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홍천 기미 독립만세운동 100년 >
사흘 이어서 울린 홍천기미독립만세 함성!
소설가 석 도 익
1.열면서
우리나라는 지형적으로 대륙에 달린 미끼 같이 바다에 끝을 담그고 있는 형국이라서 그런지 세계열강들이 서로 탐하여 입질하는 지정학적 환경을 가지고 있어서, 잦은 침략으로 수난의 역사를 겪어왔다.
한민족(韓民族)이 국가를 이룬 단군조선부터 반만년역사 내내 주변국에 침략을 당한 횟수는 약7,500번 정도 된다는데, 대륙(중국),섬(일본)의 징검다리 역할이 되기도 하기 때문에 더 많은 침략을 당했다고 본다.
제일 많이 침략한 나라는 단연 중국이며 다음이 일본이다. 무엇보다도 일본의 왜구들이 노략질을 수도 없이 하였으며, 결국은 침탈하여 국권을 빼앗고 36년간을 식민으로 지배하며 민족성마저 말살시키려 했기에 지금까지도 그 잔재에 시달리고 있다.
더구나 일본의 강점이 원인이 되어 한 나라가 남과 북으로 갈라져야 하는 비극을 맞아야 했고, 민족끼리 피를 흘리며 싸워야 했던 6.25전쟁이 불과 70여 년 전이이다. 당시에 얼마나 많은 동포가 죽어가야 했으며 헤어지는 이산의 아픔을 지금까지 겪고 있다.
그러한 역사는 지금까지도 일본이라면 끝까지 이겨야 한다는 증오심이 우리에게 있기에 금번에도 일본의 무역규제에 하나같이 반발해 여행도 자제하고 일본상품 불매운동에 동참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한다.
지난날 일본의 강점에 시달린 그 고통과 울분이 활화산처럼 폭발한 것이 기미3.1독립만세운동이었다. 일제 관헌의 눈을 피하여 개인과 개인, 단체와 단체가 결합하여 준비하고 힘을 기른 결과요, 결실이었던 것이다. 그 과정에서 희생된 우국지사들은 또 얼마나 많았던가. 이 만세운동이 기폭제가 되고 밑거름이 되어 1945년 환희의 광복을 맞이하게 된 것이다.
그 기미만세운동이 올해로 백돌을 맞이하게 되었으니 이 민족정신 무심히 넘길 수 없어 기미년 그해 홍천에서 전개된 독립만세운동의 전말을 되새기며 거국적 결의를 다져보고자 한다.
2. 홍천의 독립항쟁 기반
홍천에서 거사된 기미독립만세운동을 기술하려면 이전의 격랑기마다 대처해온 자주권 수호활동을 먼저 거론하지 않을 수 없다.
홍천역시 지리적으로 국토 중앙지역에 위치하고 있으며, 우리나라 역사에 격랑기마다 비운의 상처를 감내하며, 그때마다 재기를 위해 힘을 기르던 자주권 수호의 의지가 뿌리내렸던 곳이다.
진한의 마지막왕인 태기왕이 태기산에서 재기를 노리며 세력을 불리자 신라군의 침공으로 이곳 피리골에 은신하며 지낼 때 태기왕 아들과 딸이 이곳에서 유숙하며 구릿대로 피리를 만들어 불면서 밤을 지새우고 떠났다 하여 피리골로 불린다고도 하고 먼골과 배나무골에서 전투를 하며 구릿대 피리로 연락을 했다고 해 ‘피리골’이라 불렸다고도 하는 곳이 서석면 생곡리 피리골이기도 합니다.
또한 찬란한 불교문화를 꽃피우며 불국토를 꿈꾸었던 신라가 쇠퇴하여 고려에 복속될 때 경순왕의 왕자 8명 중에 박씨 부인의 맏아들인 일(鎰 마의태자)은 싸워보지도 않고 나라를 적에게 바치는 것에 대하여 울분하다가 맹 장군과 함께 망국의 서러움을 안고 홍천의 동면에 지왕동을 지나 행치령을 넘어 김부리에 웅거하며 국권 회복을 위해 무리를 응집시킨 갑둔리가 있다. 그곳은 홍천의 동북지역 동창에 연접한 곳이었다. 동창에는 신라 융성기였던 7세기에 해동종의 거찰이 있었던 곳으로 불로(佛路)의 거점이자 국토를 동서남북으로 이어주던 교통로의 거점이었다.
또한 1880년 이후 동학2대 교주 최시형(1대 최제우)은 갑둔리를 중심으로 동학(천도교)을 포교하며 홍천인제 산간지역에 교세를 확장하였으니, 이것이 1894년 풍암리의 동학헉명전투의 연결고리가 되었다.
1894년 10월 13일 차기석이 인솔한 1000여 명의 동학혁명군이 내촌면 물걸리에 집결해 동창(米穀倉)을 소각하고, 10월 21일 홍천관아를 습격하기 위해 진군하던 중 맹영재가 거느린 관군과 장야촌(장평)에서 치열할 전투를 벌였지만 신식무기로 무장한 관군의 적수가 될 수 없었다. 이날 혁명군은 30여명의 사상자를 내고 후퇴했다가 다음날인 22일 서석면 풍암리에 다시 집결해 관군과 최후의 결전을 벌였다.
풍암리 전투에서 전사한 동학농민군의 수는 800여 명으로 전해지고 있다. 이후 관군의 추격을 받은 잔여 동학농민군은 내면 방내, 원당, 청도(지금은 명개리 안청도)와 고양산 뒤쪽에 있는 서석면 수하1리 누런동 고든골로 들어가 농사를 지으며 은거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풍암리 동학혁명군 격전지 자작고개는 당시 동학군 전사자의 피가 자작자작 고였다고 하니 그 규모와 참상을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동학의 교지(敎旨)는 시천주(侍天主) 신앙에 기초하여 보국안민(輔國安民)과 광제창생(廣濟蒼生)을 내세운 민족고유의 신앙인 점에서 당시 국내외적으로 밀어닥친 서세동점의 위기를 극복하고자 했던 민족정신의 발로였음을 알 수 있다. 교조 최제우가 서교(西敎:천주교)의 도래에 대항하여 창시했고, 2대 교주 최시형을 거쳐 1905년에는 손병희(孫秉熙)에 의하여 천도교(天道敎)로 개칭되었다.
