에 한번 나올까 말까한 걸출한 지도자답게, 우리도 조선산업<造船産業>과 항공산업<航空産業>을 일으켜서,

이런 최신형 구축함, 전투기도 빨리 국산화 시켜야” 지, 하며 대중들을 앞서가며 자주국방을 위해 일보<一步 일보<一步> 전진하며 꾸려갈 수 있게끔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치적은 어지간한 극소수의 사람들 외에 일반 한국 사람들 눈에는 보이지도 않고, 알지도 못하고, 알려고 하지도 않는 일이었습니다만
그가 등장하던
5, 16 혁명때만 해도 외국의 원조에 국가생존<國家生存>의 목줄을 걸고,

외국의 원조가 없으면, 정부 자체가 지탱하기 어려울 처지에, 군대 또한 소총 한자루 만들거나 전차 한 대 사올 수도 없었던 빈곤한 한국을 무<無>에서 유<有>를 창조하며
재정적으로나 군사적으로 자립시켜, 한국이 단독 자체 힘으로 한 국가로 생존해 갈수 있는
“자주<自主>한국” 의 초석<礎石>을 쌓은, 그의 보이지 않는 공<功> “찬란한 업적” 이야말로,

수천년 한국의 통치자들이 이룩한 업적중 최대의 찬란한 “금자탑” 이며, 영토가 작은 한국의 지도자였기에 크게 빛을 보진 못했지만.

이는 한 시대를 풍미한 독일의 비스마르크, 일본의 메이지 유신의 치적을 뛰어넘는 진정으로,
한국을 외세<外勢>에서 독립시킨 제 2의 8.15 해방, 진정한 해방인 것입니다.

어쨌든 대한민국 국민인 전태일이 대다수 평범한 한국인 누구나 마찬가지인 것처럼, 이런 부분을 전혀 신경써서 살펴보지도 않고,
자원, 기술, 자본등 무엇하나 없는 낙후된 현실임에도, 가발이나 봉제업등 경공업을 일으켜서

어렵게 모은, 한푼 두푼 모은 몇 푼 되지도 않는 달러를 세고 또 세보며, 한 푼도 낭비하지 않고, 모으고 또 모아, 하나의 공장이라도 세우고 더 세워서 자립경제<自立經濟>,
산업강국<産業强國>을 위해 마치 살얼름판을 밟듯이 한발 한발 어렵게 앞으로 나아가야만 했던,

당시의 한국의 딱하고도 빈곤스런 슬픔 현실을 도외시 한 채, 그냥 좌익빨갱이들의 유도대로,
무조건 박정희 정권의 노동정책을 ‘착취’ 운운의 맹비난부터 하며, ‘붉은 독소’에 분별력이 마비되며 꽃다운 나이에 분신한 것은 매우 애석하면서도..........

박정희 대통령도 5,16 혁명때까지만 해도 한국보다 잘 살았었던, 여러 개발도상 국가들,
혹은 한국과 수준이 비슷했던 세계 초극빈 후진국들의 여타 지도자들하고의 경쟁에서,

열심히 유능하게 일을 잘 하여 이러저런 산업분야에서 하나 둘 그들을 따돌리며 대한민국을 번영으로 이끌고 있는데도,
국민들로부터는 ‘고맙다’는 소리는 커녕, 자본가들 편을 들어 일방적으로 ‘노동자나 착취 탄압하는
사람‘ 으로 몰리게 되었으니, 나름대로 꽤 억울했을 것이다고 덧붙였다...............2편으로

................................................팔로우 부탁드리며..


오늘날 대중<大衆>들은 ‘서구<西歐>식 민주주의’ 를 최고로 여기고 있다.
그러나 민주주의도 여러나름,

일당독재<一黨獨裁>국가지만, 중국처럼 ‘국력증강에 올인하는’ ‘권위주의’ 국가들에 비해
‘서구<西歐>식 민주주의’ 는
국가경쟁력이 너무 많이 떨어지기 때문에,

일례로 지난 40여년간 중국의 경제성장율은 미국 - 유럽의 3~4배 높은 수준이었다.

최근에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미국 우선주의’ 운운하며 세계 각국에 통상전쟁을 일으키면서까지 경제부흥을 꾀하고 있지만,

미국의 경제성장율은 “보호무역의 피해를 고스란히 뒤집어 쓰고 있다” 는 중국의 절반안팍일뿐이다.

‘통상압력’
과거 미국 역대<歷代>정권들보다는 진일보했지만, 민주주의 국가와 독재국가, 특히 공산주의 독재국가들과 차별화 하지 않는 통상 압력, 분쟁은

‘민주주의 동맹국’ 들과 통상마찰을 일으키고,

장기화되면 동맹국들에게,
염증과 증오를 일으키며 안보<安保> 균열까지도 일으켜 세계평화를 위협하게 된다.

통상 압력은 독재국가들을 타깃으로 해야하며, 독재국가들의 국부<國富>증강을 항구적으로 제한하는 장치를 마련치 않고,
적당한 선에서 미-중 <美中> 타협하는 1회용 단기처방으로
그칠
‘어설픈 통상정책’ 으로는 단기간의 과실<果實>은 있을지 몰라도

석양<夕陽>으로 떨어지고 있는 ‘팍스 아메리카’를 재정립하기에는 어렵다.

