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도익 <칼럼>

흉년에도 예술농사는 지어야 한다.

돌 박사 2011. 1. 7. 22:57

2011-01-07 오전 9:57:47 입력 뉴스 > 홍천뉴스

[석도익 칼럼]
흉년에도 예술농사를 지어야한다.



예술이란 다른 사람들과 공유할 수 있는 심미적(審美的)대상, 환경, 경험을 창조하는 기술과 상상력을 동원 발휘하는 인간의 활동과 그 성과를 예술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기쁠 때나 성날 때나 슬플 때나 즐거울 때나 그 속에서 아름답고 진솔한 미학을 건져 올려 유용한 양식을 만드는 작업이 창작이며 어떠한 사물에도 생명을 불어넣고, 무형의 시간과 공간을 넘다들면서 소통케 하여 신과 내통하는 세계를 창출하는 것이 예술이라고 생각된다.


척박한 땅에 가뭄과 홍수가 있다면 농사는 흉년이겠지만 예술의 창작은 어떠한 악조건 속에서도 풍성한 작품을 거둘 수 있는 것이기에 그 생명 또한 무한의 세월을 가지는 것이다.


그러나 창작된 예술은 생명력을 가지고 역사성을 부여받지만 창작자는 언제나 나약한 사람으로 제대로 대우받지 못하고 많은 고생을 감내하며 어렵게 살아가야 하는 것이 현실이다.


사람도 우선 먹어야 살기 때문에 춥고 배고프면 제일먼저 예술이라는 부분이 뒷전으로 밀려나게 된다.


예산이 부족하면 적게 배정받은 문화예술부분이 제일먼저 도마 위에 올려져 잘리게 되는 것이 당연한 순서처럼 되어 있다.


배부르고 등 따듯해야 여가선용으로 이용하는 것이 문화예술이라는 등식이 성립되어져 있기 때문이다.


이는 문화와 예술을 한 끈에 묶어놓았기 때문이다. 물론 문화의 생성은 예술이 뿌리가 되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것이겠지만, 문화는 우리들의 생활하는 모든 것이 문화인데 문화 속에 예술만 있는 것처럼 이해되어왔기에 창작의 예술은 문화의 이복동생같이 취급되어져 불이익을 받아 온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밥은 매일같이 먹어야 배가고프지 않고 살겠지만 삶의 허전한 마음의 공백은 밥으로도 채울 수 없는 것이다.


벨기에의 여성작가인 마리루이즈 드라 마리에 의하여 쓰여 진 프란다스의 개 파트라슈의 이야기에서 예술이 주는 위대한 힘 과 삶의 진실을 깨우치게 하고 있다.


그러나 예술은 예술이고 실지 삶에 가장 기본이 되는 살기위하여 공급되어야하는 것은 밥이고, 배 고품의 육체적 고통에서 예술은 사치라고 할지모르나, 예술의 창작은 춥고 배고프고 서럽고 어두운 곳에서 진실을 갈구하는 것이기 때문에 더욱 활동력을 얻는다.


모든 예술은 진실을 뿌리로 창작되지만, 예술인은 정치권력이나 금권에 약한 가난과 순수가 오히려 취약점이 되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이용당하게 되기도 한다.


과거의 역사에서도 위대한 창작품을 수없이 만들어낸 예술인일지라도 한때 잘못된 정치앞잡이로 활동함으로서 역사 앞에 죄인이 되는 예가 많았다.


사상을 달리하는 공산주의자들은 수많은 예술인을 이용하여 인민대중을 현혹시고 선동했던 것이다.


북한군이 남침하여 가장 많이 납치해간 것도 남한의 예술인이었고 그들이 우대하는 척 하며 이용한 것도 예술인이다. 그들도 사람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것은 예술이란 진실의 힘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정경유착도 나쁜 것이 지만 정치예술유착 또한 더욱 나쁜 것 일수도 있다는 것을 보여준 단면이기도 하다.


지방에서는 예술인들의 활동도 쉽지 않다고 한다. 먹고사는데 아직은 급급하고 첨단화된 현대문명이 삶의 여유를 빼앗아 가고 예술의 진실한 가치를 가려놓고 있기 때문이다.


필자가 고인이 된 향토시인이 생전에 창작한 시 한편이 사회에 빛이 될 수 있는 아름다운 것이기에 이를 시비로 건립하고자 어렵게 추진하여 비를 완성하고 이를 세우고자 마땅한 장소를 찾으려 했지만 생각같이 되어지지 않았다.


이유는 시를 쓴 사람이 유명하지 않은 우리지방 사람이라는데 있었다. 아름다운 글을 보는 것이 아니라 글을 쓴 사람을 보는 것이었다.


그가 중앙에서 활동하던 이름 있는 유명한 시인이 아니어 서다. 각고의 노력 끝에 아쉽지만 시골 한구석에 세워야 했다.


이렇듯이 예술작품이 아니라 그 작품을 쓴 사람의 지명도로 작품을 평가하는 세상인 것이다.


세계화 된 지금의 시대, 우리들은 아직까지 이런 잣대로 살고 있다.

아무리 좋은 글을 써도 읽혀지지 않고 있는 지방화 시대는 요원하기만하다.


그렇다고 지방에는 못난이 예술인만 사는 것은 아니다. 지방에는 너무도 훌륭한 예술인이 많고 중앙무대에서 내노라 하고 활동하고 있지만 막상 내 고향에서는 전혀 알아주지 않는 지방예술인으로 묻혀 버린다.


지방에서 치러지는 행사에는 중앙에서 잘나가는 예술인을 많은 돈을 들여가며 초빙하여 춤추고 노래하고 강연하게 하는 것이 당연한 것으로 되어있다.


이는 예술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일상전반에 걸쳐 일어나는 형상이다. 내 지방에 살고 있는 사람도 제대로 알아보지 못하고 대우하지 않는 지도자들이 어찌 내지방일을 잘해나갈 수 있으며 지방예술발전을 기대할 수 있겠느냐는 생각을 할 때 우리들을 슬프게 한다.


또한 스스로 창작하여 자신의 분신을 세상밖에 내놓아 사회를 이롭게 해야 하는 창작활동을 어딘가에 기대하고 의지하려는 나약한 예술인으로 길들여지는 현실이 예술인의 장래를 한숨짓게 한다.


그러나 현명함이란, 탓하기 보다는 농사가 흉년이면 예술인은 작품농사를 더욱 많이 지어 굶주린 마음에 풍요로움을 주어야 할 것이다.

 

 



안영근 기자(hci1004@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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