창도 당시 동학은 한울에 대한 공경인 경천과 시천주신앙을 중심으로 모든 사람이 내 몸 안에 천주(한울님)를 모시는 입신(入信)에 의하여 군자가 되고, 나아가 보국안민의 주체가 될 수 있다는 경천사상에 기초한 나라 구제의 신앙이었다.
이후 천도교운동은 신민회운동(新民會運動)과 더불어 널리 서민층에 뿌리를 내려, 3·1운동에 나타난 자주독립의 민족주의 역량을 키워낸 민족운동 세력으로 근대사에 빛나는 업적을 남겼다.
3. 홍천의 3.1독립만세운동
홍천의 만세운동 점화는 서울의 3.1독립만세운동에서 비롯되었지만, 오래전부터 그 밑바탕에는 천도교의 동학사상과 서양에서 들어온 신흥기독교의 민주사상이 모태가 되고, 동학혁명과 의병항쟁을 통해 반일감정과 민족사상이 발화된 비폭력 항일운동이 지속적으로 진행되어 온 결과라고 볼 수 있다.
우리나라 민족성은 동적인 면보다 정적인 면이 강하다. 누구나 먼저 앞에 나서기를 양보하고 주저하는 것이 일반적 성향이다. 동적능동형(動的能動形)이 아니라 겸양을 미덕으로 삼는 정적수동형(靜的手動形)이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전국에서도 그 유래를 찾기 힘든 홍천항일독립운동은 조직적으로 3일에 걸쳐 차례로 여러 지역에서 나누어 일으켰으며 주도면밀하게 사전 계획과 지휘에 따라 이루어진 점을 볼 때 누군가 앞장서는 사람이 있어야 모이고 앞으로 가는 것이다. 그 앞에 서는 사람은 무엇보다도 신념과 믿음이 있어야 하기에 홍천의 독립만세운동을 일으킨 사람도 이에 준하여 볼 때 국가관이 확고한 천도교인과 민주적 성향을 가진 기독교인이었던 것으로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무엇보다도 민중봉기의 핵심은 군중의 뜻에 용기를 불러일으키는 일이다, 일제에 침략당하여 나라도 빼앗기고, 국민을 지켜줄 군대도 해산된 상황에서도 탄압에 맞서 전국 각처에서 의병이 봉기된 것은 투철한 민족의식의 발로였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홍천의 기미만세운동은 의병항쟁과도 그 맥이 맞닿아 있다.
1895년 명성황후(明成皇后) 시해사건과 단발령(斷髮令)에 격분한 유생(儒生)들이 근왕창의(勤王倡義)를 내걸고 친일내각의 타도와 일본세력의 구축(驅逐)을 목표로 일어난 항일 을미의병은 영서내륙지역에서도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1905년 을사조약 체결로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장악한 일본에 항거하여 일어난 을사의병도 역시 침략행위를 규탄하고 조약파기를 주장하며 일어난 항일의병 활동이었다.
정미의병은 1907년부터 1910년간에 일어난 고종의 강제 퇴위와 정미칠조약을 들어 우리의 군대까지 해산시킨 반발로 봉기하여 구국항일무력전으로까지 전개되었다.
이렇게 이어진 의병활동의 중심축은 화서학파의 문하생들이었다.
홍천에서 봉기한 의병은 춘천, 제천 의병진과도 연계하여 경기도 동부지역인 가평, 양평 등지와 합세하고 춘천, 원주 등지와도 호응하면서 활발한 의병활동을 전개하였다.
춘천의병의 봉기 때 홍천에서 활동하던 남궁령(南宮欞), 최삼여(崔三汝) 등이 참여하였다. 실제로 화서학파의 영향력은 홍천군 전역에 널리 미쳤고, 그 유대감은 동시다발적으로 연계되었다. 그래서 춘천 의병봉기는 물론 제천의병 봉기에도 홍천지역 의병들이 함께 활동하였다. 홍천의 대표적인 의병장은 박장호(朴長浩), 이계선(李繼善) 등을 들 수 있는데 이들은 모두 화서(華西)의 문하생들이었다. 화서 선생은 ‘바른 것을 지키고 사악한 것을 배격하자’는 ‘위정척사(衛正斥邪)를 설파하였으며, 서세동점의 위기에 직면하여 우리 고유의 풍속과 예절을 지켜야 외세에 흔들리지 않는다는 뜻으로 [箕封康域 洪武衣冠]을 특히 강조하였다.
동학혁명의 주동세력이 동학교도(천도교)와 민초들이었다면 의병봉기는 화서문하의 유학자들이 주동이 되었다. 여기에 일반 서민인 지역농민들도 자연스럽게 가담하게 되었다. 을미의병 즉 전기의병이 강원도 내에서 가장 강렬하게 봉기했던 것은 대체로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이유에서였다.
첫째는 당시 국권옹호를 위해서 굳건한 철학을 가지고 있었던 유림이 강원도 특히 춘천, 가평지역에 집결되어 있었다. 이항로의 문인이었던 유인석(柳麟錫)을 비롯한 문하생들은 모두 위정척사의 행동철학을 실천에 옮겼다. 홍천지방 또한 화서의 연고로 더욱 이 영향을 크게 받고 있었다.
둘째로는 강원도 지방에 포수가 많았다는 것이다. 총을 사용할 수 있는 사람이 많았으므로 그들이 의병에 가담하게 되었고, 실제 포수를 모병하는데 주력했다. 홍천지방의 경우도 같았다.