미국은 우방국들에 대한 통상분쟁 당장 집어치우고, 지구촌 모든 국가들을,
민주- 독재 2분류로 나뉘어,
민주주의 국가 - 독재국가<獨裁國家>간의

무역기준으로,
서구식이든 ‘한국형민주주의’국가든 민주주의 국가들은 단일대오ㅡ단일협정을 맺어 첫해 11%부터 시작해서 6년후 최대 66%의

“독재국가 특별관세”

를 독재국가들 모든 상품에 일률적 부과를 강제<强制>하도록 제도화해야 할 것이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십 수년후에는 구매력에 이어 달러 기준으로도 중국의 1G 등극 확실하다.

그리고 시간이 흐를수록 지구촌 패권<覇權>의 무게추는 중국으로 기울어질 것이다.

미국이 그나마 힘이 있을 때, ‘독재국가 특별관세’ 를 제도적으로 채택해 놓지 않으면,
얼마 안가
미국은 필요때마다 찍어내어 지구촌 모든 상품을 공짜로 사서 쓸수 있는 ‘기축통화 제조기’를 중국에 빼앗길 것이고

‘달러 패권<覇權>’은 막을 내릴것이다.

언론과 인터넷을 통제하고, 국민의 일거수 일투족을 감시하며, 영장없는 체포, 인권탄압이 일상화 되어있는,

국가 안보가 아닌 “독재정권 정권안보” 를 위해, 국민들의 시선을 외부로 돌리기 위해 국수주의<國粹主義> ‘침략적인 팽창정책’을 추구하는
일당독재<一黨獨裁> 국가 1G 등극은

인류문명의 재앙이며 지구촌의 ‘암흑시대<暗黑時代> 출현’ 이라는 뜻이다.

이 상황이 좀더 진전되면,
지구촌의 민주주의 정치는 종멸<終滅>로 치닫게 되고, 모든 국가들은 ‘중국을 수발하는 노예처지’ 로 전략되며,

대한민국 정치가들은 대통령에 출마하려면, 북경에 가서 ‘윤허’를 먼저 받아야 할 것이다.
한국산 핵탄이 북경과 상하이를 비롯해서 중국의 전역<全域>을 겨냥하고 있지 않으면,
대한민국은 중국의 속국으로 전략하고 말 것이다.

‘한국형 민주주의’ 제 7공화국 노선은,
과거 경제성장율 세계 1위를 질주하던 박정희- 전두환 대통령 시대하고
작금의 서구식민주주의 하고 딱 중간라인으로 간다는 뜻이다.

그리고 서구식민주주의가, 국민 누구에게나 피선거권이 있고,
‘각자 능력을 발휘해 부자<富者>가 될 수 있다’ 고 하지만 지극히 가소롭다.

대한민국은 하위 계층의 향상을 위한 ‘성장사다리’ 는 이미 부러진지 오래다.

‘한국형 민주주의’ ‘국민 참여 추첨제 정치 제 7공화국’ 은, 선거가 “국민 축제” 로 승하되면서,
국민들의 자발적 참여로
투표율이 90% 이상 자동으로 올라가 정확한 민의<民意>에 의한 선거 결과를 도출할 수 있게 되었으며,

인간 평등을 좀더 현실감있게 구체화시키고, 빈자 약자 누구나 책이나 신문 등 활자를 가까이 하도록 유도하며,
뼈골 빠지게 일하며, 평생 벌어도 집 한칸 마련할 수 없는 가난한 사람들도,
희망을 갖고 기죽지 않고 살 수 있는,

또한 자가주택<自家住宅>에 살고 있는 ‘중간계층’ 들의 ‘따분한 매너리즘’ 도 치유할,
정치적 처방인과 동시에

대한민국을 부강<富强>한 국가로 향도해 갈 지구촌 최대의 경쟁력있는 최첨단 “생산력 높은 개량<改良> 민주주의 정치제도” 다.

국민들에게 ‘투표만 해라!’ 하는 단순한 서구식민주주의는 시대착오적인, 이제는 낙후된 정치제도다.
이제는 ‘국민 참여’를 보장하고, 선거가 국민의 축제가 되는, ‘국민 참여 추첨제 한국형민주주의’ 로 가야 할 것이다.


중국은
6, 25 전쟁에 개입, 통한<統韓>을 저지하며, 한반도인들에게 천추<千秋>의 한<恨>을 남겼고,
오늘날까지 시종일관 한반도 분단을 고착화하는데 여념이 없는,

툭하면
우리나라에 온갖 꼴사나운 ‘갑질’ 을 일삼고 있으므로, 북한을 물론이고 중국의 북경 상하이를
비롯한 대륙의 전역<全域>을 타격할 핵탄과 중거리미사일,

전략<戰略>잠수함대<潛水艦隊>, 항공산업 육성을 기반으로 하는 자주국방 구축하며,

대한민국은, 좌익빨갱이들의 발호와 그들의 ‘국가파괴적인 난동’ 을 강력 차단 제어하지 않으면 미래가 없습니다.

공무원노조- 전교조- 민노총을 비롯한 수백개의 좌익 홍위병단체들을 비롯한 좌익빨갱이들 철저히 토벌 분쇄하며,

과학기술 진흥과
‘기업하기 좋은 환경’ 탈원전 폐기를 비롯한 ‘제조업 강국<强國>’ 구축의,
강력한 고도 경제성장으로 G-7 - 5 로 승승장구<乘勝長驅> 향도 하는데

‘국민 참여 추첨제 한국형민주주의 제 7공화국’ 외에는 대안이 없습니다.
차기선거에서 승리,
부국강병<富國强兵>으로 통한<統韓의> 대업<大業>을 완수 할 수 있도록.......

대한민국을 위해 “큰일” 을 함께 할 용기있는, 제 7공화국의 주역이 될 분들은

010- 9157- 7605 제 7공화국.. 댓글 또는 문자로 연락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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