셋째는 지리적 조건이 안성맞춤이었다. 정규군이 아닌 의병들이 유격전을 벌일 수 있는 산악의 지리적 조건이 알맞았음으로 전국에서 의병들이 몰려들었다.
전기의병 시기에 가장 격렬한 의병항쟁이 전개되었던 춘천의병이 남부의병진을 형성하였고, 1896년 춘천의병봉기를 전후한 시기에는 홍천에서도 의병봉기가 있었다.
홍천에서 활동하던 의병장 최삼여는 군사를 거느리고 지평으로 가서 지평 군수 맹영재를 위협, 설득하며 의병을 일으켰다. 최삼여의 병진은 양근 땅 이원에까지 진출하였다. 그러나 경군부대를 만나 패전했다. 이때 맹영재도 죽었는데 맹영재의 아들 맹일호(孟一鎬)가 최삼여를 살해하고 의병활동을 방해하였다. 양근의 달원 전투에서 최삼여 의병장이 전사하고, 춘천의병장 김경달이 순절하였다.
또한 원주 감영진위대 소속 정교였던 한갑복(韓甲福) 의병장은 1907년 9월 하순 무렵에 뜻을 함께하는 수십 명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 강원도 홍천군과 인제군 일대에서 친일세력을 응징하고 군자금을 모집하는 등 무장 항일투쟁을 전개하였으며, 강릉, 원주, 횡성, 평창, 영월 등에서 일본군과 전투를 벌이며 혁혁한 공을 세우고, 1907년 11월 28일 홍천 동면 가래골(楸谷)에서 의병 22명과 함께 전사하였다. 그의 추모비는 홍천문화원이 추진하여 동면 성수리에 세워져 있다.
1905년 을사보호조약에 반대하여 일어난 의병봉기와 군대해산을 게기로 1907년에 일어난 후기 의병봉기 때도 영서내륙지역에서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이때 홍천지방에서 활약한 의병장은 민긍호(閔肯鎬), 정대모, 이인영(李麟榮), 장경환(張景煥), 심상희(沈相熙), 권득수(權得壽), 정정현(鄭定鉉), 김상태(金相台), 박장호(朴長浩) 등이었다. 이 중 박장호는 홍천의 대표적인 의병장이었다. 의병활동이 전개되던 1907년 8월부터 12월까지 홍천관내에서 일본군에 의해서 불타버린 집은 무려 5백 30여 호에 달하였다.
이와 같이 홍천은 동학군의 마지막 항전과 의병군의 항일전투가 치열하게 전개됐던 곳으로 기미독립만세의 동기부여가 되고 불씨가 되어 이 자주권 수호의 의지가 4월 1일부터 연이어 거사된 홍천의 독립운동에 뇌관이 되고 폭탄이 되어 폭발했던 것이다.
또한 아이러니 하게도 개화기에 동학운동은 단발령에 대한 지지 세력이 되어 개화운동 편에 서서 갑진개혁운동(甲辰改革運動)을 일으켰고, 1905년 천도교 선포 이후에도 개화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흥학회운동(興學會運動)에 공명하여 보성학교와 동덕학교 등 많은 학교경영을 통하여 신교육운동에 크게 공헌하였다.
천도교운동은 신민회운동(新民會運動)과 더불어 널리 서민층에 뿌리를 내렸으며 홍천에서도 동학운동과 의병활동 그리고 신 민주의식을 가진 기독교의 영향이 바탕이 되어, 홍천기미독립만세운동을 거사한 것으로써 이는 자주독립의 민족주의 역량을 거국적으로 떨쳐 근대사에 기록된 빛나는 업적으로 평가된다.
4. 홍천의 3.1독립만세운동
3.1운동이 일어난 정신적 배경은 ⓵ 유교풍토에서 마련된 왕도정신 ⓶ 민족종교로서의 천도교사상 ⓷ 학교, 교회 중심으로 벌어진 신문화운동을 통해 태동한 근대적 민족사상 ⓸ 의병항쟁에서 다져진 항일정신을 등을 들 수 있을 것이다. 그 중에서도 잠재해 있던 항일정신과 왕도정신에 도화선이 된 것은 일제에 의해 고종황제가 독살되었다는 소문이 널리 유포된 것이다. 민족감정상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이 사건은 드디어 거국적 민족운동으로 승화되었던 것이다.
강원도의 만세운동은 1919년 3월 1일 평강에서 처음으로 시작되어 3월 10일 철원시위를 필두로 5월 9일 양양의 만세운동으로 일단 막을 내렸다.
홍천군의 기미만세운동은 4월 1일 홍천면(읍)에서 시작되어 2일에는 동면 3일에는 내촌면 물걸리로 이어졌다.
홍천면(읍)의 기미독립만세운동은 1919년 4월 1일 이곳 장날을 택하여 결사되었다.
홍천면(읍)과 북방면 주민이 홍천 새 장터(신장대리)에 모여들어 만세시위가 벌어졌는데, 이 만세시위는 천도교와 기독교가 공동으로 계획하고 추진했다는 점에서 눈길을 끈다. 2017년에 작고한 사학자 조동걸 교수는 저서『태백 항일사(太白 抗日史)』에서 “강원도에서 기독교와 천도교가 공동으로 계획을 추진한 경우는 홍천과 횡성의 경우가 유일하다”며 “고종 인산에 참례하러 갔다가 3·1운동을 목격하고 돌아온 사람들에 의해 주도됐다”고 소개했다.
주동인물은 천도교인 오창섭(吳昌燮)과 감리교인 차봉철(車奉哲 일명 弘基), 서상우(徐相祐)인데 이들은 고종 황제 인산에 참례하러 갔다가 3·1운동을 목격하고 돌아온 후 홍천에서도 거사할 것을 비밀리에 추진한 사람들이다.
신장대리 감리교인 차봉철은 3월말 연봉리 서상우와 천도교인 하오안리 오창섭 등 11인이 차봉철의 집에 모여 홍천장날인 4월 1일에 독립만세 시위를 결행하기로 계획을 세웠다. 이들은 2차례 모임을 더 갖고 역할을 분담했다. 감리교회는 홍천읍 주민들을, 천도교는 북방면 주민을 각각 맡아 동원하기로 하였다.
감리교회에서는 의병항쟁에도 참여한 일이 있는 원익상(元翊常) 전도사가 중심이 되어 활동하였다.
이때 함께 활동한 사람은 김기현(金基鉉), 김수완(金壽完), 차봉환(車奉煥), 임윤항(林潤恒), 이홍근(李洪根), 송경섭(宋景燮), 장일규(張逸奎) 등이었다.
이들은 비밀리에 연락을 취하면서 태극기를 만들고 교인들을 통해 민중계몽과 동원준비를 갖추었다. 또 오창섭을 중심으로 천도교에서는 같은 마을의 교인인 김영옥(金永玉)과 노동근(盧東根)이 북방면을 중심지로 하여 계획을 추진하였다.
당시 북방면 성동리에서는 마을 동산에 모여 발을 구르며 독립만세를 외치던, 신여균(申歟均), 김원봉(金源鳳)과 하화계리 최승혁(崔承赫)이 합세하여 추진해 나갔다.
기독교 교도들인 감리교회 측에서는 차봉철이 신장대의 이흥근, 임윤항 등과 함께 만세시위에 대해 발의하였다. 3월 31일 신장대리 도로변에서 연봉리 김기현, 신장대리 김수완, 임윤항, 이홍근, 장일규, 진리의 차봉환, 희망리의 송경섭, 하오안리의 천도교인 김영옥 그리고 북방면 하화계리의 최승혁 등 11명이 모였다. 그들은 4월 1일 도로보수작업 인부들이 모이는 것을 계기로 만세시위를 전개할 것을 계획하고, 태극기를 만들고 주민들을 계몽하였다.
천도교 측에서는 오창섭이 3월 30일 하오안리의 천도교인 노동근에게 4월 1일 홍천 만세시위에 많은 사람들이 참가하도록 권유하라고 부탁하였다. 노동근, 오창섭은 북방면 성동리의 김원봉, 신여균 등에게 각 집마다 한사람씩 시위에 참가하도록 주민들에게 전달해 달라고 요청하였다. 신여균, 김원봉은 주민을 계도하였고, 오창섭, 김영옥은 대형 태극기를 만들었으며, 기독교인들은 태극기 수기를 만들었다.
4월 1일이 되자 홍천읍과 북방면 주민들이 홍천읍 신장대리 장터로 모여들었다. 북방면 상화계리, 중화계리, 하화계리, 화동리, 능평리 주민들은 도로작업 부역인부로 가장하고 장터 쪽으로 모여들었다.
오후 1시경 기독교인이 준비한 작은 태극기가 장꾼들에게 나뉘어졌다.
차봉철, 서상우, 김기현은 신장대리 시장으로 나오고, 오창섭, 김영옥은 대형 태극기를 휘두르며 독립만세를 외쳤다. 신장대리 김옥인, 최흥길, 강춘일, 희망리의 이종섭이 적극 가담하고 연봉리의 주춘복, 추은명 등도 합세하여 앞장섰다.
군중은 점차 늘어나 군청에 이르렀을 때는 500여 명에 달하였다. 군중들은 군수 김동훈(金東勳)을 찾았으나 행방을 알 수 없자 태극기를 높이 세우고 대한독립만세를 외친 다음 홍천면사무소로 향했으나 면장 임준철도 도망가고 없었다. 이때 북방면에서 도로 부역을 하고 있던 농민들이 신작로를 따라 읍내로 들어왔다. 이들은 만세시위에 대한 정보를 받고 있었는데, 읍내에서 독립만세 시위가 터졌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삽과 괭이를 든 채 읍내로 달려왔다. 4개 마을에서 부역 나온 약 200명의 시위대는 읍내에 들어선 뒤 도망 중이던 군수 김동훈을 찾아내고는 그가 차고 있던 칼을 부러뜨리고, 시위대에 저항하던 군수의 손을 꺾었다.
오후에 차봉철, 서상우 등의 지휘로 군중이 홍천 헌병분견소로 향할 때 춘천에서 출동한 12명 수비대원과 헌병들이 도착했다. 일제의 총칼 앞에 더 이상 전진하지 못하고, 시위대 일부(33명)가 체포되면서 군중은 해산되었다.
체포된 인원은 일제 측 기록에 33명이라고 하나 일제의 검거선풍에 걸려든 사람은 이보다 더 많을 것이며, 이들은 갖은 고문과 고초를 겪었다, 재판을 받아 징역살이를 한 사람만도 차봉철, 오창섭, 추은명, 김옥인, 강춘일, 송춘복, 이종섭, 최흥길 등이었고, 이들 중 주동인물인 임윤항은 모진 고문으로 정신이상자가 되고도 서대문 감옥에서 6개월간의 징역을 살았으며, 출옥 후에도 정신이 혼미한 상태로 한 많은 일생을 보냈다.
‘항일 태백사’는 주민들의 증언을 통해 당시 곳곳에서 만세를 불러 홍천장터가 마치 독립축제의 한마당 같았다고 기록했다. 또 군청에 모인 군중, 면사무소에 모인 군중, 군수와 맞서 다투던 농민, 시장에서 독립만세의 흥분에 취해 여기저기 모였던 군중 등이 한마음으로 시국을 논했다고 전했다. 한편 이 독립만세운동에 직접 가세한 북방면 5지사(志士)의 독립운동도 있었다. 이들은 대룡산 줄기의 ‘돌모도’ 동산에 올라가 독립을 기원하며 만세운동을 외쳤다. ‘돌모로’에 사는 신여군은과 그와 뜻을 같이하는, 김원봉(성동리), 김복동(능평리), 최승혁,한용섭(하화계리) 동지들도 이곳에 자주 모여 함께 만세를 불렸다고 하여, 이 곳은 지금도 동동산이라고 전해진다.
위의 다섯 분은 홍천 4.1만세운동을 함께 계획했고, 마을사람들을 모아 홍천군중과 합류하여 독립만세를 부르다 체포되어 감옥에서 모진 고문을 당했던 5의사로 추앙되고 있다.
이 거룩한 뜻을 기리기 위해 추모비는 북방면 주민 남궁경 옹이 추진하여 북방면 능평리 능뜰에 세웠으며 1981년부터 해마다 추모식을 거행하고 있다.
5. 동면의 4.2독립만세운동
동면의 만세운동은 홍천면(읍)의 계획과는 별도로 추진되다가 4월 1일 홍천면(읍)의 시위에 자극되어 급진전되었다. 동면의 만세운동은 4월 2일 일어나 이틀 동안 계속되었고 2명이 피살되는 유혈사태를 빚었다.
만세시위는 성수리의 민씨 문중이 계획하여 면민 모두가 궐기했다. 동학운동과 의병항쟁을 통해 고조된 반일감정과 민족사상이 전 면민을 단합시켰던 것이다. 동학전투 때는 속초리의 허상무, 허상용 등의 활약이 컸고, 을미의병 항쟁 때는 민긍호, 한갑복 부대가 일본군과 첫 대전한 곳이어서 일제에 의해 마을이 모두 불태워졌던 곳이기도 하다.
민병태(丙台), 병숙(丙肅) 형제는 금부도사 민정식의 아들로 홍천군 동면 성수리에서 출생하였다. 차남 병숙은 광무5년에, 장남 병태는 광무6년에 각각 관직에 임명되어 재직 중에 1905년 을사보호조약이 강제로 체결되고 이어서 1910년에 한일합방이 되자 잃어버린 조국을 찾아야 한다는 비장한 각오로 관직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와서 구국을 위한 지하운동을 시작하였다.
동면의 민병숙과 그의 조카 민준기 역시 고종의 인산을 참관하기 위해 상경하였다. 명성황후(明成皇后)의 문중종친의 자격이었다.
고종황제국장에 참례하고 돌아온 민병숙은 3월 말경 조카 민준기와 함께 마을 글방인 민두식(閔斗植)의 집에 모여 태극기를 만들며 시위계획을 추진하였다. 속초리 허혁(許爀)과 상의하고 삼현, 방량, 개운, 월운, 후동, 덕치, 신봉리 등에도 연락하여 시위 참가를 유도하며 만세운동을 준비하였다.
4월 1일 홍천읍의 만세시위에 자극되어 급히 서둘러 4월 2일에 면 소재지인 속초리에 집결, 봉기하게 된 것이다.
이른 새벽부터 동면주민들이 속초리로 모여들었고, 성수리에서는 홍천으로 통하는 길을 막아 시위에 대한 정보가 누설되는 것을 막았다. 300여 명의 군중은 태극기를 들고 민병찬의 선창에 따라 대한독립만세를 소리 높여 외쳤다. 면사무소에는 태극기가 게양되고 면장 민병선과 면서기도 함께 시위에 참여하였다. 군중은 당일 오후 홍천으로 가서 전날 시위를 하다 체포된 사람들을 석방하라고 요구할 계회이었으나 면장의 만류로 다음날 다시 모이기로 하고 해산하였다.
다음날인 4월 3일이 되자 면내 각 마을 사람들은 도시락을 싸서 메고 속초리에 집결하였다. 홍천으로 향할 예정이었으나, 헌병과 수비대10여 명이 홍천군청의 허(許)모. 정(鄭)모의 인도를 받으며 나타났던 것이다. 면사무소에서 시위 주동자들과 헌병사이에 격투가 벌어졌다. 헌병의 총격으로 인해 민병숙이 현장에서 사망하자 동생의 죽음에 격분한 민병태가 대항하자 역시 헌병의 총격에 현장에서 순국하였다. 이에 격분한 군중은 면사무소를 파괴하는 등 저항하였으나 일제군경의 총칼제지에 수십 명이 검거되었다. 민병찬은 체포되는 것을 염려하여 피신 망명생활을 했고, 민준기, 민병주, 민순기, 민병두 등과 여러 마을에서 수 십 명이 검거되어 고초를 겪었다.
당시 민병태 열사의 나이 52세였으며 병숙 열사의 나이는 49세로 관직을 버리고 고향 땅에 내려와서 독립운동을 하다가 그토록 열망하던 독립을 보지 못한 채 한 많은 생애를 마감하였던 것이다. 이에 후손들은 자손만대 그 충혼을 기리고자 1985년 10월 3일 동면 성수리 오룡산 자락 양지 유택에 추모비를 세웠다.
6. 동창마을의 4.3 독립만세운동
동창마을의 기미만세운동은 어느 지방보다도 강렬한 만세시위운동이었다. 홍천군의 내촌면, 서석면, 화촌면, 내면과 인체군의 기린면 등 2개 군 5개면에서 3천여 명의 군중이 집결하여 독립만세를 불렀던 운동으로 문헌에 4.3동창만세운동으로 기록되었다.
내촌면 물걸리 동창마을에 천도교도인 장두 김덕원 과 전성렬은 같은 교도 전우균과 이문순을 연락책으로 하여 인근 5개면에 연락하며 거사를 준비하였다. 그러던 중 홍천읍에서 4월 1일 만세운동이 일어나자 이들은 4월 3일을 거사일로 정하였다. 마침내 약속한 3일이 되자 아침부터 각 지역에서 시위 군중이 모여들었다. 지금의 팔열각과 그 옆 다리목을 중심으로 마을을 가득 채운 인원은 3,000여 명에 달하는 것으로 추정될 정도로 규모가 컸다. 약방과 글방이 있던 전영균의 집에는 큰 태극기가 높이 게양됐고, 군중은 모두 손에 수기를 들고 있었다.
군중 앞에 선 김덕원 장두(狀頭)는“우리는 지금 조국의 자유와 독립을 찾기 위해 이곳에 모였습니다. 한사람도 이탈함이 없이 대한독립만세를 힘차게 불러 우리나라가 주권국가임을 세계만방에 널리 알립시다,”라며 평화시위를 선언하고, 이어서 이문순이 대한독립만세를 선창하자 뒤를 이어 만세 소리가 마을을 뒤흔들었다. 얼마 후 지금의 초등학교 뒷길을 따라 도관리 헌병주재소의 헌병 7명이 헌병 보조원 홍재호, 박연흥을 앞세우고 들이닥쳤다. 헌병이 시위대를 향해 일제히 발포하니 시위 군중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군중은 남의 집으로 혹은 뒷산과 개울가로 몸을 피했지만 무참한 총격에 여러 사람이 쓰러졌다. 그 와중에 현장에서 이순극, 전영균, 이기선, 연의진, 김자희, 전기홍, 양도준, 이려선이 순국하여 8열사로 추앙되고 있다. 그밖에도 20여 명이 총상을 입는 등 많은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동창마을을 중심으로 만세운동을 이끈 인물은 천도교도였던 김덕원 장두(狀頭)(1879∼1943)이였다. 김덕원은 낙향한 경주김씨 후손으로, 선대인 김군보가 동창보를 건설하여 동창들을 옥답으로 개간한 천석지기 집안으로 살아왔고, 당시는 마방을 운영하기도 하였으며, 동학(천도교)에 입교한 후‘사람이 곧 하늘’이라는 인내천(人乃天) 사상에 입각해 평등사상을 몸소 실천하며 동창만세운동을 주도한 인물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김 지사와‘동창 만세운동’은 1970년대 이후에야 증언을 통해 세상에 알려졌다.
민족운동의 성지라 불리는 강원도 홍천군 물걸리 동창마을에서 태어난 김덕원 지사는 역사 속에 묻힌 독립운동가로 강원도 지역의 대표적인 동학혁명 전투인 홍천 자작고개 전투에 참여하였으며, 그 뒤 항일의병 전쟁을 지원하였고, 국권 상실 후에는 치밀한 준비 끝에 동창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오랜 피신 생활 끝에 일본 경찰에 잡혀 3년여의 옥고를 치르다 실명까지 한 이후 쓸쓸한 말년을 보내다가 순국한 항일운동 지도자이다.
정부에서는 팔열사의 공훈을 기려 1990년 일제히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증하였다. 만세운동을 주도한 김덕원 의사에게는 1992년 건국포장이 추증되었다. 대한독립 만세의 함성이 시작된 동창마을에는 1963년 팔열사의 뜻을 기린 팔열각이 건립되었으며 홍천군에서는 1991년 기미만세 공원건립위원회를 조직하여 내촌면 물걸리 당시 만세운동이 일어난 현장에 4.3독립만세운동과 순국한 팔열사의 뜻을 기리기 위해“기미만세공원”을 조성하고 기미독립만세 상을 건립하였으며, 4.1만세운동에서 순국한 분들을 추모하는 추모비도 세워서 이 마을이 3대 민족운동이 잇따라 전개된 역사적 성지란 사실을 입증해 주고 있다.
이후 홍천의 독립만세운동은 간헐적으로 이어졌다. 4월 11일 밤에는 내촌면 도관리 마을청년들이 주동이 되어 산위에 올라가 봉화시위를 전개하였다. 서면 모곡리에서는 한서 남궁억이 1918년 겨울에 서울서 내려와 머물며, 무궁화를 보급하고 학교를 세워 3.1운동의 정당성을 민중에게 계몽하였다. 이에 모곡학교에서도 학생들이 학교에서 독립만세를 외쳤다.
7.닫으면서
일본의 식민지배에 저항하여 온 민족이 분기한 3ㆍ1만세운동은 비폭력적이고 평화적인 만세시위운동으로 민족사적 의의뿐만 아니라 전 세계 약소민족의 독립운동에도 큰 영향을 미친 우리 민족의 용감한 투쟁이었다. 그러나 지리적 여건으로 홍천의 만세운동은 3.1만세운동으로부터 한 달 뒤인 1919년 4월 1일부터 전개되었다. 3ㆍ1운동은 6개월 이상 거국적으로 맹렬하게 타올라 해외에까지 그 영향을 미치며 국제적인 큰 동력으로 작용한 민족독립 쟁취의 거사였다. 그 거대한 물결의 한 가닥인 홍천의 만세운동이 그 규모나 전개된 상황에 비해 대외적으로 널리 알려지지 않은 아쉬움이 있다.
기미3.1만세운동이 금년에 100주년을 맞이했다. 이 만세운동이 기폭제가 되어 우국지사들이 나라 안팎에서 끊임없이 독립투쟁을 이어간 결실로 드디어 1945년 감격의 광복을 맞이하게 된 것이다.
36년의 지옥 같은 탄압을 인내하며 뼈 속에 각인된 우리의 민족혼은 오히려 금석처럼 강인해졌다. 지금도 한일문제를 논의하는 외교문제에 있어서 두 나라 사이에는 민족감정이 작용할 수밖에 없는 것이 사실이다. 과거로부터 쌓인 앙금 때문이지만, 침략국으로서의 결자해지를 명쾌하게 짓지 않은 탓이다. 두 나라 선수가 맞붙는 한일전의 경우는 사생결단의 전투를 방불케 한다.
1945년 8월 총독 아베 노부유키가 패망하여 떠나면서 마지막 남긴 말을 우리는 곰씹어야 할 것이다.‘조선이 과거의 영광을 되찾으려면 앞으로 100년은 걸려야 할 것이다. 우리는 패망하지 않았다. 나는 다시 돌아올 것이다.’지금도 나치 경례로 오만을 보이는 일본의 지도자는 아베의 그 말을 예언처럼 믿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의 말대로 우리는 지금 서로 헐뜯고 비방하며 시간을 낭비하고 있을 때가 아니다. 모든 국민 역량을 하나로 결집하여 찬란한 문화를 다시 세우고, 힘을 길러 세계의 등대로 우뚝 서는 길만이 우리가 나갈 길임을 명심하는 기회로 삼아야 할 것이다.
* 첨언
홍천의 3.1운동은 1919년 4월 1일부터 11일까지 홍천읍과 면소재지에서 6,000여 명이 시위를 벌여 10명이 살해되고 100여명이 투옥되었다. 홍천 지역의 항일 운동을 기리는 기념비는 홍천읍 연봉리 무궁화공원에 1979년 10월 3일에 제막되었으며. 국가보훈처 현충 시설물로 지정되었다.
홍천군민은 우리나라 중심에서 격랑의 위기 때마다 애국정신으로 승화시킨 선열들의 숭고한 민족정신을 숭고하게 받들고 있다. 3.1절 기념식은 정부에서 행하는 날과 같이 매년 3월1일에 무궁화 공원 기념비 아래서 거행하고 있다.
그러나 홍천의 기미독립운동 기념일은 과거 홍천군민이 한마음 한뜻이 되어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던 4월 1일에 민간주도로 기념하는 것이 우리고장의 정체성을 살리고 조상의 얼을 찾아가는 바른 길이라고 생각한다.
* 참고로 만세운동에 참여했다가 옥고를 치른 선열의 재판기록을 덧붙인다.
홍천4.1운동 재판기록(裁判記錄)
판결(判決)
홍천군 홍천면 신장대리 고물상 기독교도 차봉철 24세
연봉리 고물상 기독교도 서상우 47세
연봉리 숙박업 김기현 27세
하오안리 농업 천도교도 오창섭 53세
신장대리 재목상 김수완 19세
희망리 염물상 이종섭 34세
신장대리 잡화상 최흥길 19세
신장대리 농업 임윤항 70세
희망리 잡화상 송경섭 30세
신장대리 잡화상 장일규 20세
신장대리 매약상 이홍근 18세
진리 고물상 차봉환 20세
홍천군 홍천면 하오안리 농업 천도교도 김영옥 51세
북방면 하화계리 농업 최승혁 34세
성동리 농업 신여균 24세
홍천면 하오안리 농업 천도교도 노동근 49세
신장대리 잡화상 김옥인 18세
신장대리 잡화상 강춘일 37세
신장대리 농업 주춘복 21세
연봉리 농업 추은명 42세
주문(主文)
피고 차봉철을 징역 1년 6개월에 처한다. 피고 서상우를 징역 1년에 처한다, 피고 오창섭 김기현을 각 징역 8월에 처한다. 피고 차봉환 김수완 임윤항 김영옥 최승혁 송경섭 장일규 이홍근을 각각 징역 6월에 처한다, 피고 신여균 징역 3월에 처한다. 피고 김옥인 강춘일 주춘복 이종섭 최흥길 노동근 추은명을 각각 태(笞)90에 처한다, 압수물품은 이를 몰수한다.
이유(理由)
피고 차봉철은 대정(大正1919년) 8년 3월 상순 이 태왕 국장당시 경성에 왔을 적에 천도교주 손병희 등이 조선독립선언을 발표한 결과 이에 따르는 수많은 군중이 조선독립시위운동을 전개하는 것을 친히 견문하고 촌으로 돌아왔는데, 그 뒤 조선독립운동은 각지에 파급하여 점점 치열해지므로 일찍부터 조선독립을 희망하고 있었던 것이었음으로 이 운동의 취지에 찬동하고 정치변혁을 목적하여 피고의 마을에서도 역시 이 운동을 성원하려고 동월말경 피고 서상우 와 모의한 다음 동월 31일 피고 김기현(일명 김동진)김수완 차봉환 임윤항 이홍근 송경섭 김영옥 장일규 최승혁을 피고 등의 주소인 신장대리 고찬진 집 앞도로위로 소집하고 다음 4월 1일 도로를 수축하는 인부로서 다수 이민이 집합하는 것을 계기로, 이 날을 기해서 조선독립시위운동을 전개할 것을 모의하였는데, 일동이 여기 찬동하고 공모하여 이날 오후 1시경 피고 차봉철은 미리 작성해두었던 구 한국기(증제1호)를 휴대하고 피고 서상우 김기현과 함께 신장대리 시장으로 나오고 잇따라 이상의 피고등도 참가하여 조선독립만세를 절규하며, 이민 약 200명을 규합하여, 함께 조선독립만세를 외치고, 동군 군청으로 몰려가서 역시 독립만세를 연호하여서 치안을 방해하고,
피고 김옥인 강춘일 주춘복 이종섭 최흥길 추은명은 이 독립운동이 전개된다는 소식을 듣고 그 취지에 찬동하여 이날 시장에서 군중과 함께 조선독립만세를 외쳐 치안을 방해하고 ,
피고 오창섭은 피고 차봉철 등의 조선독립 시위운동이 있는 것을 듣고 그 취지에 찬동하여 동년 3월 30일 피고 노동근 집에서, 동 피고에 대하여 4월 1일에는 홍천읍내에서 조선독립시위운동이 전개되겠는데 한 사람이라도 더 많이 참가하도록 이민에게 그 뜻을 권유해 달라고 의뢰하였는데 동 피고는 이 운동에 찬동하고 이를 승낙하여 그날로 피고 신여균에게 전달하였는데, 그도 역시 이 운동의 취지에 찬동하고 다수 이민들에게 그 취지를 설명하여 이 운동에 참가할 것을 선동하고 그 결과 4월 1일 이민들은 신장대리에서 조선독립 시위운동집단에 투신하여 조선독립만세를 불러서 치안을 방해한 것이었다. 위 사실은
1. 당 공정에서 피고 차봉철의 판시와 같은 범행이 있었던 것을 자백
1. 피고 김기현의 판시와 같은 취지의 자공(自供)
1. 피고 김수완의 판시와 같은 조선독립만세를 불렀다는 취지의 자공
1. 피고 차봉환의 판시와 같은 취지의 자백
1. 피고 임윤항의 판시의 시일장소에서 조선독립만세를 불렀다는 자공
1. 피고 이흥근의 판시의 시일장소에서 조선독립만세를 불렀다는 취지의 자공
1. 피고 송경섭의 고찬진 집 앞 도로위에 모인 일이 없었다고 변명한 6외에 판시와 같은 취지의 공술
1. 피고 장일규의 판시와 같은 취지의 공술
1. 피고 최승혁의 판시와 같은 취지의 자공
1. 피고 서상우의 판시와 시일장소에 조선독립만세를 외쳤다는 자공
1. 피고 노동근의 대정 8년 3월 31일 피고 오창섭이 자기 집으로
와서 읍내에서 4월 1일에 조선독립만세를 부르게 되므로 한 사람이라도 많이 모이도록 하자는 취지를 말하며 그 뜻을 성동리 이민들에게 전해달라고 의뢰하매 이것을 다시 김원봉에게 전달한 사실이 있었다는 공술
1. 검사가 피고 김영옥에 대한 심문조서 중에 “판시 시일에 종이로 만든 구한국기를 휘두르면서 홍천읍내에서 군중과 함께 조선독립만세를 외친 일이 있었다.”는 공술
1. 피고 오창섭의 심문조서 중(증제2호)에 3월 30일 김원봉과 함께 신여균 집으로 달려가, 4월 1일은 홍천읍내에서 조선독립만세를 부르겠음으로 집합하라고 말하고 4월 1일에는 김영옥과 함께 한국기를 만들고, 동인은 이것을 휴대하고 만세를 무르려고 나갔었다는 취지의 공술
1. 사법경찰관의 피고 신여균에 대한 심문조서 중 “대정8년 음 2월 29일 오창섭외의 1명이 북방면 성동리 김원봉 집으로 와서 조선독립에 관한 담화가 있으니 이민이 모두 참가해 달라고 하므로 자기도 김원봉 집으로 간즉 오창섭이 자기에 대하여 조선독립을 도모하기 좋은 기회이니, 각 집마다 한사람씩 나오도록 마을 사람들에게 전달해 달라고 부탁함으로 자기와 김원봉 양인이 각기 집집을 방문하여 그 뜻을 전달하고 홍천으로 나오던 도중에 만세를 부르겠음으로 동행하자고 권유한 사실이 있었다.는 취지의 공술
1. 피고 이홍근의 조서 중에 “시일은 잊었으나 차봉철 집에서 동인 자기 및 임준홍의 발의로 11명이 회합하여 4월 1일에 독립운동을 결행하기로 하고 동 운동을 하려고 생각한 것은 그보다도 10일 앞서 부터이고 그사이에 2회나 협의하여 4월 1일 마침내 시위운동을 단행하게 된 것이라”는 취지의 공술
1. 홍천헌병분견소장 앞으로 제출한 대정 8년 4월 2일 부 체포소속서면 중에 “차봉철 서상우는 4월 1일 신장대리 노상에서 다수 군중 가운데 섞여서 조선독립만세를 외치고 타인을 선동하여 인심을 교란하여 이를 제지하여도 도리어 반항하는 태세로 나오므로 체포하였다.”는 취지의 기재
1. 동 체포 소속서인 서면 중에 김기현 김영옥은 4월 1일 신장대리 노상에서 군중가운데 섞여서 조선독립만세를 외치고 타인을 선동하여 독립시위운동을 하며 인심을 교란시키므로 이를 제지 하였으나 대중의 힘만 믿고 응하지 않고 치열해지므로 체포하였다.”는 취지의 기재
1. 압수된 구 한국기의 현존 등을 종합하고 참작하여 이를 인증하기에 증빙이 충분하다. 법에 비추어 보니 본건은 범죄후의 법령에 의하여 형의 변경이 있었음으로 형법 제 6조 제 8조에 쫓아 신.구 양법을 대조하여 그 형의 가벼운 것을 적용하기로 한다. 구법에서는 보안법 제7조 조선형사령 제 42조에 해당하고 신법에서는 대정 8년 제령 제7조 제 1조에 해당함으로 그 가벼운 구법인 보안법 제 7조 조선형사령 제42조의 규정을 적용하여 소정 형 중 징역형을 선택하고 그 형기 범위 내에서 처단하기로 하며, 피고 김옥인 노동근 추은명에 대하여는 정상을 참작하여 조선 태형령 제1조 제4조에 쫓아 태형에 처하고 압수물품은 범죄에 공용물임으로, 형법 제19조에 의하여 몰수하기로 한다.
그러므로 주문과 같이 판결한다.
대정 8년(1919) 6월 12일
경성지방법원 조선총독부 판사
김천광길(金川廣吉)
주. 1919년 7월 23일 경성복심법원에서 공소 기각. 1920년 2월 2일 상고 기각되다.
< 참고문헌 >
3.1운동과 김덕원의사 윤병석, 신용하, 박성수, 김호일 공저 출판사 : 모시는사람들
강원도 동학농민혁명 도서출판 모시는 사람들 (신순철 임형진 강효숙 신우
전석환 채길순 이병규 임상욱 조극훈 공저)
출처 : https://www.mosinsaram.com/184 [도서출판 모시는사람들]
출처 : 기독신문http://www.kidok.com)
출처 : 코리안스피릿(http://www.ikoreanspirit.com)
[2019 3·1운동 100년, 2020 동아일보 100년]
3·1운동 100년 역사의 현장 2부 <제35화>강원 홍천군편.
홍천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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